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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5벧전 특강(4:13)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라(이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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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6회 작성일 15-06-0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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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특별 메시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라

말씀/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작년에 한국에서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안나 선교사도 한국에 들어와 다운로드로 이 드라마를 봤습니다. 어떤 분의 평도 읽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미생(未生)인 우리 모두가 완생(完生)이 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너무 높다는 것, 특히 장그래와 같은 미생의 경우 완생도 아닌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 드라마가 보여줬다.” 일 년 만에 와보니까 다소 생소한 용어들도 생겼더라고요. 그 중에 많이 듣는 것이 갑질, 슈퍼갑, 울트라갑. 이 모두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고난이 그 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대체로 듣기 좋아하는 말은 번영, 형통, 성공, 물질적 세상적 축복, ..... 뭐 이런 것들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빌 1: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딤후 3: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벧전 4:13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본문말씀이 전해졌던 주후 64년경,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극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신앙의 순결을 지킨 신자들은 가족과 집과 고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이 됐습니다. 붙잡힌 신자들은 불에 태워지거나, 넓은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사도 베드로에게도 순교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베드로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편지를 써서 극심한 고난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 격려와 위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크신 구원, 하나님 나라 산 소망,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일깨워준 것과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즐거운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즐거워해야 하는지를 알고, 사도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즐거워하는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 그리스도의 고난
 
13a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먼저 고난을 당하신 분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기 비움과 낮아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토록 아름답고, 그를 흠모하는 것은 그 생애 전체가 우리 죄인들을 위한 자기 비움과 낮아짐, 고난과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보세요. 전능하신 창조주,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되 인간이 되셨고, 죄인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디로 오셨습니까?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이었습니다. 갓난아기로 오시자마자 헤롯 왕의 칼을 피해 외국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장 부유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가장 강하신 분이 연약한 우리를 위해 가장 약하게 되셨습니다(사 53:2).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러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53:3-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12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것들은 멸시, 버림받음, 간고, 질고, 슬픔, 아픔, 고난, 찔림, 상함, 징계, 채찍질, 죽임 당함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 고향사람들, 심지어는 친족들로부터도 버림받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백성들,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이 모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이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심으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낮아지고 멸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때에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삶을 배우는 제자가 된 것이 우리 생애에 임한 가장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 먼 우리 죄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느라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의 영혼이 목마른 한 여인에게 영생수를 가르치시려고 중동의 뙤약볕 아래를 걸어서 먼 길을 가셨습니다. 영적으로 장님과 같았으나 교만하여 말씀을 안 받아들이는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를 품고 밤새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깊은 슬픔에 빠진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하는 헬라인들에게 “죽어야 산다.”는 밀알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평생, 심지어는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둔하고 자기세계에 갇혀 사는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그 자체가 큰 특권이면서 동시에 많은 인내와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성경 가르침이 없이는 구원과 영생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가슴에 품고 새벽 마다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시느라, 그리고 틈만 나면 중보 기도를 하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완악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과 세계만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마음 바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축복임과 동시에 고난임을 압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12제자를 해산하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싫어했던 베드로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의 죽음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기까지 그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해산의 고난을 통해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 대부분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들이 됐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들을 실제적으로 돌보시느라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핵심이자 절정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처형방법이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채찍질을 당하여 살이 찢기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은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기절과 깨어남을 천 번 이상 반복하며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갇혀있는 동안만큼은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수치와 모욕과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교만과 이기심과 정욕과 온갖 더러운 죄악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은 우리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준 고난입니다. 참된 위로와 평화를 준 고난이요, 세상 죄를 대속하신 고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38)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찬송합시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a절을 다시 봅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심히 물질적이고 인본적인 세상에서 진실한 신자로 살 때, 따돌림을 당하고, 무시도 당하고, 불이익도 당할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방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실 된 신자로 살기 위해 이런 고통들을 감수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대학생 양 한 사람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청년 한 사람에게 꾸준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말씀의 샘을 파는 것,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예수님께 헌신된 제자로 세우기 위해 자아를 죽이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선교일선에서 충성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 또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절약하여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 만민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대속물이 될 수는 없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다가 결국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자로 살므로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 혹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 할 때, 어떤 마음을 품기 쉽습니까?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12절과 같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운명적인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전 2:19,20절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것만도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주는 방향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참고 인내하라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라”(kairete)는 “기뻐하라, 즐기라, 축하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하라, 즐기라, 축하하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도 약 1:2절에서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성경은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명합니까? 13b절을 읽어봅시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이는”이라는 접속사는 전반절의 목적격(so that)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장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만물을 회복하시고 영원토록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그 날이 한 개인에게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에 신자나 불신자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날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영생복락에 들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서 ‘기뻐하게’라는 헬라어는 ‘차고 넘치는, 굉장한, 지나친 기쁨(exceeding joy)’입니다. 표준새번역은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벧전 1:8절에, “말할 수 없는(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기쁨”, 고후 4:17절에서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영광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게 됩니다.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됩니다(단 12:3).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은 자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십니다(벧전 1:7b). 그 영광은 크고도 놀라워 이 땅에서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롬 8:18). 또한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마 5: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약 1: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합니다(딤후 2:11,12). 

그 날에 우리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고난의 축복도 놀랍습니다. 히 12:6절에,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친아들로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합니다. 개인을, 때로는 가정을, 교회 공동체를, 민족을, 국가를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욥 23:10절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이 되어 나온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서 불순물들을 제거하시고, 점점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자가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벧전 4: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 위에 영광의 영, 곧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중보기도해주시는 성도들은 어떤 고난과 박해도 넉넉히 이깁니다. 또한 엡 5:19,20절에, 영광의 영은 우리에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와 감사를 넘치게 합니다. 필립 얀시는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거룩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생명의 길, 영광의 길이요,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서기 155년경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이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는 로마 총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그러자 총독은 예수가 신인 것을 부인하라고 말했습니다.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없소.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총독이 다시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야수들 가운데 던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폴리캅이 대답했습니다. “야수들을 부르시오. 나에게 변절이란 있을 수 없소” 총독이 다시 폴리캅에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불에 태워 없애버리겠다.” 폴리캅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위협하는 불은 한 시간 동안 타고 곧 꺼질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악한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이렇게 지체하시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빨리 하시오.” 총독이 폴리캅을 산 채로 불태우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폴리캅은 나무 단 위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천사들과 권세들과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께 찬양을 돌립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폴리캅은 용기와 기쁨으로 넘쳤고,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폴리캅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함으로 서머나와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과 오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함께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케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붙잡은 말씀이 바로 폴리캅이 붙잡고 걸어간 계 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였습니다. 
 
4년 전에 제가 한국대표직을 위임하고 제 나이 68세, 안나 선교사 63세에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당시 5살 4살 2살 1살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돌봄이 필요한 네 명의 손녀 손자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앞서서 일하셨습니다. 아무런 꼬투리가 없던 저로 하여금 짐바브웨 국립 대학교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하게 하시고, 교수 선교사로서 가르치며 목양하게 하셨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어느 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일어나 기도를 하면서 몇 가지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짐바브웨에 가면 지난 40년 동안 한 결 같이 나를 섬겨준 안나 선교사를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모든 설거지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착 첫 날부터 지난 4년 동안 이를 실천해왔습니다. 새벽 4-5시에 일어나면, 저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양식을 먹고 기도를 한 후, 운동을 하고, 아침을 준비합니다. 7시 반쯤 됩니다. 저는 “공주님 아침식사가 준비됐습니다. 나오세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아침 먹읍시다!” 라고 하면, 안나 선교사는 그때까지 안방에서 양식 먹고, 기도하며, 개인시간을 충분히 갖다가, “예!”하며 거실로 나옵니다. 영광의 영께서 날마다 우리 마음에 찬송과 감사를 넘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는 해발 1,800미터의 고지대입니다. 산소가 부족하니 심장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므로 심장에 무리가 가고, 나이든 우리로서는 넉 달을 살고나면 심한 두통과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고지대 증상이 나타납니다. 거의 매일 몇 시간씩 전기가 나가고, 자주 수도가 끊깁니다. 밤이면 강도들 때문에 경보보안장치를 켜고 자야만 합니다. 대부분이 시골출신인 학생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평균수명이 38세니 우리가 양육하고 있는 양들 중에도 고아들이 많습니다. 학비가 없어 등록을 못하고, 생활비가 없어 굶는 날이 많은 이들을 실제적으로 도우면서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노년에 영어로 살아야 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산업화가 되지 않아 졸업을 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드니 장래와 인생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의존심의 뿌리가 깊고, 씨족사회에서 형성된 가족중심의 가치관이 철벽과 같은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가르치는 것,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심는 것은 큰 고난입니다. 70대인 제가 19,20살 먹은 아프리카 청년들의 문화와 내면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인내하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과 사랑을 덧입기 위해 저의 본성을 죽이며 주님께 매어 달리는 기도의 투쟁도 고난입니다. 한참 자라고 있는 손녀 손자들이 눈에 밟히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큰 고난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 동안 이런 고난들을 인내로 감당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런 고난들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를 보는 분마다 제가 더 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즐길 수 없는 한 가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난입니다. 재작년에 중부 아프리카 가나에서 열린 현지인 선교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날씨는 무덥고, 음식은 맞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새벽에 안나 선교사가 갑자기 심한 어지럼증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고, 점점 힘이 빠지고 거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곳은 외딴 곳이고, 병원도 의사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지만 이후로는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나이가 많고 혈압과 당뇨가 있고, 심장이 약한 안나 선교사를 생각할 때, 갑자기 혈관이 막힌다든지 터진다든지 하면 짐바브웨에서는 꼼짝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야합니다. 죽으면 천국입성이요 출세라고 가르쳐왔으나, 그 죽음이 나의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한 날 한 시에 함께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고 해도 아직은 떠날 마음이 조금밖에 없는데, 안나 선교사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벧전 4:13절을 올해의 요절로 새롭게 주시면서 저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대한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생에 갇혀 살고 있는 죄를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후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묵상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저의 심령에 영혼의 안식과 참 만족과 넘치는 행복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의 마르지 않는 샘 근원입니다.

결론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영원에 비추면 한 순간과 같고,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세상이 주는 고난, 여러 질병의 고난, 에고의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바라보며, 의도적으로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세상의 고난, 에고의 고난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더욱 우리 주 예수님을 본받아 양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고난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잘 안 지키고 변화가 더딜지라도 이들이 예수님의 참 제자로 성장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고난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비밀을 캐어내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고난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물질과 시간을 바쳐 세계선교를 섬기는 고난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어떤 도전과 유혹과 시련이 와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까지 충성스럽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즐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비범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요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2015.5.31.주일, 이사무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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