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15년 요8강(6:1-21)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임요한(종수)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 15-07-19 16:08

본문

2015년 요한복음 제 8강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본문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기적 중 4번째와 5번째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양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특히 5병2어의 기적은 다른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다 기록될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큽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기록하였습니다. 공관 복음에는 제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빌립과 안드레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양성에 포인트를 두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빌립을 시험하신 예수님(1-7)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즉 제자들의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잠시 쉬고자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쉴 틈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배운 대로 4장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고,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마4:3-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소문이 온 수리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요단강 건너편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날로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요즘같이 매스컴이 발달했다면 매일 뉴스특보형식으로 예수님의 병 고침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집에 가지도 않고 말 한마디로 고치다” “베데스다의 38년된 고질 병자도 말씀으로 고치다”이런 내용이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병자들을 비롯한 소외된 자 들, 영적인 굶주림에 신음하는 자들, 또 그렇게 능력 있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 사방에서 몰려든 것입니다. 자신들의 실제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며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아닌 예수님께로 몰려든다는 것은 그만큼 무리들의 상태가 영육간에 지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비교해 볼 때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겨주시며, 말씀의 권세가 있고, 실제적인 병까지 고쳐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된 목자상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원근각지에서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맞이해 주십니까? 무리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첫째 예수님은 무리들을 적극적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5a) 
예수님은 피곤하시지만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해서 쉬고자 모두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습니다. 몰려오는 무리들이 부담스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리들을 위해 눈을 들어 바라보셨습니다. 이는 눈을 들어 보셨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무리들을 환영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리에 물려가고, 독초를 먹고 죽고, 앞을 잘 보지 못해 헤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고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민심이 흉융하여 각종 범죄가 일어나고 하루 두끼 먹는 사람이 부유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메리스 사태와 같은 병이 늘 무리들을 괴롭혔습니다.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살만한 나라가 되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어떠했습니까?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은 권위의식만 내세우고 섬김만 받고자 했습니다. 기득권자로서 부와 명예만 누리고 살았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진정한 목자의 심정은 사라지고 오히려 백성들을 이용하는 삯군 목자들로 전락하였습니다. 예배는 형식화되고 말씀은 이미 고갈 상태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마치 최근에 있었던 가뭄으로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결국 눈앞에 몰려오는 무리들은 이렇게 영육간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바로보실 때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5b-6a)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줄을 아시고”
예수님은 이미 몰려오는 무리들을 먹이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6a) 그런데 어떻게 먹일까를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을 모아놓고 한방에 말씀으로 떡과 고기를 주실 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먹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을 통해 먹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이 그 시대의 무리들을 섬겨야 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필이면 빌립인가?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해답은 바로 나와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6b)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여기서 시험은 TEST입니다. 즉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이 있는가? 없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없는가? 에 대한 TEST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인격적으로 제자 양성을 하시는 분입니다. 무리들을 잘 아시듯이 예수님은 12제자의 성향 그리고 믿음에 대하서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통해 빌립이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만큼 빌립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빌립이 능력도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빌립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5b에서 빌립에게 질문을 한 핵심은 “어디서”입니다. 즉 원어의 의미는 어디서가 ‘어떻게’로 되어 있습니다. 즉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느냐하는 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자신과 같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을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 빌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 하리이다”
이를 볼 때 빌립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필요한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계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머리가 좋음으로 순식간에 무리의 수를 금방 세서 빵 가격을 계산해 냈습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먹으려면 이란  조건을 충족하려면 필요한 돈이 200데나리온 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빌립의 계산은 아주 정확했습니다. 아마도 제자중 IQ가 제일 높았을 것입니다. 분석력과 계산력은 뛰어났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빌립은 내 놓지 못했습니다. ‘
 그러면 빌립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빌립은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라고 말씀하셨는데 빌립은 ‘사서’에 초점을 맞추어 돈 계산을 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은 요즘으로 계산하면 2,000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루 10만원으로 계산하면). 2,000만원이 없기 때문에 빌립은 결국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답을 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세상의 논리로 보면 빌립의 계산은 맞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답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내지 못했을까요?
빌립의 문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어떻게 해서든지 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머리로만 주님을 따르는 영적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빌립을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아직 제자양성의 초기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빌립과 같이 무엇을 하고자 할 때 주님을 의지하기보다 먼저 계산해 보고 타당하면 실행에 옮기는 자신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UBF가 과거에는 제자 양성 역사가 활발히 이루어 졌습니다. 그것은 계산하지 않고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덧입고 말씀을 전파하고 기도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로 나아갈 때도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믿음으로 선교사로 갔습니다. 한마디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언제 부터인지 우리도 계산해 보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없기 때문에’라는 조건 때문에 적극적으로 제자양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 양성의 어려움을 많이 분석해 놓았습니다. 
 시대가 변했다. 양들이 과거와 다르다. 학생 리더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 목자님들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물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인 역사, 양들을 섬기는 일은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심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 캠퍼스 지성인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찌하든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지성인들을 먹이고자하는 마음을 영접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양들은 외모로는 전혀 불쌍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이 벌떼 같이 홍대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보면 저도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정죄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들은 먹을 것 마음껏 먹고, 즐길 것 마음껏 즐기고,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는 아주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마음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런 양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정말 이런 양들은 행복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헐 벗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면은 각종 죄악을 인해 고통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문제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고독합니다. 열등감, 정죄의식, 패배감, 정욕죄, 허무주의, 두려움 등의 죄악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쾌락에 몸을 맡기고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 먹고, 쓰는 것으로 달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방황하는 양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조용히 있던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7절과 8절 사이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안드레가 5병2어를 찾아다니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찌감치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에 동참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예수님과 마음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찾아다니며 무엇이 있는가? 찾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5병2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믿음으로 설득하여 예수님께 5병2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5병2어가 얼마 보탬에 되지 않는다고 본인도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무조건 주님께 들고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드레가 5병2어를 가지고 왔을 때 빌립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은 또 어떠했을까요? 한결같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안드레의 그런 행동을 보고 ‘아이구 웃기고 있네’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바보와도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빌립이 계산을 해서 먹일 수 없는 것과 안드레가 5병2어를 가지고 온 상태에서는 둘 다 인간적인 계산해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5병2어 가지고는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5병2어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는 사실만큼은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안드레는 믿음으로 5병2어를 예수님께 갖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안드레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꼬투리를 만드는 근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지고 온 5병2어를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첫째로 안드레가 가지고 온 5병2어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5병2어를 찾아서 가지고 나아갈 때 기뻐 받으시는 분입니다. 5병2어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을 상징합니다. 심지어는 본문처럼 안드레의 것이 아니지만 남의 것이라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면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이를 통해, 안드레를 통해 5병2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각 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 양들을 위한 기도, 심방,1:1, 물질 등 다양합니다. 즉 찾아낸다면 누구에게나 있는것 그것이 오병이어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5병2어가 별 볼일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믿음으로 드릴 때 주님은 그 5병2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5병2어로 5천명을 원대로 먹이셨습니다.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축사하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을 정돈시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워보니 남자만 5,000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도 5병2어의 기적의 기쁨을 몸소 체험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습니다. 무엇을 줄려고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축사하시자 놀랍게도 계속하여 5병2어로 5,000명을 원대로 먹이고도 남을 정도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대로 주셨다는 것은 요구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무리들은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금 먹으면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어야 먹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무리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먹고 싶은 대로 다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나 될 정도로 풍성한 야외식 뷔페잔치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푸른 잔디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떡과 생선을 먹으면서 빌립, 안드레, 그리고 남은 제자들, 무리들 입장에서, 그리고 5병2어를 가지고 온 아이의 입장에서 원대로 먹으면서 나름대로 감동이 다 달랐을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너무 감격하여 잠시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감동은 각각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원대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육간에 굶주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를 풍성히 원대로 먹이시고자 하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진정한 생명의 떡이 되시는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우리들은 기적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어떤 부인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난생 처음 원대로 배터지도록 먹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배가 부르고 힘이 솟았습니다.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두 손을 지켜들며‘ 감격하며 ‘예수’ ‘예수’ ‘예수’를 외쳤습니다. 기적의 역사를 보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도 시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보고 예수님은 당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빵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신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통해 빵문제를 초월하여 자신이 영적인 생명의 떡이 되심을 믿기 위한 근거를 예수님은 보여주신 것 뿐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기적의 역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비록 적지만 5병2어를 안드레와 같이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것을 꼬투리로 주님은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빌립과 같이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제자 양성 역사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턴목자가 없어서, 말씀에 대한 절대성이 부족해서, 순종훈련이 없기 때문에, 전체 모임에 참석하는 동역자들의 수가 너무 적어서, 재학생 목자가 없어서, 목자님들의 나이가 많아서, 영성이 많이 떨어져서 등 여러 가지를 분석해 본 결과입니다. 또 제 자신 역시 시니어로서 나이가 많아 일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 있기 때문에 제 자신부터 캠퍼스 양을 섬기지 못하고, 과거와 달리 센터 역사에 대한 주인의식이 많이 사라져 캠퍼스 양들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되는 이유보다 안 되는 이유가 더 많기 때문에 빌립과 같이 캠퍼스 양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역자는 날마다 가정과 센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5병2어를 드림으로 역사에 지금까지 귀하게 쓰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센터에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안드레와 같이 5병2어를 드리는 목자님, 사모님, 리더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이 메시지를 감당하면서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갖게 하시고 캠퍼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도우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계속해서 기도의 오병이어를 주님게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름수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여름수양회는 생명을 살리는 좋은 기회입니다. 영육간에 굶주린 양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리더인 우리도 새롭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배불리 먹음으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말씀의 종들은 열심히 말씀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분반리더 목자님들은 말씀인도자로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찬양팀, 댄싱팀, 특송, 기도의 종, 사회, 그리고 그 외에 섬기는 종들이 많습니다. 이귀한 섬기는 종들이 맡은 바 충성을 다해 섬기는 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오병이어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중보기를 감당하는 것 역시 오병이어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드레와 같이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때 이번 수양회는 그 어느 수양회보다도 생명력이 있고 은혜가 넘치며 풍성한 말씀의 양식을 공급받아 새롭게 되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16-21)
 5병2어의 사건은  많은 무리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무리를 먹이신 사건인데 비해 홀로 남은 제자들이 배를 저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산으로 가셔서 오시지 않아서 제자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배를 타고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즉 광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낮과 같으면 그래도 두려움이 덜 할텐데 점점 어두워져서 앞도 잘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광풍이 일자 제자들은 어찌할 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고 계셨습니다. 19절 하반절을 보면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배워가는 상태에 있습니다. 앞의 기적의 사건들을 체험했지만 꿈에도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유령인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 제자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두려움을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예수님은 자연계를 지배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21절 하반절은 말씀합니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이 함께하시자 광풍이 사라지고 제자들이 가고자 하는 가버나움에 무사히 안착을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광풍이 밀어닥칠 수 있다는 것과 이 광풍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가는 길이 평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과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점점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병이어의 사건과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예수님의 일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5병2어를 드릴 때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드린 오병이어를 축사하셔서 홍대를 넘어 전세계 캠퍼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떡되신 주님께서 저희를 원없이 먹이심을 인해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3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798 요한복음 이엘리야 115 09-27
797 요한복음 이엘리야 99 09-20
796 요한복음 이엘리야 95 09-13
795 요한복음 이엘리야 124 09-06
794 요한복음 이엘리야 96 08-30
793 요한복음 이엘리야 87 08-23
792 요한복음 이엘리야 90 08-16
791 요한복음 이엘리야 97 08-09
790 요한복음 이엘리야 105 08-02
열람중 요한복음 임요한(종수) 77 07-19
788 요한복음 이엘리야 97 07-12
787 요한복음 이엘리야 91 07-05
786 요한복음 이엘리야 103 06-28
785 요한복음 이엘리야 94 06-21
784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17 06-1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