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7강(5:1-29)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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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7 강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과 그 일로 인하여 공격을 받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는 것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는 살아납니다. 38년 동안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임한 기적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만 있는 현관식 행랑으로서, 비를 피하는 용도였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절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아픈 사람들은 더욱 우울합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적으로 물이 솟구쳤습니다. 먼저 솟구치는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는 모든 병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낫는 것으로 인해 병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경쟁으로 인해 병든 사회의 축소판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해야 하는 정글과 같습니다. 경쟁은 발전을 위해서는 유익하기도 합니다. 경쟁이 없이 더 나은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은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시험 통과나 승진이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또 다른 병을 낳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기에 목을 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 오심으로 상황은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장 오래된 38년 된 병자가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누운 모습에 병으로 고생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자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연못에 뛰어들기 위해 시도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 병을 평생 지고 가야 할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 된 줄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자포자기한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에게 나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배가 고프냐고 묻는 것은 배부르게 해 주고 싶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에게 베데스다 물이 움직일 때에 뛰어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이 물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대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병자로서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물 곁에 바로 있다가 소리가 나면 들어가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그보다 한 발 앞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 만 먹고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모두가 허탕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에 푸쉬맨이 있듯이 누가 자기를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자기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3년 중풍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홀로 서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베데스다 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지도 않으시고 어떤 약을 쓰지도 않고 침을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말씀의 움직임이 그 사람의 속에 일어나도록 하심으로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어 있던 그 몸의 세포들이, 신경들이, 조직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둘째,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38년 동안 누워 있다가 나음을 받은 사람을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안식일 법으로 그를 정죄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낫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이미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지 않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않고 곁가지를 붙잡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서 안식을 빼앗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율법시행세칙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 39가지가 있는데 마지막 규정이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 때 반율법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더 심한 것은 병이 심화되든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선한 일에 힘쓰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으니 이제부터 힘차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가라는 주제로 논쟁하였습니다. 살펴보니 안식일에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사에 관한한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생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으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하여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안식일 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안식인지,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을 하면서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살리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원하심과 행하심을 아시고, 자발적으로 일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의 38년 된 사람의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치료하십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은 부활이요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원하셔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원하기 이전에, 내가 믿기 이전에 주님이 작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사탄의 다스림을 받던 사람이 예순님을 믿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사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새 창조입니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 38년 된 병자,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곧 이때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습니다(엡2:5). 지금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살아납니다.
38년 병자가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으면 됩니다.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려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롬10:13-15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구세군을 창설한 영국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런던과 영국에 깨어진 유리조각 위를 맨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라도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UBF 세계 대표이셨던 전요한 목자님이 군의관이셨을 때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신림동에 선교후보용 집을 하나 사서 전요한 목자님 가정을 그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전선지 사모님은 전요한 목자님이 군에서 주로 계시고 혼자 계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신림동은 아주 시골이었고 그 집 바로 옆에는 무덤이 몇 개 있었습니다. 선지 사모님은 죽음 권세에 시달렸습니다. 아무도 없이 어린 딸과 함께 잠을 잘 때면 두려움에 잠이 안 왔습니다. 사모님의 친 오빠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1:24,25 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영접하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 죽음 권세가 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후 다시는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이 살아나고 능력이 생깁니다.
저는 계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 10:45절 말씀에 기초해서 섬기는 종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을 영접하고 세계 선교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방향을 주고 힘을 줍니다. 센터 건축을 할 때는 마14:28,29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센터 건축 역사를 시작하고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받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어 모든 죽은 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일생 선한 일을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은혜와 감격이 선한 일에 힘쓰도록 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지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자세를 갖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걷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힘써 감당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씀 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과 그 일로 인하여 공격을 받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는 것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는 살아납니다. 38년 동안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임한 기적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만 있는 현관식 행랑으로서, 비를 피하는 용도였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절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아픈 사람들은 더욱 우울합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적으로 물이 솟구쳤습니다. 먼저 솟구치는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는 모든 병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낫는 것으로 인해 병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경쟁으로 인해 병든 사회의 축소판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해야 하는 정글과 같습니다. 경쟁은 발전을 위해서는 유익하기도 합니다. 경쟁이 없이 더 나은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은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시험 통과나 승진이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또 다른 병을 낳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기에 목을 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 오심으로 상황은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장 오래된 38년 된 병자가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누운 모습에 병으로 고생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자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연못에 뛰어들기 위해 시도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 병을 평생 지고 가야 할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 된 줄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자포자기한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에게 나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배가 고프냐고 묻는 것은 배부르게 해 주고 싶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에게 베데스다 물이 움직일 때에 뛰어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이 물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대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병자로서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물 곁에 바로 있다가 소리가 나면 들어가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그보다 한 발 앞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 만 먹고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모두가 허탕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에 푸쉬맨이 있듯이 누가 자기를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자기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3년 중풍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홀로 서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베데스다 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지도 않으시고 어떤 약을 쓰지도 않고 침을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말씀의 움직임이 그 사람의 속에 일어나도록 하심으로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어 있던 그 몸의 세포들이, 신경들이, 조직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둘째,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38년 동안 누워 있다가 나음을 받은 사람을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안식일 법으로 그를 정죄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낫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이미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지 않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않고 곁가지를 붙잡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서 안식을 빼앗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율법시행세칙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 39가지가 있는데 마지막 규정이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 때 반율법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더 심한 것은 병이 심화되든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선한 일에 힘쓰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으니 이제부터 힘차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가라는 주제로 논쟁하였습니다. 살펴보니 안식일에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사에 관한한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생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으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하여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안식일 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안식인지,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을 하면서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살리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원하심과 행하심을 아시고, 자발적으로 일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의 38년 된 사람의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치료하십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은 부활이요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원하셔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원하기 이전에, 내가 믿기 이전에 주님이 작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사탄의 다스림을 받던 사람이 예순님을 믿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사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새 창조입니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 38년 된 병자,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곧 이때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습니다(엡2:5). 지금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살아납니다.
38년 병자가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으면 됩니다. 들으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려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롬10:13-15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구세군을 창설한 영국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런던과 영국에 깨어진 유리조각 위를 맨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라도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UBF 세계 대표이셨던 전요한 목자님이 군의관이셨을 때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신림동에 선교후보용 집을 하나 사서 전요한 목자님 가정을 그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전선지 사모님은 전요한 목자님이 군에서 주로 계시고 혼자 계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신림동은 아주 시골이었고 그 집 바로 옆에는 무덤이 몇 개 있었습니다. 선지 사모님은 죽음 권세에 시달렸습니다. 아무도 없이 어린 딸과 함께 잠을 잘 때면 두려움에 잠이 안 왔습니다. 사모님의 친 오빠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1:24,25 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영접하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 죽음 권세가 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후 다시는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이 살아나고 능력이 생깁니다.
저는 계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 10:45절 말씀에 기초해서 섬기는 종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을 영접하고 세계 선교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방향을 주고 힘을 줍니다. 센터 건축을 할 때는 마14:28,29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센터 건축 역사를 시작하고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받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어 모든 죽은 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일생 선한 일을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은혜와 감격이 선한 일에 힘쓰도록 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지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자세를 갖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걷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힘써 감당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씀 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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