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6강(4:31-54) 말씀을 믿고 가더니
페이지 정보

본문
2015년 요한복음 제 6 강
말씀 | 요한복음 4:31-54
요절 | 요한복음 4:50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섬긴 후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섬기신 후에 큰 비프스테이크를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르셨습니다.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땅을 보시면서 놀라운 영적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변화를 보고 엄청나게 할 일이 많음을 보셨습니다. 또한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양식.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여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어렵사리 구한 양식을 예수님 앞에 내 놓으며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숨겨놓으신 양식이 있는지 아니면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한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을 끝까지 도와 메시아를 만남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도록 도왔습니다. 죄많은 사마리아 여인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양식 삼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힘과 만족을 얻고 있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벌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힘을 얻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이요 허무해지는 썩을 양식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목숨 걸고 도와서 그가 살아났을 때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나의 삶의 에너지, 의미를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한 영혼을 돕고 섬기고 사랑하는 데서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는 이런 일을 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온전히 이룰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그 일을 이루고자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어제는 어린이부 여름 수양회가 있었는데 섬기시는 분들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잔치 집과 같이 즐겁고 시끄러웠습니다. 놀라서 경찰이 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웃고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일에 힘을 합해서 준비함으로 양식을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수양회를 통해서 새 양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환경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여름 수양회 준비와 초청 역사와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바쳐 이 일에 헌신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참된 만족과 기쁨과 새 힘을 얻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추수할 때가 넉 달은 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통해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며 추수하게 된 곡식으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는 소망 없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곧 추수하게 될 소망의 땅으로 보십니다. 한 영혼을 통해 그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밭인 캠퍼스는 황량하고 척박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도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고 바이블 까페에 참석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소수여도 이들을 통해서 큰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기에 시간이 부족한 자신, 힘든 현실만 보지 말고 영적인 눈을 떠야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들 자기 먹고 살 생각만 할 때 눈을 들어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놀라운 세계 선교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우리도 취직하기 힘들고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이런 현실에만 너무 매이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자들도 지금 배고프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음식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구원과 사마리아 복음화의 비전을 보셨습니다.
항상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때가 아니기 보다 일하기 싫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 튕기는 모습만 보면 분명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보셨습니다. 그녀와 깊이 대화를 하면서 마음 속을 들여다보니 영적 소원이 많고 예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수할 적기의 양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캠퍼스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 사마리아가 사각지대였는데 사실은 블루오션이었습니다. 사막에 석유가 있듯이. 깊이 들어가 보면 보물이 있습니다. 지금도 캠퍼스 한 구석에서 자신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도움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뿌리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은 은혜 때문에 말씀을 뿌리고 열매를 모읍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합니다. 거두는 자는 거두는 기쁨을 누리고 뿌리는 자는 거둘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는 때로 울면서 뿌려야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물론 뿌리는 자가 거두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뿌리는 자는 뿌리는 일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릴 때 내가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내가 뿌리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거두게 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뿌려서 제자들이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은 노력하지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습니다. 주님은 추수가 급하시기 때문에 추수꾼들에게 미리 삯을 주셨습니다. 내가 잘 해서 거둔다고 우쭐대지 말고 뿌린 사람의 수고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뿌린 씨를 한국 교회는 엄청나게 거두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증거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사람들도 이 여인을 손가락질하며 소외시켰습니다. 이런 그녀가 갑자기 동네에 들어와 기쁜 소리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마다 놀랐습니다. 심지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쁨과 확신에 넘치는 증언을 듣고 무언가 있다고 느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친히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하지만 우리가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도록 도우면 알아서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하여 믿음이 자랍니다. 목자가 양들의 믿음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립적인 성경 선생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할 때 각자의 믿음은 놀랍게 자라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을 때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말씀 공부와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과 일대일 성경 공부와 같은 경건 훈련을 꾸준히 감당할 때 위기의 때를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미국 동부 시각으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샬롯으로 가기 위해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을 떠난 US 에어웨이 소속 1549편 여객기는 이륙한 지 3분 만에 새 떼에 부딪히는 버드스트라이크를 당해 엔진 고장으로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자칫하면 9·11 사태에 버금가는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관제소에서는 뉴저지에 위치한 소공항으로 여객기를 유도했지만 US 1549편,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55명의 승객과 세계에게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뉴욕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많은 사람의 생명이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 한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었습니다. 체슬리 기장은 관제탑의 요구에 불가능하다는 답변과 함께 허드슨 강 위에 착륙할 것을 알립니다. 양 날개가 1°만 기울어도, 속도가 조금만 높아도, 머리지점부터 닿기만 해도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고도로 숙련된 비행기술로 침착하게 꼬리지점부터 허드슨 강 위를 미끄러지듯 착륙합니다.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가 긴급 투입되어 전원 구조라는 기적을 낳았는데 이 모든 일이 불과 20여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날의 기적을 구조된 승객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 하나! 바로 체슬리 기장의 탁월한 판단력과 고도의 기술력 덕분이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공군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19,000시간의 비행경력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비행 기본기 훈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저축을 하듯이 훈련에 임했으며 사고가 있었던 그 날, 그동안 저축했던 목돈을 찾아서 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고할 수 없는 위험을 예비하는 것은 오직 성실한 훈련뿐이며, 일상에서는 그 훈련의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 때 그 진가는 반드시 빛을 발한다는 교훈을 남긴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하는 그리스도인! 훈련이 빚은 경건의 능력은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의 순간, 그 진가가 드러날 것임을 믿고 매순간 경건의 훈련을 충실히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씀을 믿고 간 왕의 신하. 이틀이 지나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시면서 사람들의 무시와 배척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이르자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기 때문에 궁전에서 꽤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도 있고 돈도 있고 유명한 의사들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 보았고 이제 한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이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청하였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b).”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표적 신앙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를 통해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표적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만을 계속해서 구했습니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무언가가 펼쳐지는 것을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보지 않고 믿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앞에 나온 사마리아인들은 표적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신하는 조급증이 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 신하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가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을 오다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아이가 살아 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신하는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입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이 드러났습니다.
두 번째 표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그에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갈 때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왕의 신하가 체험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 부활의 주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말씀의 권능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믿음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해도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병 낫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믿음도 점점 흐릿해져 과거와 똑같아 졌다고 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우연이나 다른 원인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진리입니다. 풀은 시들고 꽃도 떨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기초로 믿는 신앙이 가장 견고하고 안전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믿음의 기초를 두지 말고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예수님의 찢긴 옆구리와 목 박힌 손 구멍에 자기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요20:29). 우리도 왕의 신하처럼 말씀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4:31-54
요절 | 요한복음 4:50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섬긴 후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섬기신 후에 큰 비프스테이크를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르셨습니다.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땅을 보시면서 놀라운 영적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변화를 보고 엄청나게 할 일이 많음을 보셨습니다. 또한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양식.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여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어렵사리 구한 양식을 예수님 앞에 내 놓으며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숨겨놓으신 양식이 있는지 아니면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한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을 끝까지 도와 메시아를 만남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도록 도왔습니다. 죄많은 사마리아 여인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양식 삼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힘과 만족을 얻고 있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벌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힘을 얻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이요 허무해지는 썩을 양식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목숨 걸고 도와서 그가 살아났을 때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나의 삶의 에너지, 의미를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한 영혼을 돕고 섬기고 사랑하는 데서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는 이런 일을 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온전히 이룰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그 일을 이루고자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어제는 어린이부 여름 수양회가 있었는데 섬기시는 분들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잔치 집과 같이 즐겁고 시끄러웠습니다. 놀라서 경찰이 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웃고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일에 힘을 합해서 준비함으로 양식을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수양회를 통해서 새 양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환경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여름 수양회 준비와 초청 역사와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바쳐 이 일에 헌신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참된 만족과 기쁨과 새 힘을 얻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추수할 때가 넉 달은 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통해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며 추수하게 된 곡식으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는 소망 없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곧 추수하게 될 소망의 땅으로 보십니다. 한 영혼을 통해 그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밭인 캠퍼스는 황량하고 척박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도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고 바이블 까페에 참석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소수여도 이들을 통해서 큰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기에 시간이 부족한 자신, 힘든 현실만 보지 말고 영적인 눈을 떠야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들 자기 먹고 살 생각만 할 때 눈을 들어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놀라운 세계 선교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우리도 취직하기 힘들고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이런 현실에만 너무 매이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자들도 지금 배고프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음식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구원과 사마리아 복음화의 비전을 보셨습니다.
항상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때가 아니기 보다 일하기 싫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 튕기는 모습만 보면 분명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보셨습니다. 그녀와 깊이 대화를 하면서 마음 속을 들여다보니 영적 소원이 많고 예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수할 적기의 양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캠퍼스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 사마리아가 사각지대였는데 사실은 블루오션이었습니다. 사막에 석유가 있듯이. 깊이 들어가 보면 보물이 있습니다. 지금도 캠퍼스 한 구석에서 자신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도움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뿌리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은 은혜 때문에 말씀을 뿌리고 열매를 모읍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합니다. 거두는 자는 거두는 기쁨을 누리고 뿌리는 자는 거둘 소망 가운데 기뻐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는 때로 울면서 뿌려야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물론 뿌리는 자가 거두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뿌리는 자는 뿌리는 일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릴 때 내가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내가 뿌리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거두게 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뿌려서 제자들이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은 노력하지 아니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습니다. 주님은 추수가 급하시기 때문에 추수꾼들에게 미리 삯을 주셨습니다. 내가 잘 해서 거둔다고 우쭐대지 말고 뿌린 사람의 수고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뿌린 씨를 한국 교회는 엄청나게 거두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증거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사람들도 이 여인을 손가락질하며 소외시켰습니다. 이런 그녀가 갑자기 동네에 들어와 기쁜 소리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마다 놀랐습니다. 심지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쁨과 확신에 넘치는 증언을 듣고 무언가 있다고 느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친히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하지만 우리가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도록 도우면 알아서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하여 믿음이 자랍니다. 목자가 양들의 믿음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립적인 성경 선생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할 때 각자의 믿음은 놀랍게 자라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을 때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말씀 공부와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과 일대일 성경 공부와 같은 경건 훈련을 꾸준히 감당할 때 위기의 때를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미국 동부 시각으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샬롯으로 가기 위해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을 떠난 US 에어웨이 소속 1549편 여객기는 이륙한 지 3분 만에 새 떼에 부딪히는 버드스트라이크를 당해 엔진 고장으로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자칫하면 9·11 사태에 버금가는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관제소에서는 뉴저지에 위치한 소공항으로 여객기를 유도했지만 US 1549편,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55명의 승객과 세계에게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뉴욕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많은 사람의 생명이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 한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었습니다. 체슬리 기장은 관제탑의 요구에 불가능하다는 답변과 함께 허드슨 강 위에 착륙할 것을 알립니다. 양 날개가 1°만 기울어도, 속도가 조금만 높아도, 머리지점부터 닿기만 해도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고도로 숙련된 비행기술로 침착하게 꼬리지점부터 허드슨 강 위를 미끄러지듯 착륙합니다.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가 긴급 투입되어 전원 구조라는 기적을 낳았는데 이 모든 일이 불과 20여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날의 기적을 구조된 승객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 하나! 바로 체슬리 기장의 탁월한 판단력과 고도의 기술력 덕분이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공군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19,000시간의 비행경력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비행 기본기 훈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저축을 하듯이 훈련에 임했으며 사고가 있었던 그 날, 그동안 저축했던 목돈을 찾아서 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고할 수 없는 위험을 예비하는 것은 오직 성실한 훈련뿐이며, 일상에서는 그 훈련의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 때 그 진가는 반드시 빛을 발한다는 교훈을 남긴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하는 그리스도인! 훈련이 빚은 경건의 능력은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의 순간, 그 진가가 드러날 것임을 믿고 매순간 경건의 훈련을 충실히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씀을 믿고 간 왕의 신하. 이틀이 지나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시면서 사람들의 무시와 배척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이르자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기 때문에 궁전에서 꽤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도 있고 돈도 있고 유명한 의사들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 보았고 이제 한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이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청하였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b).”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표적 신앙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를 통해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표적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만을 계속해서 구했습니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무언가가 펼쳐지는 것을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보지 않고 믿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앞에 나온 사마리아인들은 표적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신하는 조급증이 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 신하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그가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을 오다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아이가 살아 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신하는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입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이 드러났습니다.
두 번째 표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그에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갈 때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왕의 신하가 체험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 부활의 주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말씀의 권능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믿음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해도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병 낫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믿음도 점점 흐릿해져 과거와 똑같아 졌다고 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우연이나 다른 원인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진리입니다. 풀은 시들고 꽃도 떨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기초로 믿는 신앙이 가장 견고하고 안전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믿음의 기초를 두지 말고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예수님의 찢긴 옆구리와 목 박힌 손 구멍에 자기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요20:29). 우리도 왕의 신하처럼 말씀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15Jn06.hwp (45.5K)
1회 다운로드 | DATE : 2015-07-05 14:2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