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5강(4:1-30)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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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요한복음 제 5 강
말씀 | 요한복음 4:1-30
요절 | 요한복음 4: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외로운 한 여인이 구주 예수님을 만나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만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랑에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형태의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런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생수를 예수님을 통해서 마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아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을 피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자 하십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요단강 동쪽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길, 둘째는 왕의 대로라는 해변 길로 가는 길, 셋째는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길입니다. 사마리아를 관통하면 3일 정도가 걸렸는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일주일씩 걸리는 요단강 건너 편 길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판문점을 거쳐서 북한으로 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인들이 상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않으셨습니다. 때가 정오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하고 목이 말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정오는 태양이 하얗게 빛을 내는 때입니다. 가장 뜨거운 때입니다. 중동에서 이 시간은 씨에스터라고 해서 낮잠을 자고 쉬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집이나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면 시원한 아침 일찍이나 저녁에 긷습니다.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정보를 나눕니다. 우물을 중심으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물을 길어 오고 가는 길이 여인들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정오에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터벅터벅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이때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몸에서는 외로움이라는 아우라가 느껴졌습니다. 하얗게 빛을 내는 정오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습니다. 자매님들은 대개 수다를 떠는 가운데 스트레스를 풉니다. 형제들에 비해서 두 배의 언어를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남편이 있지만 피곤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돌아오면 씻고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속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하는 것보다 친밀한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느낍니다. 미국 선교사님들은 이런 농담을 합니다.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미국은 심심한 천국. 한국 이 그 만큼 사회적인 만남과 교제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붙이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시고 겸손하게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시원한 생수를 떠서 버들잎이라도 훌터서 바가지에 띄워주는 것이 인정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정말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상종한다는 말은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두레박을 같이 써야 하는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식사도 함께 하지 아니하고 무시하며 멀리 했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요구가 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인이 반응을 보일 때 상처를 받고 그만두기 쉽습니다. 저도 자주 보는 어머니 같은 한 할머니에게 반가워서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차갑게 “왜 그런 것을 물어요”하는 말을 듣고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는 그 분의 얼굴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늙으신 할머니에게 나이를 물은 제가 센스가 없었습니다. 첫 마디에 거절을 당할 때 인사를 나누기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듣고 상처를 받기보다 관심을 자신과 하나님의 선물로 돌리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성학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잡고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여인은 세상의 남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받기에도 지쳐버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세상 남자들에게 질려버린 여인에게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물이 좋다고 하지만 한계를 느낀 여인에게 생수를 소개합니다. 허바울 목자님은 박사학위 심사를 통과하고 30분 동안 기쁘고 다음에는 허무해졌다고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또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적인 것들로는 참된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우물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반문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인도 질세라 물 길을 그릇도 없는 분이 어디서 생수를 얻느냐고 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하면서 경쟁심을 자극합니다. 단수가 높은 여인입니다. 여인은 야곱과 같이 지순한 사랑을 원했습니다. 자기만을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들을 만나 결혼까지 해보았지만 상처와 실망만 했습니다. 율법적인 사회에서 다섯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인은 당시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열정을 아무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고 지성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물에 말라버린 논바닥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샘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샘물이 되어 계속 솟아 나와서 갈급함을 채워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한편 야곱의 우물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오늘날 야곱의 우물물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인정, 사랑, 지위, 돈, 성취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마다 목마른 부분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족하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수백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돈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면 공허와 목마름이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안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영혼에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고 말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내 속에 있는 터진 웅덩이들은 채워지지 않고 목마르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요한복음 7:37-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내 안에 계속해서 솟아나는 영적인 기쁨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람의 샘이 솟아납니다. 희락과 화평의 샘이 솟아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샘이 솟아나는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떼어 놓고 성령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즉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말씀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가 씻겨집니다. 성령의 생수를 추구할수록 거룩하고 정결해집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참 만족과 기쁨과 평강이 샘물처럼 솟아나 강 같이 흐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마름을 십자가에서 담당해 주셨습니다. 내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은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 그 사랑을 마실 때 우리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추구한 결과 많은 남자친구와 부끄러운 과거만 남았습니다. 상처만 남았습니다. 죄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완전히 죄의 탁류가 넘실거립니다. 그것을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에 중독이 되어 있고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리고 영혼들을 살리는 비결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영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마른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듣자 여자의 태도가 확 달라졌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무슨 명령을 하십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당시에 남편의 허락 없이 선물을 받아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다고 합니다. 선물을 줄 터이니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문제를 드러내셨습니다.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불러올 남편이 없으니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인에게 남편은 야곱의 우물 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남편은 여인에게 있는 사랑의 목마름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인에게 안정을 주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편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이 말랐습니다. 여자가 남편에게서 참 만족을 구하는 한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여인의 대표인 하와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b).” 원하고 사모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사람처럼 여인은 남편을 쫓아다녔지만 지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남편과 아내가 있고 자식과 부모가 있고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나 홀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나 홀로 서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 누가 내 대신 서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인자는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품어주고 감당해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요 남편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그녀의 과거의 상처를 진리의 빛 앞에 드러내시며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에 있는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나의 죄, 나의 고통, 나의 상처, 나의 방황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와 주님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함이요 죄가 샘물의 근원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의 생수가 터집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밝아집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근본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에게 진정한 남편이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남편은 사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대상을 만나 헌신할 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인은 마음 깊은 곳에 있던 근본 문제를 발견하고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은 성령으로, 진리는 진실하게 또는 내가 가진 삶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라는 뜻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제는 예수님으로 대체가 된 것입니다. 즉 예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요14:6).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예배,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을 여셨습니다(히10:20).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믿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힘을 얻고 참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생명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함으로 우리 안에 생명의 샘이 솟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아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풀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밝히십니다. 1장의 제자들처럼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고 그를 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자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얻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남편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했습니다. 여자에게 남편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해결 받을 수 없던 문제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녀의 내면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메세아를 만난 기쁨,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충만함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영혼의 목마름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녀가 만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신 분이십니다. 그녀의 외로움과 목마름과 방황과 진정한 소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그녀의 갈한 영혼에 영생의 샘물을 솟아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생의 허무와 정욕, 무의미 속에서 방황할 때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목마름, 허무, 무의미가 주님을 만남으로 사라지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천국의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죄와 목마름과 방황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구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십니다. 만족주지 못할 세상 것을 찾아 방황하지 말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4:1-30
요절 | 요한복음 4: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외로운 한 여인이 구주 예수님을 만나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만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랑에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형태의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런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생수를 예수님을 통해서 마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아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을 피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자 하십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요단강 동쪽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길, 둘째는 왕의 대로라는 해변 길로 가는 길, 셋째는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길입니다. 사마리아를 관통하면 3일 정도가 걸렸는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일주일씩 걸리는 요단강 건너 편 길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판문점을 거쳐서 북한으로 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인들이 상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않으셨습니다. 때가 정오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하고 목이 말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정오는 태양이 하얗게 빛을 내는 때입니다. 가장 뜨거운 때입니다. 중동에서 이 시간은 씨에스터라고 해서 낮잠을 자고 쉬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집이나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면 시원한 아침 일찍이나 저녁에 긷습니다.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정보를 나눕니다. 우물을 중심으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물을 길어 오고 가는 길이 여인들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정오에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터벅터벅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이때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몸에서는 외로움이라는 아우라가 느껴졌습니다. 하얗게 빛을 내는 정오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습니다. 자매님들은 대개 수다를 떠는 가운데 스트레스를 풉니다. 형제들에 비해서 두 배의 언어를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남편이 있지만 피곤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돌아오면 씻고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속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하는 것보다 친밀한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느낍니다. 미국 선교사님들은 이런 농담을 합니다.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미국은 심심한 천국. 한국 이 그 만큼 사회적인 만남과 교제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붙이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시고 겸손하게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시원한 생수를 떠서 버들잎이라도 훌터서 바가지에 띄워주는 것이 인정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정말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상종한다는 말은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두레박을 같이 써야 하는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식사도 함께 하지 아니하고 무시하며 멀리 했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요구가 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인이 반응을 보일 때 상처를 받고 그만두기 쉽습니다. 저도 자주 보는 어머니 같은 한 할머니에게 반가워서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차갑게 “왜 그런 것을 물어요”하는 말을 듣고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는 그 분의 얼굴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늙으신 할머니에게 나이를 물은 제가 센스가 없었습니다. 첫 마디에 거절을 당할 때 인사를 나누기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듣고 상처를 받기보다 관심을 자신과 하나님의 선물로 돌리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성학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잡고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여인은 세상의 남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받기에도 지쳐버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세상 남자들에게 질려버린 여인에게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물이 좋다고 하지만 한계를 느낀 여인에게 생수를 소개합니다. 허바울 목자님은 박사학위 심사를 통과하고 30분 동안 기쁘고 다음에는 허무해졌다고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또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적인 것들로는 참된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우물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반문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인도 질세라 물 길을 그릇도 없는 분이 어디서 생수를 얻느냐고 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하면서 경쟁심을 자극합니다. 단수가 높은 여인입니다. 여인은 야곱과 같이 지순한 사랑을 원했습니다. 자기만을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들을 만나 결혼까지 해보았지만 상처와 실망만 했습니다. 율법적인 사회에서 다섯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인은 당시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열정을 아무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고 지성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물에 말라버린 논바닥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샘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샘물이 되어 계속 솟아 나와서 갈급함을 채워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한편 야곱의 우물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오늘날 야곱의 우물물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인정, 사랑, 지위, 돈, 성취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마다 목마른 부분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족하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수백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돈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면 공허와 목마름이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안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영혼에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고 말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내 속에 있는 터진 웅덩이들은 채워지지 않고 목마르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요한복음 7:37-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내 안에 계속해서 솟아나는 영적인 기쁨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람의 샘이 솟아납니다. 희락과 화평의 샘이 솟아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샘이 솟아나는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떼어 놓고 성령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즉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말씀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가 씻겨집니다. 성령의 생수를 추구할수록 거룩하고 정결해집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참 만족과 기쁨과 평강이 샘물처럼 솟아나 강 같이 흐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마름을 십자가에서 담당해 주셨습니다. 내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은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 그 사랑을 마실 때 우리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추구한 결과 많은 남자친구와 부끄러운 과거만 남았습니다. 상처만 남았습니다. 죄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완전히 죄의 탁류가 넘실거립니다. 그것을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에 중독이 되어 있고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리고 영혼들을 살리는 비결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영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마른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듣자 여자의 태도가 확 달라졌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무슨 명령을 하십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당시에 남편의 허락 없이 선물을 받아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다고 합니다. 선물을 줄 터이니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문제를 드러내셨습니다.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불러올 남편이 없으니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인에게 남편은 야곱의 우물 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남편은 여인에게 있는 사랑의 목마름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인에게 안정을 주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편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이 말랐습니다. 여자가 남편에게서 참 만족을 구하는 한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여인의 대표인 하와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b).” 원하고 사모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사람처럼 여인은 남편을 쫓아다녔지만 지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남편과 아내가 있고 자식과 부모가 있고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나 홀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나 홀로 서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 누가 내 대신 서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인자는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품어주고 감당해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요 남편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그녀의 과거의 상처를 진리의 빛 앞에 드러내시며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에 있는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나의 죄, 나의 고통, 나의 상처, 나의 방황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와 주님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함이요 죄가 샘물의 근원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의 생수가 터집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밝아집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근본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에게 진정한 남편이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남편은 사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대상을 만나 헌신할 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인은 마음 깊은 곳에 있던 근본 문제를 발견하고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은 성령으로, 진리는 진실하게 또는 내가 가진 삶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라는 뜻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제는 예수님으로 대체가 된 것입니다. 즉 예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요14:6).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예배,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을 여셨습니다(히10:20).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믿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힘을 얻고 참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생명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함으로 우리 안에 생명의 샘이 솟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아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풀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밝히십니다. 1장의 제자들처럼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고 그를 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자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얻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남편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했습니다. 여자에게 남편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해결 받을 수 없던 문제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녀의 내면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메세아를 만난 기쁨,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충만함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영혼의 목마름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녀가 만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신 분이십니다. 그녀의 외로움과 목마름과 방황과 진정한 소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그녀의 갈한 영혼에 영생의 샘물을 솟아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생의 허무와 정욕, 무의미 속에서 방황할 때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목마름, 허무, 무의미가 주님을 만남으로 사라지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천국의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죄와 목마름과 방황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구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십니다. 만족주지 못할 세상 것을 찾아 방황하지 말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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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6-28 13: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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