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13강(14:1-28)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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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13 강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후반부입니다. 13장에서는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활동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본장에서의 여정인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에서의 활동은 고조되는 핍박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많은 고난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을 영접한 제자들을 굳게 하는 지혜임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고니온 전도(1-7). 13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에 따라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동남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도시로 이동하는 데 그곳이 바로 이고니온이었습니다. 이고니온은 당시 루가니오 주의 주도였으며 현재는 터키의 중요 상업도시인 '코냐'라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사탄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혜의 말씀을 전할 때 이를 기뻐하시고 친히 증언하심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인내하면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시일이 점점 지나자 이고니온 시내의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한 부류는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에는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즉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지도자들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5). 이에 그들이 알고 도망하였습니다. 삼십육계를 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전쟁에서 전진할 때와 후퇴할 때를 잘 알았습니다. 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이신 본에 따라 지혜롭게 피하였습니다(눅4:30, 마16:13, 18:4).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야 할 때인지, 머물러야 할 때인지, 뒤로 물러가야 할 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 놔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때 갈림길에서 선택하기가 쉬워집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하기에 핍박을 통해서 새로운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둘째, 루스드라 전도(8-21).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은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떨어진 루스드라였습니다. 루스드라는 BC 6세기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로마 황제는 그곳에 직업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의 지배층은 로마의 직업 군인들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주민은 교육을 받지 못한 루가오니아 주민들이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곳에 유대인들이 살고는 있었으나(16:1) 극히 소수라서 회당을 구성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출신으로는 유명한 디모데가 있었습니다(16:2,3; 딤후1:5).
루스드라에서 두 사도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은 얼마나 운명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앉은뱅이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9). 말씀을 깊이 들을 때 운명을 극복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일어섰다는 말이 영어로는 'jumped up'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저 가만히 일어선 것이 아니라 점프를 하면서 순식간에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3장에서 기술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나음 받은 사건이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라는 것을 입증한다면 이 사건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써 입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었던 자가 뛰어 일어나 걷는 일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였습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핍박을 받아 이리로 왔는데 여기서 신으로 대접을 받을 때 그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정말 신앙적으로는 시험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차지할 때 헤롯과 같이 벌레에 물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영광의 때에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면 그 그릇이 어떠한가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영광에 취해 만족해 버리고 대접을 받고자 하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두 사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을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렀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이를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통하여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수목을 기르십니다. 태양 빛으로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풍족히 먹여주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일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음식을 먹으며 만족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때에 물질을 신으로 섬기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일은 속부들이 하는 일입니다. 성부들은 물질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씁니다. 두 사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겨우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한 바탕 치루고 났는데 다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70Km나 떨어져 있는데 걸어서 꼬박 이틀이나 걸려야 하는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충동질 하였습니다. 아마 두 사도가 마술과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기하려 한다고 선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충동하는 데에는 기가 막힌 재주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들을 충동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광고나 선전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물건을 구매하게 합니다. 이렇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없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모시고자 했다가 돌변하였습니다. 그들은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바나바는 그 때 잠시 다른 곳에 갔었던지 아니면 그를 가장 큰 신인 제우스라고 여겨 놔두었던지 여하튼 바울만 돌에 맞아 정신을 잃고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과거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런 그가 이제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실로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9:16).
20,2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바울도 유대인인지라 지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봐도 그는 죽었습니다. 유대인 핍박자들은 사도들이 이고니온에서는 잘 도망갔지만 결국 자기들의 집요한 추격이 성공했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믿게 된 제자들은 바울이 던져진 곳으로 달려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거적때기로 덮여 있던 바울을 삥 둘러서 바라보며 제자들은 슬픈 생각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목숨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신속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굴의 피를 닦고 옷에 먼지를 털고 나더니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기를 돌로 친 그 무리들이 있는 루스드라 성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뒤로 물러가거나 주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뚜기와 같았습니다. 칠전팔기로 다시 도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가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을 때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이 다시 성성하게 나타나니 사람들이 놀라 도망을 갔던지, 그에게 다시 돌을 던지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에 들어가 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박해를 받은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이 죽은 것으로 알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없는 더베에서 원활하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더베 동쪽에는 길리기아의 문(Cilician gate) 이라는 골짜기가 있었고 그 길을 통하여 바울은 자기의 고향 다소에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또 다소에서 배를 타고 쉽게 수리아 안디옥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어떠한 귀로를 택하였습니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람들이 있는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원수의 소굴에 뛰어드는 사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불사조와 같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돌로 쳤던 사람들이 있는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가서 제자들을 심방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만용인가요? 오기인가요? 아닙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그를 원수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서 제자들을 돌보도록 만들었습니다. 환난 속에서 성도들의 사랑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셋째,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22-28).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제자들을 많이 삼았지만 박해를 피해 떠나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처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린 제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이는 영어로 'remain true to the faith' 진실된 마음으로 믿음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고 권면했습니다. 환란과 핍박을 받을수록 예수님 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환란에 넘어지지 않고 도리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과 환난 박해를 받으면서 개인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믿음이 강해집니다. 환난과 박해로 인해서 복음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영적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 나아가 그들에게 고난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는 신자들이 받은 복음을 이 세상에서 지키기 위해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원수들이 많은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환난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흘려 떠내려가지 않게 붙잡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날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불타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여행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휴식을 취하며 오래 머물면서 제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여러 모양의 환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난을 통해서 더 큰 사명을 감당할 그릇으로 연단을 시키십니다. 환난을 받을 때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불평하기보다 감사하며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남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 시험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어진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 있는 목자님들을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후반부입니다. 13장에서는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활동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본장에서의 여정인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에서의 활동은 고조되는 핍박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많은 고난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을 영접한 제자들을 굳게 하는 지혜임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고니온 전도(1-7). 13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에 따라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동남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도시로 이동하는 데 그곳이 바로 이고니온이었습니다. 이고니온은 당시 루가니오 주의 주도였으며 현재는 터키의 중요 상업도시인 '코냐'라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사탄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혜의 말씀을 전할 때 이를 기뻐하시고 친히 증언하심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인내하면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시일이 점점 지나자 이고니온 시내의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한 부류는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에는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즉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지도자들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5). 이에 그들이 알고 도망하였습니다. 삼십육계를 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전쟁에서 전진할 때와 후퇴할 때를 잘 알았습니다. 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이신 본에 따라 지혜롭게 피하였습니다(눅4:30, 마16:13, 18:4).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야 할 때인지, 머물러야 할 때인지, 뒤로 물러가야 할 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 놔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때 갈림길에서 선택하기가 쉬워집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하기에 핍박을 통해서 새로운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둘째, 루스드라 전도(8-21).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은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떨어진 루스드라였습니다. 루스드라는 BC 6세기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로마 황제는 그곳에 직업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의 지배층은 로마의 직업 군인들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주민은 교육을 받지 못한 루가오니아 주민들이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곳에 유대인들이 살고는 있었으나(16:1) 극히 소수라서 회당을 구성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출신으로는 유명한 디모데가 있었습니다(16:2,3; 딤후1:5).
루스드라에서 두 사도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은 얼마나 운명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앉은뱅이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9). 말씀을 깊이 들을 때 운명을 극복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일어섰다는 말이 영어로는 'jumped up'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저 가만히 일어선 것이 아니라 점프를 하면서 순식간에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3장에서 기술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나음 받은 사건이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라는 것을 입증한다면 이 사건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써 입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었던 자가 뛰어 일어나 걷는 일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였습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핍박을 받아 이리로 왔는데 여기서 신으로 대접을 받을 때 그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정말 신앙적으로는 시험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차지할 때 헤롯과 같이 벌레에 물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영광의 때에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면 그 그릇이 어떠한가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영광에 취해 만족해 버리고 대접을 받고자 하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두 사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을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렀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이를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통하여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수목을 기르십니다. 태양 빛으로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풍족히 먹여주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일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음식을 먹으며 만족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때에 물질을 신으로 섬기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일은 속부들이 하는 일입니다. 성부들은 물질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씁니다. 두 사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겨우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한 바탕 치루고 났는데 다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70Km나 떨어져 있는데 걸어서 꼬박 이틀이나 걸려야 하는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충동질 하였습니다. 아마 두 사도가 마술과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기하려 한다고 선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충동하는 데에는 기가 막힌 재주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들을 충동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광고나 선전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물건을 구매하게 합니다. 이렇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없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모시고자 했다가 돌변하였습니다. 그들은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바나바는 그 때 잠시 다른 곳에 갔었던지 아니면 그를 가장 큰 신인 제우스라고 여겨 놔두었던지 여하튼 바울만 돌에 맞아 정신을 잃고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과거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런 그가 이제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실로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9:16).
20,2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바울도 유대인인지라 지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봐도 그는 죽었습니다. 유대인 핍박자들은 사도들이 이고니온에서는 잘 도망갔지만 결국 자기들의 집요한 추격이 성공했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믿게 된 제자들은 바울이 던져진 곳으로 달려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거적때기로 덮여 있던 바울을 삥 둘러서 바라보며 제자들은 슬픈 생각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목숨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신속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굴의 피를 닦고 옷에 먼지를 털고 나더니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기를 돌로 친 그 무리들이 있는 루스드라 성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뒤로 물러가거나 주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뚜기와 같았습니다. 칠전팔기로 다시 도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가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을 때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이 다시 성성하게 나타나니 사람들이 놀라 도망을 갔던지, 그에게 다시 돌을 던지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에 들어가 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박해를 받은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이 죽은 것으로 알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없는 더베에서 원활하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더베 동쪽에는 길리기아의 문(Cilician gate) 이라는 골짜기가 있었고 그 길을 통하여 바울은 자기의 고향 다소에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또 다소에서 배를 타고 쉽게 수리아 안디옥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어떠한 귀로를 택하였습니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람들이 있는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원수의 소굴에 뛰어드는 사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불사조와 같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돌로 쳤던 사람들이 있는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가서 제자들을 심방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만용인가요? 오기인가요? 아닙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그를 원수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서 제자들을 돌보도록 만들었습니다. 환난 속에서 성도들의 사랑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셋째,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22-28).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제자들을 많이 삼았지만 박해를 피해 떠나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처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린 제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이는 영어로 'remain true to the faith' 진실된 마음으로 믿음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고 권면했습니다. 환란과 핍박을 받을수록 예수님 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환란에 넘어지지 않고 도리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과 환난 박해를 받으면서 개인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믿음이 강해집니다. 환난과 박해로 인해서 복음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영적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 나아가 그들에게 고난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는 신자들이 받은 복음을 이 세상에서 지키기 위해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원수들이 많은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환난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흘려 떠내려가지 않게 붙잡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날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불타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여행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휴식을 취하며 오래 머물면서 제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여러 모양의 환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난을 통해서 더 큰 사명을 감당할 그릇으로 연단을 시키십니다. 환난을 받을 때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불평하기보다 감사하며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남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 시험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어진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 있는 목자님들을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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