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 19강(행 20:1-38)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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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도행전 19 강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집중해서 말씀을 일대일로 공부한 것이 에베소 사역의 외적인 면이라면 오늘 말씀은 내적인 면,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밀레도에서의 고별 메시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바울의 목자 생활과 사명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고별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의 고별 메시지에서 우리가 배울 목자 생활은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겸손으로 양떼들을 섬겼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에베소 사람들은 미신과 우상 숭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지성인이었고 아는 것이 많고 말을 잘 하였습니다. 그들은 배우려고 하기보다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겸손해야만 되었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에 대해 겸손한 판단을 가지는 것이요, 자신의 작음에 대해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양들을 섬기되 그냥 겸손도 아니고 모든 겸손, 영어 성경에 보면 great humility, 즉 대단한 겸손,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양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8절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얼마든지 자기를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업적과 내용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교만할 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유대 신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헬라철학에도 능통한 자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신자들을 핍박하러 갈 때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받아가지고 간 것을 보면 그는 주로 대제사장들과 노는 유대교의 차세대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아덴에서 행한 아레오바고 연설을 보면 얼마나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설교를 잘하는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의 학식과 문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무기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까? 자신의 경력이나 학력이나 배경입니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설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고 죄인 들과 함께 하시며 자기를 비우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겸손 중의 겸손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의 극치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자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낮아지심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원 역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겸손을 잃으면 다툼을 일으키고 형제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집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요구하게 되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사역자에게 겸손은 사역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사역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도 겸손에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도 겸손에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함으로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양들이 센터에 와서 복음을 영접하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은 목자들의 외적인 타이틀이나 그 많은 지식이나 말솜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능력과 외모를 자랑하면 양들은 기가 죽어서 “선배님 대단하십니다”하고는 가버립니다. 그러나 목자가 잘난 것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겸손하게 양들의 말을 들어주고, 사랑해주고, 감당해 주면 양들의 딱딱한 마음이 녹아서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양들을 섬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양들을 섬기기 위해 먼저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는 종으로서 자기 주인인 예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겸손으로 섬겼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을 갖기 쉬울까요? 사람에게 수고하고 겸손하게 섬기다보면 기대하고 요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요구 수준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때로는 상처를 받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섬겼는데? 내가 낮아져서 섬긴 것에 대해서 손해의식이 들기 쉽습니다. 바울이 겉으로는 사람을 섬겼지만 그 마음은 늘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습니다. 그의 기쁨의 근원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상처를 받거나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양들을 감당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제자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로 교만한 양을 만나면 한 마디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결코 실력이나 완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은 오직 겸손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칼만 좋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유명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똑똑하고 능력이 많으면 사람들이 다 그 기세에 눌려 굴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칼도 잘못 뽑으면 오히려 반발심만 일으키고 상처만 남깁니다. 우리는 겸손의 칼집 속에 오래 오래 칼을 잘 간수했다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필요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칼을 뽑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과 의욕의 칼은 있는데 겸손과 인내의 칼집을 준비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섬김으로 이 시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양무리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바울은 눈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완악하여 진리의 말씀을 논쟁거리로 삼고 튕기는 양들로 인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은 수시로 말씀을 전하는 그를 찾아와 중상모략을 하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양들에게 불신을 심고 떠나게 하였습니다. 시119:136 말씀에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동족 유대인들로 인하여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볼 때 마음의 근심과 고통,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연약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것을 보면 초기의 바울은 아주 냉정하고 철저한 원칙론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사람이라 연약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감당하고자 했는데 바울은 단칼에 베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워갈수록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목자가 되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목자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양들을 키우면서 점점 양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에 눈물로 기도하는 울보 목자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머리가 좋지만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훈련하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생각만 했지, 어떻게 사람을 살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람을 키우는 것은 가슴으로 키우는 것이지 논리나 이론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을 논리나 이론으로 키운다면 교육학 박사가 자녀들을 가장 훌륭하게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부모님들을 보면 머리 좋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별로 배운 것이 없어도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돌보는 부모, 자녀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들이 자라납니다. 제자 양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은 절대로 한 주에 한 번 일대일 성경공부만 해가지고는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목자님은 항상 만나면 좋은 말씀, 옳은 말씀만 하시고 구구절절이 진리만을 이야기 하시는데 왠지 부담스러워, 다가가기가 힘들어.” 그런 양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지식은 있는데 경청과 사랑의 수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는 눈은 있는데 양들의 마음에 동참하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과 배교로 방황하는 아들에 대한 아픔을 안고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루는 너무 괴로워 교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부로스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이제는 포기해야 할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암부로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암부로스의 말대로 그녀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자식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요 기독교 변증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돕되, 말로만 돕지 말고, 본을 보이며, 기술로 돕지 않고, 심정으로 눈물로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양들에게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거리낌이 없이’라는 원어는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츠러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은 삭감하거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떠나 살던 데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특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이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그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목자의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생명보다 귀하였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그에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자기 생명보다 귀하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 중에서 다른 것은 다 지키겠는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른 율법은 행동에 관한 것이었지만 탐내지 말라는 것은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탐이 나더라도 훔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탐내는 것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 물으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궤계를 꾸몄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고 주의 주,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루터도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절망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하는데 앞장섰습니다. 1521년 4월 17일에는 보름스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요한 에크는 루터의 저술들을 쌓아놓고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지 물었고, 루터는 자기 저술을 검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대답하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틀 후에 루터는 황제 앞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황제의 칙령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절대 권력 앞에 서있었고, 자신의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비텐베르그에 은거시켰고, 루터는1521년 12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출판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생명을 걸고 말씀을 지키고 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삶의 모본을 통해 증거했습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대개 은혜를 안다는 사람들의 삶이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위선적이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고, 불평과 원망을 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가르치면서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인생철학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선행이나 그 어떠한 공로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듣고 구원을 얻어야 할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명인의 자세를 덧입고 캠퍼스 복음역사를 힘있게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겸손과 눈물로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가을 학기 우리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집중해서 말씀을 일대일로 공부한 것이 에베소 사역의 외적인 면이라면 오늘 말씀은 내적인 면,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밀레도에서의 고별 메시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바울의 목자 생활과 사명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고별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의 고별 메시지에서 우리가 배울 목자 생활은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겸손으로 양떼들을 섬겼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에베소 사람들은 미신과 우상 숭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지성인이었고 아는 것이 많고 말을 잘 하였습니다. 그들은 배우려고 하기보다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겸손해야만 되었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에 대해 겸손한 판단을 가지는 것이요, 자신의 작음에 대해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양들을 섬기되 그냥 겸손도 아니고 모든 겸손, 영어 성경에 보면 great humility, 즉 대단한 겸손,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양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8절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얼마든지 자기를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업적과 내용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교만할 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유대 신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헬라철학에도 능통한 자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신자들을 핍박하러 갈 때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받아가지고 간 것을 보면 그는 주로 대제사장들과 노는 유대교의 차세대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아덴에서 행한 아레오바고 연설을 보면 얼마나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설교를 잘하는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의 학식과 문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무기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까? 자신의 경력이나 학력이나 배경입니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설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고 죄인 들과 함께 하시며 자기를 비우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겸손 중의 겸손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의 극치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자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낮아지심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원 역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겸손을 잃으면 다툼을 일으키고 형제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집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요구하게 되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사역자에게 겸손은 사역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사역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도 겸손에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도 겸손에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함으로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양들이 센터에 와서 복음을 영접하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은 목자들의 외적인 타이틀이나 그 많은 지식이나 말솜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능력과 외모를 자랑하면 양들은 기가 죽어서 “선배님 대단하십니다”하고는 가버립니다. 그러나 목자가 잘난 것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겸손하게 양들의 말을 들어주고, 사랑해주고, 감당해 주면 양들의 딱딱한 마음이 녹아서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양들을 섬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양들을 섬기기 위해 먼저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는 종으로서 자기 주인인 예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겸손으로 섬겼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을 갖기 쉬울까요? 사람에게 수고하고 겸손하게 섬기다보면 기대하고 요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요구 수준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때로는 상처를 받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섬겼는데? 내가 낮아져서 섬긴 것에 대해서 손해의식이 들기 쉽습니다. 바울이 겉으로는 사람을 섬겼지만 그 마음은 늘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습니다. 그의 기쁨의 근원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상처를 받거나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양들을 감당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제자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로 교만한 양을 만나면 한 마디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결코 실력이나 완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은 오직 겸손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칼만 좋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유명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똑똑하고 능력이 많으면 사람들이 다 그 기세에 눌려 굴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칼도 잘못 뽑으면 오히려 반발심만 일으키고 상처만 남깁니다. 우리는 겸손의 칼집 속에 오래 오래 칼을 잘 간수했다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필요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칼을 뽑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과 의욕의 칼은 있는데 겸손과 인내의 칼집을 준비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섬김으로 이 시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양무리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바울은 눈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완악하여 진리의 말씀을 논쟁거리로 삼고 튕기는 양들로 인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은 수시로 말씀을 전하는 그를 찾아와 중상모략을 하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양들에게 불신을 심고 떠나게 하였습니다. 시119:136 말씀에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동족 유대인들로 인하여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볼 때 마음의 근심과 고통,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연약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것을 보면 초기의 바울은 아주 냉정하고 철저한 원칙론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사람이라 연약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감당하고자 했는데 바울은 단칼에 베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워갈수록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목자가 되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목자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양들을 키우면서 점점 양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에 눈물로 기도하는 울보 목자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머리가 좋지만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훈련하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생각만 했지, 어떻게 사람을 살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람을 키우는 것은 가슴으로 키우는 것이지 논리나 이론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을 논리나 이론으로 키운다면 교육학 박사가 자녀들을 가장 훌륭하게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부모님들을 보면 머리 좋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별로 배운 것이 없어도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돌보는 부모, 자녀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들이 자라납니다. 제자 양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은 절대로 한 주에 한 번 일대일 성경공부만 해가지고는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목자님은 항상 만나면 좋은 말씀, 옳은 말씀만 하시고 구구절절이 진리만을 이야기 하시는데 왠지 부담스러워, 다가가기가 힘들어.” 그런 양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지식은 있는데 경청과 사랑의 수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는 눈은 있는데 양들의 마음에 동참하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과 배교로 방황하는 아들에 대한 아픔을 안고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루는 너무 괴로워 교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부로스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이제는 포기해야 할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암부로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암부로스의 말대로 그녀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자식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요 기독교 변증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돕되, 말로만 돕지 말고, 본을 보이며, 기술로 돕지 않고, 심정으로 눈물로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양들에게 유익한 것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거리낌이 없이’라는 원어는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츠러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은 삭감하거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떠나 살던 데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특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이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그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목자의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생명보다 귀하였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그에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자기 생명보다 귀하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 중에서 다른 것은 다 지키겠는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른 율법은 행동에 관한 것이었지만 탐내지 말라는 것은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탐이 나더라도 훔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탐내는 것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 물으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궤계를 꾸몄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고 주의 주,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루터도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절망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하는데 앞장섰습니다. 1521년 4월 17일에는 보름스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요한 에크는 루터의 저술들을 쌓아놓고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지 물었고, 루터는 자기 저술을 검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대답하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틀 후에 루터는 황제 앞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황제의 칙령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절대 권력 앞에 서있었고, 자신의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비텐베르그에 은거시켰고, 루터는1521년 12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출판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생명을 걸고 말씀을 지키고 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삶의 모본을 통해 증거했습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대개 은혜를 안다는 사람들의 삶이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위선적이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고, 불평과 원망을 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가르치면서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인생철학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선행이나 그 어떠한 공로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듣고 구원을 얻어야 할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명인의 자세를 덧입고 캠퍼스 복음역사를 힘있게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겸손과 눈물로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가을 학기 우리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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