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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7년 룻기1강(1:1-22)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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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1회 작성일 17-02-19 13:19

본문

2017년 룻기 제 1 강
말씀 | 룻기 1:1-22
요절 | 룻기 1:16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는 사사기 시대와 열왕기 시대의 중간에 일어난 말씀입니다. 룻기의 주제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텅 빈 인생을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자기 유익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이방 여인 룻은 일편단심, 초지일관 여호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냐 모압의 신 그모스냐, 어머니냐 남편이냐 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선택은 무모해 보이고 대책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시어머니에 대한 인애에 기초한 룻의 선택은 고난  가운데서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말론과 기룐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원수지간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시자 결국 미인계를 써서 모압의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우상에 절하게 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모압 지방은 풍요로왔기 때문에 엘리멜렉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물질적인 유익을 따라 그곳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모압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자기 뜻을 앞세웠습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현실적인 유익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얼마 뒤에 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자 중에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이민을 가자고 할 때, 또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삼고자 할 때 반대를 할 수 있었을텐데 왜 무조건 따라갔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집 안에서 대개 사모님들이 야당 역할을 해서 남편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돕는 베필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의 뜻보다 가정에서 왕과 같은 남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늙은 나오미와 청상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생각할 때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대를 이을 손주들도 없이 늙어 버린 자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텅 빈 마음과 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손에 가득한 선물을 움켜잡고자 달려왔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마음이 허전합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텅 빈 손과 죽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여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불행이 닥칠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나오미는 이 불행을 하나님이 치셨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오미는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국경 근처에 까지 왔을 때 나오미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유대 땅에 들어가서 받게 될 어려움을 생각했습니다. 누가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할 것인가 또 그들이 문화적인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며 자립을 해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정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대하사 재혼을 하고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는 이제까지 죽은 남편과 시어머니를 잘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잃고 이제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작별 인사를 받았을 때 그들은 소리 높여 엉엉 울었습니다. 자신들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며느리들이지만 딸과 같이 대해준 늙은 시어머니를 홀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더불어 사회의 3대 약자였습니다. 젊은 자신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늙으신 시어머니는 어떻게 생활을 하신단 말인가 생각할 때 그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랑하던 두 며느리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두 며느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대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쌓아둔 섭섭한 일들이 많았다면 도저히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13).” 나오미의 말 속에 내 딸들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두 며느리를 딸과 같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계대 결혼으로 그들이 남편을 얻을 소망이 없습니다. 또 그들이 유대 땅으로 갈 때 누가 과부가 된 이방 여인에게 시집을 오겠습니까?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 말 속에 두 며느리들을 향한 나오미의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당시 여인에게는 재산권이 없었습니다. 남편없이 사는 과부는 고생길이 훤합니다. 이미 며느리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이러므로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보고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시기 때문에 나를 따라오면 너희들의 삶도 나의 삶처럼 괴로워질까 두렵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를 따랐습니다. 그를 따랐다는 것은 마치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놓는 것처럼 굳게 붙들고 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코 이별하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시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가 봐야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룻은 나오미를 따랐을까요? 남편대신에 시어머니를 택한 것은 룻의 인애였습니다. 또한 모압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택하지 않고 고난이 따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좋으신 분이 아닌데 왜 룻은 그를 택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오 전능자시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압의 그모스 신은 자식을 불태워 바쳐야 하는 잔인한 신입니다. 룻의 선택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동시에 시어머니를 따르고자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룻에게 권유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오르바를 따라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나오미가 인정하는 것처럼 이미 오르바는 할 만큼 했습니다. 오르바를 따라 간다고 해서 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룻의 결심이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룻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룻의 인애입니다. 인애는 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름은 물댄 동산, 상쾌함, 친근히 함, 우정이란 뜻입니다. 룻은 인애와 우정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며 시어머니의 삶의 동반자요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할 시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을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무엇을 얻고자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남편을 잃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섬기고자 합니다. 섬김이 필요할 때 자신의 젊음을 드려 사랑하고 섬기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젊은 여인으로서 자신을 위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지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룻은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유익보다 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실제적인 사랑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룻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룻의 결정은 단순히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룻은 복잡한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았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갈 때 유대라는 낯선 땅에서 무시를 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던졌습니다. 룻은 만약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죽음 외에는 그 무엇도 룻을 시어머니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죽은 후에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룻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자신의 굳은 결심을 밝히는 것을 볼 때 룻은 모압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믿고 경외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평소 나오미의 신앙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깊이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일편단심이었습니다. 나오미도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습니다(18). 룻의 신앙과 진심을 분명히 알고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룻을 감당하고 축복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단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까요? 하나님을 따르지만 결혼이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열매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물질적인 축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래에 잘 될 것 같은 소망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개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비록 여섯가지가 없지만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는 사람만이 그를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얻었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구원하사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이 실패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결혼도 못하고, 취직도 못하고, 돈도 없고, 장래도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이도 늙었고,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수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나오미가 남편도 없이, 두 아들도 없이, 어떤 이방 여인 한 사람만 데리고 처량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연민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기쁨, 희락, 혹은 사랑스러운 자”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고 하였습니다. “마라”는 “쓴물”이라는 뜻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는데 비어서 돌아온 자신을 볼 때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영접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셨지만 나오미가 잘 한 일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돌아왔습니다. 그것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들이 돌아온 시기가 보리 추수할 때라는 것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텅 비어버린 손만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나오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전능자가 나를 …”, “여호와께서 나를 …” 이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매사에 주어가 하나님이고 자신은 목적어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신 것을 깊이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불행해 보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과 헤어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물질을 잃고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게 하신 것만큼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남편을 의지했던 것,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했던 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사실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고 쓴 뿌리를 갖고 살기 쉽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났다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속 좁은 하나님은 죽어도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불행에 대해 운명과 팔자를 탓하며 체념하고 무기력한 가운데 드러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어로, 자신을 목적어로 인식하며 삶을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그 입에서 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사람은 불행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습니다. 장미넝쿨 속에서 가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한 뜻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나오미에게서 배운 말씀을 기초로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인애를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별처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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