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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6년 성탄메시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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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요한(종수)
댓글 0건 조회 73회 작성일 16-12-26 07:20

본문

2016년 성탄말씀 메시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 11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본문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전해준 최초의 성탄메시지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선포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탄생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지 함께 묵상해 보고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사 아기 예수님을 심령 깊이 영접하여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충만한 예배로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막강한 로마제국 시대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매우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고,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는 말씀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에 따라 모든 백성이 다 호적을 하러 각각 고향으로 향해야 했습니다.(2) 여기서 호적은(census)요즘으로 말하면 인구조사에 해당됩니다. 이를 통해 로마는 인두세를 거두어들이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떠나 유대땅 베들레헴으로 먼 길을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만삭이 가까워진 마리아를 데리고 갔습니다.(4,5)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 때문에 할 수 없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 같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700년 전에 예언된 미가서 5장 2절 말씀(“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가이사의 호적명령을  통해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어디에서 탄생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라”
아기 예수님은 냄새 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밥통)에 누워계십니다. 이는 아무도 산모에게 방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생명을 출산할 산모에게 어찌 사람들이 그럴 수 있습니까?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모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고 아기 예수님께 미안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천한 강보에 둘둘 말아 말구유에 비참하게 누워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빌립보서2:8a)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요1:3),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 위엄 있고 호화로운 궁전에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태어나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비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만 모든 권세와 영광과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사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아지는 것이 무엇인가? 겸손이 무엇인가를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분이십니다.(벧전1:19, 히4:15)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한 우리 죄인들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만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3:16)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요 도리어 우리를 섬기러 오셨음을 의미합니다.(막10:45)  더 나아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 지사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가난함으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고후8:9)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언제든지 부담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요15:14,15)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낮아져서 자기를 비우고 겸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먼저 상대방에게 손 내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잘 못 했음에도 불구먼저 손내 밀어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또한 아무 잘못 없이 왕따를 당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상처가 되고 화가 납니까? 그만큼 우리는 낮아지기를 싫어하고, 자존심 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저도 낮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청소를 하면서 느꼈습니다. 청소는 사회통념상  낮은 사람이 한다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저는 센타에서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치우면서 때론 화가 납니다.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가? 생각이 들 때가 사실은 많습니다. 또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익타운은 학생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려서 매주 주일날은 청소정리를 제가 해야 합니다. 화가 나서 사진을 찍어두고 주인을 찾아 혼내주고도 싶고 고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주님 앞에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더 낮아져서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겸손과 사랑, 비움의 아름다움을 본받을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고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아픔과 슬픔과 운명주의와 낮은 자존감,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친히 이해하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만큼 운명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환영받지 못하고, 외면당하고 초라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위로와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해 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나 문제를 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시기 위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이제  장면은 말구유 예수님에게서 성 밖에 있는 목자들로 옮겨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밤에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빛은 오늘 따라 유난히 더 밝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하늘로부터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대낮같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이런 경이롭고 놀라운 광경에 압도되었습니다. 숨이 멈추는 것 같고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목자들은 왜 크게 무서워했을까요?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 상대적으로 목자들은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무서워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먼저 무서워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자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천사는 우리에게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11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이란 말은 현재를 가리킵니다. 이미 예수님이 2016년 전에 오셨지만 오늘 현재 우리를 위해 구주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대개 세상의 기쁜 소식은 특정인에게 소수에게만 해당됩니다. 올해 서울시 공무원 평균 경쟁률은 무려83.76:1이었습니다. 132,843명 지원에 1,586명만이 합격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떨어진 나머지는 허탈감과 슬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 제임스가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을 한 것은 저희 가정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 로또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며칠전에 이에 대한 소식이 TV에 방영되었습니다. 성탄로또는 스페인에서 일년에 한번 성탄을 기념해서 많은 사람이 골고루 기쁨을 누리도록 만든 로또복권입니다. 2015년 12월 22일에 스페인 남부 작은 마을(로케타스데마르)엔 큰 경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 1,600명 모두가 1등에 당첨되어 40만유로(약 5억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감격하여 서로 포옹하며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겐 최고의 성탄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기쁨은 상대적입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시험에 합격해도 그 기쁨은 잠시일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하고 감격하고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탄생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로또에 당첨된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두에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 곧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구주(savior)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단의 유혹으로 인해 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역사드라마에서 죄수가 일생토록 감옥 에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의 포로 된 우리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며 하나님을 떠나서 행한 모든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죄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신자건 불신자건 모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잊고 산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롬3:23)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계21:8)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심판의 말씀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성인도 철학도 개인의지와 노력으로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워진 죄의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사 깨끗하게 하시기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3;16절에서 여자의 후손가운데 메시야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야되신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 약속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2016년 전에 육신을 입고 한아기로 오셨습니다.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주란 예수님이 중보자이시며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심판을 받고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에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즉 신분이 180도 바뀐 것입니다. 비유하면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아닌 귀족의 신분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는 지금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도 사람들은 기쁘지 않습니다. 최근에 최순실 사건으로 인한 대통령 탄핵 소식, 요동치는 정치권소식,  AI조류독감으로 물가가 오르고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힘들고 슬픕니다.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대통령 하야에 국민들은 소망을 걸고 어제도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좀더 낳은 대통령을 뽑으면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로 고백할 때만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오직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안에 새 생명과 새 소망과 위로와 사랑과 평화, 죄 사함의 기쁨과 회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기쁨을 빼앗아가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 말구유에 오신 구주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제를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풀리지 않는 죄 문제, 건강문제, 물질문제, 갈등문제, 장래문제, 두려움과 시기심, 운명주의, 실패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답이 있습니다. 구원자시요 중보자시요 왕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로부터 구원할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즉 로마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야를 꿈꾸워 왔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를 압제할 수 있는 힘 있는 메시야가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구주의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누인 아기라고? 목자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천군 천사들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천군 천사들의 찬송은 온 우주에 장엄하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가 126장, 천사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돌려 보내세 구주 오늘 나셨네, 크고 작은 나라들 기뻐화답하여라. 영광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 나신주,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 나신 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완성이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반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15~20절은 목자들이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빨리 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내용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메시지를 듣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을 빨리 가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근본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사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소망을 잃고 표류하는 이 나라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말구유에 낮아지셨고 모든 것을 비우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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