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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6년 성탄 2강(눅1:57-80) 구원의 뿔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이디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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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16-12-1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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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성탄 2강

구원의 뿔, 돋는 해되신 예수님

누가복음 1:57-1:80

누가복음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메리크리스마스 ! 즐거운 성탄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밤새 수도관 터질까, 보일라 터질까 걱정해야 하는 겨울이 정말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날씨도 추운데 최순실씨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과 탄핵 문제로 나라 전체가 많이 시끄러운 요즘입니다. 믿었던 대통령과 정치권들의 각종 위증적인 죄악상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더 싸늘해지고 더 추워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걱정마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에게 구원의 뿔 되시고, 돋는 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추우면 추울수록 따뜻한 햇볕이 더욱 더 소중해 지듯이 우리 예수님께서 저희를 위해서 오신 것이 얼마나 더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요! 아무쪼록 오늘 성탄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추운 가슴에 구원의 뿔, 돋는 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몸과 영혼이 훈훈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다시 한 번 ‘메리크리스마스 ! 즐거운 성탄입니다’ 하며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 快 [ shngdnkuil ],

 

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은  57-66절로,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음은  67-80 절로, 이는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찬송 시입니다. 본문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특히 사가랴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입만 열면 세상에 대해서는 불평불만이,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신세한탄이 되기 쉬운 현재 우리들의 삶 가운데 사가랴와 같이 온 몸과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고,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넘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저와 여러분이 사가랴가 누렸던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I.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57-66)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드디어 노년에 첫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이, 사가랴 목자, 축하해! 엘리사벳 사모님은 건강하시지?" “사갸랴 제사장님. 축하드립니다. !! ” 이메일이나 카톡, 페이스 북에도 축하 메시지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추카 추카 추카... 카카오톡 페밀리 몽땅 발싸~ 뿅뿅뿅!!!" 핸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핸폰에서 계속 ‘카톡, 카톡,카톡’ 소리에 딸꾹질이 날 정도였습니다. 친척들은 미역, 분유, 기저귀, 젖병 소독기, 어떤 사람은 유모차까지 사들고 엘리사벳 사모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달덩이 같은 아기의 얼굴을 볼 때, 사가랴 부부나 이웃 친척들 모두 싱글 벙글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주께서 엘리사벳을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그간 아이를 낳지 못해 슬픔이 많았었습니다.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아이를 낳지 못하여 외로움이 많았고 또 오해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가운데 구약에 나오는 한나와 같이 한 맺힌 기도를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엘리사벳을 긍휼히 여기시고 때가 되매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그에게 아들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픔이 있는 여인, 외로움과 내적 고통이 있는 여인들의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시는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59절을 보십시오.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난 지  8일이 되자 율법대로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레  12:3) 당시에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는 날, 전통적으로 여러 친지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 아이의 이름도 지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름은 당연히 가문의 혈통과 전통을 따라 지었습니다. 따라서 친척들이 부친이 이름을 따서 사가랴 2세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이를 듣고 있던 엘리사벳 사모님이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라 해야 합니다." 이는 일찌기 천사가 사가랴에게 준 방향이었습니다. (1:13) 그러자 친척들은 가문의 전통을 무시하며 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이름을 짓는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가득해야 할 자리가 이름 짓는 일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최종 결정을 사가랴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사가랴는 벙어리 훈련을 받느라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서판을 달라하였습니다. 그가 서판에 쓴 내용이 무엇입니까? 63절을 보십시오.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요한’이라는 이름은 사가랴 가문에는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가랴 부부는 그 이름을 고집했을까요? 그 이름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서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준 이름입니다. 가브리엘은 그 아들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그의 사명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사가랴가 처음에는 믿음이 없어 “어찌 그런 일이~” 하였으나 지난  10개월 동안 묵상하고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수태와 출산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과 소원을 자신의 것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확신있게  ‘제 아들의 이름은 요한입니다’라고 서판에 적었습니다.

이름 안에는 부모의 소망과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믿음의 2세들은 이름으로 인해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아마 2세들에게 이름에 대한 가슴아팠던 에피소드들이 꽤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첫째 아들 이름은 리빙스톤입니다. 아프리카를 사랑했던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톤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되라며 이 엘리야 목자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저는 그 이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 아들은 힘들어 했습니다. ‘왜 내 이름이 스톤이야? 내가 돌이야?’ 저는 리빙이 때문에 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 ^^ 그리고 때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 리빙스톤 선교사 얘기와 산 돌되신 예수님 얘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둘째 에즈라는 이름 때문에 유대인이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속의 에즈라는 이스라엘 최고의 성경선생입니다. 그는 깊이 있는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영적인 부흥을 일으킨 훌륭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아들이 에스라처럼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 방황하는 영혼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영적인 부흥을 가져올 아들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리라는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어떤 목자님들은 자녀 이름 짓는 것 때문에 친척들의 꾸중과 비난도 감수해야 했고, 호적 올릴 때 동사무소에서 난감한 상황에 처해보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이렇게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2세들이 믿음의 자녀들로 굳게 자라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소망을 이루는 자가 되길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귀한 믿음의 자녀들 각자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당신의 뜻과 비전을 보여주시고 소망대로 그 인생들을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64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자마자 사가랴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지난 10개월하고도 8일 동안 사가랴는 입이 닫혔고 혀가 굳어있었습니다. 즉,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제사장 직분도 감당하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함하고 이상한 루머를 퍼트려도 해명할 수도 없었고,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치않게 제사장 직무정지에 갑자기 쓸모없는 인생이 된 것 같아 내가 이러려고 제사장이 되었나 하는 생각에 심한 자괴감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이런 너무 심한 벌을 준 가브리엘 천사를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생가운데 긴 훈련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훈련을 받아본 기분이 어떠하고 훈련을 마친 기분이 어떠합니까? 군대 다녀오신 분들 중 군 생활이 지긋지긋하셨던 분들은 군대생각하기도 싫어 그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가랴도 너무 힘들고 억울해 그 입만 열리면 각종 심한 말과 저주로 독화학 가스를 퍼부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사가랴가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찬송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II. 구원의 뿔, 돋는 해 예수님  (67-80)

67절을 보십시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이르되’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였다고 시작합니다. 사가랴가 인생 훈련 받는 것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많이 있었다면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을 볼 때 그는 벙어리 훈련 기간동안 내면에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예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언했다는 것은 그에게 성령을 통해 계시된 것, 즉 보여진 것을 말로 선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무엇인가를 보았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보고 깨달은 것은 그로 하여금 인생의 모든 어려움을 넘고 시대의 어려움을 넘어 내면에 감사와 찬양이 흘러넘치게 만들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입이 열리자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찬송하리로다" (Praise be to the Lord!) 였습니다. 이 말은  "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68절 하반 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첫째,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아보셨다"는 것은 “He has come 또는 visited” - 곧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시 찾아가고 싶고, 정답게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찾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찾아가도 고마워하지 않고, 도리어 불명하고 원망하며 자꾸 상처만 주는 사람은 찾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사가랴가 살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신 것이 왜 그렇게 큰 감사제목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방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찾아가기가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로서 비참하게 살던 그들을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거룩한 백성, 제사 나라의 소망을 두셨습니다.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사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듯해지자,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나라가 분열되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내쫓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지배 하에서 선민으로서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을 입고 그들을 직접 심방 오셨습니다. "그 백성을 돌아보사" (He has come!)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배부르고 등 따습고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수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여 때마다 남편을 버리고 세상 우상을 따라나서는 고멜과 같은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고, 죄의 중한 짐을 지고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구원 역사는 찾아가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이번 성탄에 여러분은 어디를 찾아가십니까? 즐거운 곳, 행복한 곳, 짜릿한 곳을 찾아가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무엇보다 죄악투성이인 저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며 이 부족한 나를 돌아봐 주었던 수많은 은인들을 기억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죄의 짐을 지고 고통하는 형제들과 이웃들을 먼저 찾아가보는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가랴가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 백성을 속량(redeem)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노예를 몸값을 지불하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은 그의 백성들이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점에서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볼 때, 그 당시는 강력한 로마 제국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으니 그 로마 제국의 노예 백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의 노예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볼 때는 로마 제국의 노예 백성 같았지만 실제로는 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게 하심으로 그 백성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가랴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심령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탄에 저희를 찾아오신 것은 저희들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속량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참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6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구원의 뿔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삼하 7:13, 행 13:22,23) 왜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묘사했을까요? 성경에서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특히 적을 무찌르는 강력한 힘을 상징합니다. (신 33:17) 뿔은 단단하여 깨지지 않고 그 뿔에 부딪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숴버립니다. 또 그 뾰쪽한 끝은 그 어떤 것이라도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반석같이 단단하고 칼날같이 예리한 강력한 구원의 뿔로 우리가운데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뿔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70, 7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하신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는 구원이라" 구원의 뿔이 하는 일은 우리 원수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원수와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는 어떤 자들입니까? 원수는 우리가 잘되고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여 괴롭히고 누르고 죽여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도 원수가 그를 죽이지 않고 있다면 이는 다른 강한 사람이 그를 보호하고 있어 그 죽일 기회를 찾고 있거나 아니면 그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로 여겨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자기들을 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거기서도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원수로 여겨 수없이 죽였는데, 특히 힘없고 쓸모없어 보이면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오래전에 늙으신 어르신들 부부를 대상으로 퀴즈 맞추기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나이를 지극히 잡수신 어르신들이 퀴즈에 나와 사회자가 내준 단어를 남편이 다른 말로 설명하면 부인이 맞추어야 하는 프로였습니다. 한 어르신이 나왔고 사회자가 ‘천생연분’을 설명하라고 문제를 보내었습니다. 이 남자 분은 씩 웃으면서 자신 있게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를 뭐라고 부르지?” 그러자 그 부인이 망설임 없이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분이 당황하면서 아니 ‘두 글자 말고 네 글자로...’ 하고 정정하자, 이 사모님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 잉꼬부부나 천생연분과 같은 답을 기대했던 남편 분에게 부인이 대답한 것은 ‘평생 웬수’였습니다.

 

당신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돈도 제대로 못 벌어 오면서 앉아서 꼬박꼬박 손가락으로 명령하려고 하고 주먹으로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는 남편입니까? 아니면 불평의 따발총을 쉬지 않고 쏘아대며 바가지를 긁어대는 마누라입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게임도 못하게 하고 계속 공부만 하라고 하는 부모님입니까? 아니면 부모알기를 껌으로 알고 필요할 때만 단물 빨아먹으려고 하는 자식들입니까? 아니면 별것 아닌 일로 트집 잡고 호통부터 치고 보는 무한 상사입니까? 아니면 나보다 한참 아래 직급인 것이 빽 하나 믿고 상사인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부하입니까? 아니면 내 사정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라고 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협박하는 목자님입니까? 아니면 미꾸라지처럼 요리저리 핑계대고 도망만 치는 양들입니까? ‘아이구... 이 웬수야!!...’ ‘원수같은 남편, 마누라. 자식들, 상사, 부하, 대통령, 썩어빠진 정치인들...’ 세상에 원수가 너무 많습니다. 이 원리대로 한다면 이 세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폭탄이 터져야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누군가의 원수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의 원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이 아니고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용서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연에서 남의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동물들, 사자나 호랑이나 악어나 뱀과 같은 맹수들의 특징을 보면 한결같이 자신의 본 모습을 최대한 숨기고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먹잇감들이 좋아할 만한 곳, 갈대나 물, 늪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덮쳐서 잡아먹어 버립니다. 우리의 진정한 원수 사단마귀도 맹수들처럼 자기의 본 모습과 동기를 철저히 숨기고 우리 인간에게 접근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누리던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사단의 전략(strategy)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친구인 것처럼 다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뒤에 숨어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였고, 또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가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로 사단마귀는 여전히 인간들 뒤에서 역사하여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게 만들었고, 라멕은 아무 죄도 없는 소년들을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 죽이고 또 그것을 자랑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참 간교하게 인간들을 속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요즘 드라마나 게임같은 것을 보면 그 작가나 프로그램 제작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그 완성도가 높습니다. 마치 진실같은 거짓, 그리고 현실같은 환상의 세계속에 사람들이 푹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하는 것을 현실의 삶보다 더 좋아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부모들이 게임하느라 어린 아이들을 방치하여 그냥 죽게 만들어 버리는 일이 자주 뉴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자녀가 늙은 부모들에게 게임하기 위해 돈 달라고 하며 협박하여 홧김에 때려 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가 지금 물은 것이 독인지, 아니면 약인지 모릅니다. 헨드폰과 컴을 끼고 살면서 사단이 인터넷을 통해 슬며시 집어넣은 음란물들과 폭력물들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이 음란의 독과 폭력, 무자비의 독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또한 사단은 장래에 대해 염려하는 지성인들에게 두려움의 독이빨과 발톱으로 마구 물고 찌르고 할퀴어댑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두려움의 덧에 걸리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힘이 빠지고 망할 것 같은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취직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잘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또한 사단은 우리를 열등감과 패배주의의 이빨에 물려 시험을 조금만 못 봐도 패배적인 생각가운데 드러눕게 합니다. 올해는 제발 고3 수험생 중에 시험 결과에 낙망하여 자살하는 학생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외에도 사단에게는 갖가지 방법과 묘수로 사람에 따라, 그가 당하기 쉬운 약점을 따라 갖은 독과 뿔과 이빨로 그들을 잡아 물어뜯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과 절망으로, 어떤 사람은 안일과 시기심에 잡혀 고통하게 만듭니다. 교만의 독은 주제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최고인 것 같이 생각하게 합니다. 나이지리아에서 한 사람이 자기가 다니엘이라고 하며 갑자기 사자 우리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자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맨십이요, 만용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으나 그것은 교만을 심는 사단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자의 맛있는 점심식사가 되었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에 뿔에 찔리고, 어떤 사람은 게임과 오락의 덧에 걸려 현실을 살지 못하고 환상의 세계 속에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안일의 뿔에 찔린 사람들은 심령이 무기력해집니다. 이렇게 원수 사단의 궤계에 빠져 고통하는 사람들을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사단의 모든 궤계를 능히 다 꿰뚫어보시고 그를 부수어 트릴 수 있는 강력한 구원의 뿔을 가진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사단이 왜 예수님을 무서워합니까? 이는 예수님은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 뒤에서 역사하는 사단과 싸우시고 그 사단마귀를 꾸짖으시고 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사단이 아무리 천사처럼 위장을 하고 숨어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예리한 칼날과 같이 그 골수를 찔러 쪼개며 그 속을 들여다보시며 그 안에 있는 죄악들을 다 잡아내십니다. 마치 명의처럼 마음속의 암세포를 다 찾아내 그 칼날같이 예리한 뿔로 그것들을 다 잡아내 치료해 버리십니다. 이 구원의 뿔 예수님은 하나님이 친히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을 다른 누군가가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뿔은 사단의 어떤 뿔이라도 능히 부서뜨리고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지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7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 하시리로다" 사가랴는 예수님을 돋는 해로 비유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 나라 자살율이  OECD 국가들 중  1위라고 합니다. 이는 약  30분당 한명씩 자살하는 수치라고 합니다. 이혼율도 너무나 높고 사람들의 불평 불만도는 세계에서 매우 높은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요즘은 민간인 최순실과 그의 사람들 손에 놀아난 국정농단과 불통의 아이콘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 나라를 걱정하며 촛불을 들었습니다. 여전히 난장판인 정치권과 완고한 대통령 앞에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장래의 짙게 깔릴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를 봅니다. 가뜩이나 경제가 힘든데 우리를 더 힘 빠지게 하는 이런 상황들이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후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들처럼 우리로 하여금 더 어두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평화로운 시위를 하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이고 있으나 그들의 내면은 실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세상의 희망이 도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붙들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희망은 겨우 자기 발 앞을 비추는 작은 촛불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 내면 문제, 경제 문제, 인간 갈등 문제를 이기며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근본적으로 죽음의 그늘이 덮어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든 평강을 빼앗겨 버립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망권세 앞에서 고통하며 허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돋는 해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광스럽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돋는 해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요소가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밝고 희망찬 해가 높아 떠오를 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 진리를 밝히 보게 되고 우리의 원수가 누구인지 밝혀지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를 알게 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밝히 보게 됩니다. 이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생명과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이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은 단순히 빛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십니다. 햇볕이 박테리아와 각종 세균을 죽이듯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들을 태워버리시고 죄로 인해 찢기고 상한 상처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기뻐 뛰놀게 하십니다. 이 돋는 해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오심을 사가랴는 보았습니다. 이 큰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할 자가 바로 자기 아들이 될 것임도 보았습니다. 그는 그 귀한 아들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너무나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입이 열리자마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이 예수님의 능력과 본질을 아는 사람은 사가랴처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힘든 일보다도 더 큰 기쁨과 감격과 승리를 맛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큰 승리를 내다보는 사람은 작은 패배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습니다. 일의 결국, 결말을 소망 중에 바라보는 사람은 그 과정중의 작은 실패나 어려움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풀과 같은 인생이나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풀과 같은 인생인 우리는 잠시 이 땅에서 살다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 결말을 알기에 이 땅에서 잠시 슬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 슬픔과 어려움들이 우리의 행복을 삼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잠시 직장이 없거나 직장에서 고생을 해도, 잠시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남편이나 부인이 가슴을 아프게 해도, 잠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당하고, 잠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해도 이 어려움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마다 우리의 구원의 뿔이 되어 주사 우리를 기가막힌 웅덩이에서 건져주시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고 때마다 독수리 날개침같은 새 힘을 주셔서 인생을 새롭게 살게 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6년도 한해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이렇게 다 지나갔습니다. 지난 1년 어떻게 지냈나 돌아보니 저는 지난 1년 눈물로 지내온 것 같습니다. 제가 올해  2016년도에는 유난히도 눈물이 많았던 해 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론 여기 계신 분들 많은 분들이 으로 표시 안해서 그렇지 올해 한해 인생길 지나는 동안 기가막힌 웅덩이를 여러번 경험하시고 말 못할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수십 군데 사단의 뿔에 찔려 절망하고 아파하며 아픈 가슴을 안고 이곳에 앉아 계신분이 보이십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짙은 어두움의 그늘에 앉아 계신 분들.. 슬픔과 한숨과 절망과 운명과 죽음 권세의 그늘에 앉아서 고개 숙이고 울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 들의 개인적인 아픔과 슬픔을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이 내 사랑하는 친구 안토니 목자가 끔찍한 교통사고로 죽어 나이지리아 땅에 묻힌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게 되어 기쁨이 충만했던 형제였습니다. 말씀을 너무나 사모하여 한 번도 말씀공부에 빠지지 않고 밤 12시가 넘게까지 공부해도 즐거워하던 형제였습니다. 이 부족한 저를 목자로 인정해 주고 나의 허물까지도 사랑으로 받아주고 목자인 내가 힘들어 헤맬 때에도 나를 감당해 주던 목자같은 양이었습니다. 이 형제를 나이지리아 땅에 묻던 날, 전 너무나 힘들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사단의 뿔에 찔려 고통하던 형제를 보면서도 부족하고 힘이 없어 올바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도와주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자신을 누르고 붙잡아 자기 맘대로 휘두르고 다니는 저의 죄와 어둠의 세력, 운명과 죽음의 세력 앞에서 저는 아무 힘이나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눈물로 살던 자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은 사랑하던 나이지리아와 야바텍을 떠나오는 아픔을 겪게 하셨습니다. 또한 저로 하여금 사가랴와 같이 벙어리가 되고 백수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게 하셨고 대신 한국과 케냐와 미국을 돌아다니며 방랑자와 같이 세상 구경을 시키시며 저를 뺑뺑 돌리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 안에 남아있는 더러운 죄의 찌끼들과 하나님외에 의지하는 것들을 다 없이 하셨습니다. 통장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셨고, 나이도 더 늙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 붙잡거나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게 마련인데 저는 붙잡을 지푸라기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주님의 말씀만을 붙잡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저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저의 영혼은 그와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여 집니다. 왜냐하면 지난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의 영혼을 깨끗히 수술해 주시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 세계를 돌면서 보여주셨고, 그리고 저 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제게 주신 선물 예수님 한 분이면 제게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실망할 일도, 절망할 일도, 슬퍼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알려주시고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기뻐할 이유가 충분함을 알려주십니다.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간 안토니 목자는 제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다가 저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 제가 구원한 영혼의 ‘제 1호 천국 도착자’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깨닫게 하셨고, 이로 인해 감사하게 하셨습니다. 사단은 저의 나쁜 상황들을 보며 원망과 불평과 불신에 빠지게 하려고 노력하만,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의 말씀들을 통해 제가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저의 힘이 되심을 알려주십니다. 이 분이 제 내면에 위로부터 오는 기쁨을 주고 평강을 주십니다. 제 입술과 제 마음에 찬송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의 소망을 세상 안에서, 또는 사람사이에서 찾고자 하지 마십시오. 눈을 높이 들어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 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가랴는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난 자기 아들 요한을 보고 또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곧 오실 구세주, 메시아  !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당신을 구원할 구원의 뿔이 오셨습니다. 쇠망치 같이 강하고, 날카로운 칼끝처럼 본질을 찔러 쪼개고, 사단의 권모술수와 모든 속임수를 파하고 능히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강력한 분이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어떤 죄라도 용서해주시며, 여러분을 괴롭히는 어떤 사단의 강력한 힘이나 사슬이라도 다 깨뜨려 부숴버리고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는 구세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둠의 그늘에 앉아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사 독수리 날개침같이 힘을 얻고 하늘을 높게 날게 할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분을 바라보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감당할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는 자는 어떠한 세상이든 넉넉히 이기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어두움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우리 진심을 담아 큰 소리로 “메리 크리스마스”“기쁜 성탄입니다”를 외쳐 보시지 않겠습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 기쁜 성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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