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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 19강(11:14-32) 더 강한 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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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8회 작성일 17-06-2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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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9 강
말씀 | 누가복음 11:14-32
요절 | 누가복음 11:21,22

더 강한 자 예수님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이후에 벌어진 논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일하신다고 모략을 펼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조목조목 밝히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든지 사탄 편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으면 헤치는 그룹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엄연한 영적 현실을 깨닫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알세불 논쟁(14-23).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언어는 좌뇌가 작동하여 이루어지는데 뇌손상이 오거나 언어중추에 이상이 있거나 치매를 앓거나 비타민 결핍, 또 심리적 충격이나 정신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언어장애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말을 못하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을 하거나, 임의로 말을 만들거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귀신의 역사로 인해서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내가 무슨 말을 하여 판단 받을 것을 두려워하면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서면 떨려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의식이 심하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서는 말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은 신뢰 위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귀신은 거짓말하는 영이기 때문에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참 말 같이 하기 때문에 말을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귀신은 두려움의 영입니다. 심리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잠잠히 있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표현하지 못하니 그 답답함이 봉한 포도주 통과 같고 터지게 된 김치 담은 비닐봉지와 같습니다.

  사람은 의사소통을 해야 마음이 시원하고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나 불통인 개인이나 모임이나 국가는 결국 터지게 됩니다. 불통 대통령으로 인해서 나라는 한 동안 시끄러웠습니다. 불통하게 되면 일을 이루지 못하고 그르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말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상황에서 두려움으로 인해서 침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자기 문제에 매여서 말씀을 나누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의사표현을 하지 아니하고 있으면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하게 됩니다. 오해가 쌓이고 감정 상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로 인해서 독한 말, 무익한 말을 뱉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아가 치유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그 사람이 말을 하는데 선하고 아름다운 말, 은혜로운 말,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리 중에 더러는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악의적으로 결과를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사탄의 힘을 빌어서 한다고 곡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니 사탄의 역사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줄여서 ‘내로남불’이라고 하죠? 자기중심적인 것, 일상적인 것, 당연시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 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게 되고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율법적이 되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로 굳어지기 쉽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는데 전통과 관습, 율법에 젖어서 판단하게 되면 생사람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말이 왜 모순되는지 차분하게 말씀하십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반대하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할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들이 예수님께 하는 잘못을 지적할 것입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사탄의 나라도 스스로 분쟁하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서로 물고 싸우면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면 사탄의 나라는 붕괴되어야 하고 사탄이 집은 무너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사탄의 나라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귀신들을 쫓아내기는커녕 계속해서 그 귀신들을 자기 휘하에 두고 통제하면서 합심하고 단결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비방은 잘못된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왕이시오 정복자로서 대적 사탄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칠십인의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도 확장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스가랴서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슥13:2).” 이 말씀은 메시아가 와서 모든 죄를 씻으실 뿐 아니라 귀신을 떠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지금 귀신을 쫓아내고 계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그리고 실효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의와 가난과 질병과 음란과 탐욕과 전쟁과 자포자기 등 망가진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사회 속에 있는 불의와 불합리와 불공평으로 인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우리의 모든 안팎의 깨어짐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평안을 필사적으로 열망하고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인종과 족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선교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인하여 감사하고 누리며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더 강한 자 예수님(21-26). 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강한 자는 사람보다 더 강한 사탄이고 사탄보다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자기의 집을 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집이란 주택을 포함해서 궁전의 뜰과 같이 주인이 지배하는 한 영역을 말합니다. 그 영역 안에서 주인의 지배를 받으면 안전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은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서 말을 하지 않고 살면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유롭게 자기 말을 하고자 할 때 강한 자의 억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강하고, 질병도 강하고, 사탄도 강하고, 죽음도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보다, 질병보다, 사탄보다, 죽음보다 더 강하십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굴복시켜 쫓아내시고 그 사람에게 말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 안에 잡혀서 갇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인생들을 풀어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죄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기 정죄로부터, 각종 중독으로부터,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풀어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다시 오실 때 귀신의 왕 사탄을 지옥의 영원한 불 연못에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만유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와 함께 모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포로 되었던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이 일에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사탄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든지 사탄과 함께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양 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중간지대,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양들을 모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그 양들을 흩어버리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흩어지고 깨지고 말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간 사람은 변화되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귀신도 자기가 거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였습니다. 귀신은 자기가 거하던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자기가 장악하고 괴롭히던 사람이 그리워졌습니다. 귀신은 집 떠나니 고생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 가리라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가서 보니 자기가  떠났던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주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의 침입을 이길 만한 더 강한 주인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 사람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회개하고 나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아니하면 더 강한 사마리아 여인이 됩니다. 음란은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지 않는 그를 귀신이 그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청소를 한 이유는 메시아를 받아들이고자 함인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예수님을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더 크게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던 사람이 세상 것에서 만족을 찾고자 하니 더욱 괴롭습니다. 결국 타락의 정도가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회개한 후에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면 더러운 일곱 귀신에 붙잡혀 시달리게 됩니다. 사람보다 강한 귀신이 있는 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귀신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한 그는 귀신들의 밥이 되어 철저하게 유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 투쟁을 하지 않으면 사탄이 더 강한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 점령해 버립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깨끗하게 됩니다. 깨끗하게 된 이후에는 더욱 주님의 말씀과 임재 가운데 거하며 영적인 성장을 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셋째, 요나의 표적(27-3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대 사회는 특히 훌륭한 아들을 낳은 어머니들이 복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아들딸을 둔 사람도 복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훨씬 더 복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사탄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 받아 생명과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이 충만한 것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서 지킬 때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대비되는 사람은 표적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표적을 보기 원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종교적 탐욕주의자들입니다. 기적과 이상한 체험을 통해서 자기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이런 신앙은 결국 신비주의를 추구하게 되고 윤리가 없는 신앙생활로 흐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31).”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애가 강해서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떠났지만 풍랑으로 배에서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회개하고 살아나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가 건성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대신들과 백성들, 심지어 짐승들까지 다 금식하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요나는 선지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이십니다.

  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지만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는데 그들은 그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상을 볼 때 다른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며 남방 여왕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적 체험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와 친밀한 삶을 사는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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