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17강(9:46-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페이지 정보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 17 강
말씀 | 누가복음 9:46-62
요절 | 누가복음 9: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을 드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 같이 연약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후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더 민감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왕이 되시면 논공행상을 벌일 것인데 누가 국무총리가 되고 누가 경제 장관이 되고 누가 교육부 장관이 될 것인가 하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논쟁하였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은 김칫국을 먼저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서로 누가 크냐고 투쟁을 하게 되면 정치적이 되고 분열되기 쉽습니다. 보통 누가 크냐고 할 때 누가 예수님 가까이 있고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어린 아이는 연약하고 섬김이 많이 필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사람 숫자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또 어린 아이는 허물이 많고 실수도 잘 합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 있으려면 대접을 받고자 하기보다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고 높고 영광스러운 곳에 있기보다 낮고 천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마더배리 선교사님보다 일찍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버려진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책상 옆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의 한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의 규모가 크든 작든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사람을 크다 하십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그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일대일 말씀 공부가 귀하고 소수가 모였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단체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 요한은 사도들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이 정통이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었고 단체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사도”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배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분명한 소속감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배타적이 되면 안 됩니다.
또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자기들은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도 아닌데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사람이 편협하게 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도”라는 권위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능력도 없으면서 사도라는 폼만 잡으려고 했습니다. 대개 배타적인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타이틀이나 기득권만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항상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으니 마음을 닫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요한에게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포용하는 마음과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갖 다양한 사람들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큰 자는 넓은 마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화가 머리 끝 까지 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용만 하시면 자신들이 명령하여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 저들을 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탁하면 예수님이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는다고 불로 태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보시며 이들을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할 일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이방인에게 넘기워질 것입니다.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가 힘으로 하면 하늘의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명하여 그들을 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대속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런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원수들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순간 흥분하여 감정과 혈기대로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전도하고 섬긴다는 의로운 심정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교만하게 나오니까 분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으로 의를 세울 수 없고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그렇게 원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혈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섬겨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함으로 동역을 하며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맡은 바 사명에 충성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쭈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서기관이었다고 말해줍니다(마8:19). 당시 서기관은 학식과 재력이 있고, 권력을 가진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제자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일평생 예수님을 따르며 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무엇입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여우의 굴과 새의 집에서는 새끼들을 기르고 세력을 키우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자기 세력을 키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큰 세력을 가지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었는지 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분으로 알고 따르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서기관의 삶이 너무 위선적이고 거짓된 삶이라 보다 더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답고 고상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발적으로 제자의 길을 걷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아주 칭찬받을 만한 제안이요,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부정적인 면을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은 좀 더 기도하고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신중한 결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과 아픔이 어떠한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다 계산해 본 연후에, 그래도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서면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는 고통과 아픔도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다가 명예도 잃을 수 있고, 물질의 손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고독해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너무 겁을 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 그 결단을 축복하시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큰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례식은 인륜지대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를 치르는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일, 할례를 시행하는 일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장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급하기에 사람의 일보다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레위인을 축복하는 내용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33:9-10).” 나실인은 비록 부모가 별세한 경우라도 그 시체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민 6:6-8).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지 인륜과 세속적인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가정에 대한 의무와 더 나아가서 사회에 대한 의무를 기피하라는 교훈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석하는 그 자체가 죄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 모임과 교제 모임 등에 이리 저리 시간을 빼앗겨 버리고, 제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될 명백한 의무를 저버린다면 죄 없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요, 제자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자기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가족에 대한 연민과 염려가 많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러 집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 울고 불며 제발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자고 붙잡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정에 발목이 묶여버릴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는 사람은 인간적인 정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밭가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집에 있는 가족들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밭고랑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밭고랑을 똑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삐뚤 삐뚤 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 합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생각,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꿈과 이상, 마지막 남은 세상에 대한 미련, 사람들에 대한 정과 욕심, 이런 것들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폭적으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하는데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어리고 연약한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자는 단체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온전히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정받는 제자가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9:46-62
요절 | 누가복음 9: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을 드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 같이 연약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후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더 민감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왕이 되시면 논공행상을 벌일 것인데 누가 국무총리가 되고 누가 경제 장관이 되고 누가 교육부 장관이 될 것인가 하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논쟁하였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은 김칫국을 먼저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서로 누가 크냐고 투쟁을 하게 되면 정치적이 되고 분열되기 쉽습니다. 보통 누가 크냐고 할 때 누가 예수님 가까이 있고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어린 아이는 연약하고 섬김이 많이 필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사람 숫자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또 어린 아이는 허물이 많고 실수도 잘 합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 있으려면 대접을 받고자 하기보다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고 높고 영광스러운 곳에 있기보다 낮고 천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마더배리 선교사님보다 일찍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버려진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책상 옆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의 한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의 규모가 크든 작든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사람을 크다 하십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그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일대일 말씀 공부가 귀하고 소수가 모였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단체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 요한은 사도들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이 정통이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었고 단체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사도”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배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분명한 소속감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배타적이 되면 안 됩니다.
또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자기들은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도 아닌데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사람이 편협하게 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도”라는 권위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능력도 없으면서 사도라는 폼만 잡으려고 했습니다. 대개 배타적인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타이틀이나 기득권만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항상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으니 마음을 닫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요한에게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포용하는 마음과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갖 다양한 사람들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큰 자는 넓은 마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화가 머리 끝 까지 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용만 하시면 자신들이 명령하여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 저들을 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탁하면 예수님이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는다고 불로 태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보시며 이들을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할 일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이방인에게 넘기워질 것입니다.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가 힘으로 하면 하늘의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명하여 그들을 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대속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런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원수들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순간 흥분하여 감정과 혈기대로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전도하고 섬긴다는 의로운 심정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교만하게 나오니까 분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으로 의를 세울 수 없고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그렇게 원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혈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섬겨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함으로 동역을 하며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맡은 바 사명에 충성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쭈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서기관이었다고 말해줍니다(마8:19). 당시 서기관은 학식과 재력이 있고, 권력을 가진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제자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일평생 예수님을 따르며 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무엇입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여우의 굴과 새의 집에서는 새끼들을 기르고 세력을 키우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자기 세력을 키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큰 세력을 가지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었는지 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분으로 알고 따르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서기관의 삶이 너무 위선적이고 거짓된 삶이라 보다 더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답고 고상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발적으로 제자의 길을 걷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아주 칭찬받을 만한 제안이요,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부정적인 면을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은 좀 더 기도하고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신중한 결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과 아픔이 어떠한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다 계산해 본 연후에, 그래도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서면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는 고통과 아픔도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다가 명예도 잃을 수 있고, 물질의 손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고독해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너무 겁을 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 그 결단을 축복하시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큰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례식은 인륜지대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를 치르는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일, 할례를 시행하는 일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장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급하기에 사람의 일보다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레위인을 축복하는 내용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33:9-10).” 나실인은 비록 부모가 별세한 경우라도 그 시체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민 6:6-8).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지 인륜과 세속적인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가정에 대한 의무와 더 나아가서 사회에 대한 의무를 기피하라는 교훈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석하는 그 자체가 죄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 모임과 교제 모임 등에 이리 저리 시간을 빼앗겨 버리고, 제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될 명백한 의무를 저버린다면 죄 없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요, 제자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자기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가족에 대한 연민과 염려가 많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러 집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 울고 불며 제발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자고 붙잡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정에 발목이 묶여버릴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는 사람은 인간적인 정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밭가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집에 있는 가족들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밭고랑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밭고랑을 똑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삐뚤 삐뚤 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 합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생각,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꿈과 이상, 마지막 남은 세상에 대한 미련, 사람들에 대한 정과 욕심, 이런 것들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폭적으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하는데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어리고 연약한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자는 단체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온전히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정받는 제자가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