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16강(9:18-36) 하나님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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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을 주사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고난과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과 동고동락 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자신의 삶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자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지, 왜 제자가 고난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18-27).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지만 특별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예수님을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질문으로서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보고 듣고 만져보고 체험한 것에 기초해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역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삼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며, 죄 사함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도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과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9,10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또 이런 신앙 고백을 통해서 구주와 죄인으로서 분명한 관계를 맺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현재 나의 고백이 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가고 또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고 충성하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가 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건지신 구원자로서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또 하나님을 계시한 분으로서 그의 말씀을 계속 경청하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며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인생 문제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신처럼 숭배합니다. 돈의 위력 앞에 많은 사람들이 굴복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21).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는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말이 퍼지게 될 경우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메시아 구원사역에 지장이 초래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인자는 누구입니까?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다니엘서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왕들의 모습이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왕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탐욕스럽습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는 사람 같은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서 인자하게 백성들을 구원하고 다스립니다. 그리스도는 세속의 왕들과 다른 성품과 통치 방법을 가지신 왕이십니다.
그 왕이 왜 버림을 받고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까요? 버림받는다는 말은 무가치하고 쓸모없게 여겨져서 버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또는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습니다. 장로의 전통, 성전의 제사, 율법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삼요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로들의 식사할 때에 손을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니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 조문을 새롭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런 도전에 대해서 그들이 받아들이던지 내치던지 해야 하는데 그들은 내쳐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통과 율법, 성전 숭배 등으로 굳어버리고 타락한 세상을 바꾸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기존 세력과의 강력한 충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 충돌 속에서 자신은 밀리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물리적인 힘으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합니다. 죄로 인한 저주를 한 몸에 받기 위해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며 죽으실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속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항 없이 죽으십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의 참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죄가 없는 분이지만 아무 변명없이 죄인이 되셨고 죄의 삯인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당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의미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에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실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십니다.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이 따른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할 때의 자기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자아입니다.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원하는데 그것은 자기 부인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셨을 때 축복에 젖어 있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 타락하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축복의 덫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 목적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욕심을 부인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최대 원수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탐심을 부인해야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됩니다. 술을 절제하지 못하여 술에 중독이 되고, 소비를 절제하지 못하여 부채의 저주에 빠지게 됩니다. 일을 절제하지 못하여 일중독에 빠지고 일찍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쉼을 누리려면 일하고 싶은 욕심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창조적이고 의욕적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손을 씻어야 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마음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을 내가 곧 길이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속마음보다는 겉모습만 따르기 쉽습니다. 섬기는 종의 삶을 가르치면서 군림하기 쉽습니다. 즉 종님이 되어 살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비움, 자기 비하,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기희생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하신 사랑, 그의 겸손, 그의 온유와 오래 참으심을 맛보았으면 그의 길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각자 감당해야 할 고난들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의 십자가, 소감쓰기의 십자가, 일대일의 십자가, 전도의 십자가, 섬김의 십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십자가 등 각자가 져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를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빌1:29).” 누군가가 해야 할 것이면 내가 하고, 어차피 할 것이면 지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매이지 말고 그것을 나누어 주면서 더 큰 복, 진정한 복을 받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복들은 다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목숨은 생명이고 인생 전체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의미와 가치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받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죽기 살기로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하고도 폭음을 절제하지 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무슨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말씀하십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면 바보같이 여깁니다. 유럽에서는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이 많고 말씀대로 살면 율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산다면 그날에 주님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알아보시고 반겨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 제자가 팔일 후 변화산의 영광을 보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둘째,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28-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광채가 났다’는 헬라어는 ‘번개처럼 번쩍이다, 빛나다’는 뜻입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처럼 강력하게 빛나는 광채를 발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빛 자체이신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또는 부활의 몸을 입으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 이 말씀대로 예수님에게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베드로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꾸짖으며 만류했고 그러다가 사탄이라는 꾸지람도 받았습니다.(16:22,23)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침울하고 걱정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의 그런 힘든 마음을 우리 각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내가 연약해지고 힘들 때면 정말 부담스럽고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 후에 있을 부활과 승천을 생각하시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뒤에 있을 승리와 영광을 생각할 때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영광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변화산 영광의 체험은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벧후1:16,17에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후서에는 산소망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은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초막은 임시 거처인데 거기에다가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거처하도록 하겠다는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은 자기 부인, 고난, 죽음, 십자가 이런 것은 심히 부담스럽고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같은 영광 가운데 있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 같이 34,35절을 읽겠습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그 권세와 능력이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그 나라의 영광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내게 맡기신 길을 묵묵히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받은 바 은혜에 기초해서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르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감사 찬송합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고난의 날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고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성프란시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열망하였고 그 몸에 십자가의 상흔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상흔을 받고 이를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을 주사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고난과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과 동고동락 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자신의 삶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자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지, 왜 제자가 고난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18-27).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지만 특별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예수님을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질문으로서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보고 듣고 만져보고 체험한 것에 기초해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역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삼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며, 죄 사함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도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과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9,10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또 이런 신앙 고백을 통해서 구주와 죄인으로서 분명한 관계를 맺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현재 나의 고백이 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가고 또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고 충성하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가 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건지신 구원자로서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또 하나님을 계시한 분으로서 그의 말씀을 계속 경청하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며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인생 문제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신처럼 숭배합니다. 돈의 위력 앞에 많은 사람들이 굴복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21).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는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말이 퍼지게 될 경우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메시아 구원사역에 지장이 초래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인자는 누구입니까?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다니엘서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왕들의 모습이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왕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탐욕스럽습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는 사람 같은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서 인자하게 백성들을 구원하고 다스립니다. 그리스도는 세속의 왕들과 다른 성품과 통치 방법을 가지신 왕이십니다.
그 왕이 왜 버림을 받고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까요? 버림받는다는 말은 무가치하고 쓸모없게 여겨져서 버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또는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습니다. 장로의 전통, 성전의 제사, 율법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삼요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로들의 식사할 때에 손을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니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 조문을 새롭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런 도전에 대해서 그들이 받아들이던지 내치던지 해야 하는데 그들은 내쳐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통과 율법, 성전 숭배 등으로 굳어버리고 타락한 세상을 바꾸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기존 세력과의 강력한 충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 충돌 속에서 자신은 밀리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물리적인 힘으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합니다. 죄로 인한 저주를 한 몸에 받기 위해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며 죽으실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속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항 없이 죽으십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의 참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죄가 없는 분이지만 아무 변명없이 죄인이 되셨고 죄의 삯인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당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의미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에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실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십니다.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이 따른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할 때의 자기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자아입니다.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원하는데 그것은 자기 부인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셨을 때 축복에 젖어 있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 타락하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축복의 덫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 목적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욕심을 부인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최대 원수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탐심을 부인해야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됩니다. 술을 절제하지 못하여 술에 중독이 되고, 소비를 절제하지 못하여 부채의 저주에 빠지게 됩니다. 일을 절제하지 못하여 일중독에 빠지고 일찍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쉼을 누리려면 일하고 싶은 욕심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창조적이고 의욕적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손을 씻어야 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마음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을 내가 곧 길이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속마음보다는 겉모습만 따르기 쉽습니다. 섬기는 종의 삶을 가르치면서 군림하기 쉽습니다. 즉 종님이 되어 살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비움, 자기 비하,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기희생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하신 사랑, 그의 겸손, 그의 온유와 오래 참으심을 맛보았으면 그의 길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각자 감당해야 할 고난들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의 십자가, 소감쓰기의 십자가, 일대일의 십자가, 전도의 십자가, 섬김의 십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십자가 등 각자가 져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를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빌1:29).” 누군가가 해야 할 것이면 내가 하고, 어차피 할 것이면 지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매이지 말고 그것을 나누어 주면서 더 큰 복, 진정한 복을 받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복들은 다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목숨은 생명이고 인생 전체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의미와 가치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받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죽기 살기로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하고도 폭음을 절제하지 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무슨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말씀하십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면 바보같이 여깁니다. 유럽에서는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이 많고 말씀대로 살면 율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산다면 그날에 주님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알아보시고 반겨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 제자가 팔일 후 변화산의 영광을 보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둘째,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28-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광채가 났다’는 헬라어는 ‘번개처럼 번쩍이다, 빛나다’는 뜻입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처럼 강력하게 빛나는 광채를 발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빛 자체이신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또는 부활의 몸을 입으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 이 말씀대로 예수님에게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베드로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꾸짖으며 만류했고 그러다가 사탄이라는 꾸지람도 받았습니다.(16:22,23)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침울하고 걱정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의 그런 힘든 마음을 우리 각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내가 연약해지고 힘들 때면 정말 부담스럽고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 후에 있을 부활과 승천을 생각하시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뒤에 있을 승리와 영광을 생각할 때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영광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변화산 영광의 체험은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벧후1:16,17에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후서에는 산소망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은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초막은 임시 거처인데 거기에다가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거처하도록 하겠다는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은 자기 부인, 고난, 죽음, 십자가 이런 것은 심히 부담스럽고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같은 영광 가운데 있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 같이 34,35절을 읽겠습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그 권세와 능력이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그 나라의 영광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내게 맡기신 길을 묵묵히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받은 바 은혜에 기초해서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르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감사 찬송합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고난의 날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고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성프란시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열망하였고 그 몸에 십자가의 상흔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상흔을 받고 이를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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