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15강(9:1-1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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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5 강
말씀 | 누가복음 9:1-17
요절 | 누가복음 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사도들을 훈련하십니다. 사도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사역을 보고 배웠습니다. 이론을 배운 다음에는 실전연습을 통해서 자기 몸에 익숙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론을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는 실전이 약하기 때문에 성과가 없는 것입니다. 실전이 약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집니다. 아무리 태권도를 열심히 배워도 강도를 만났을 때 싸워서 이겨야지 폼만 잡고 싸우지를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론가들이 아니라 복음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키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 훈련을 시키고 배고픈 오천 명을 앞에 두고 먹이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이후에 제자들은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훈련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겸손히 주님의 일을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전도 훈련(1-9).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런 능력과 권위를 주신 목적은 그들이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돕고자 할 때 전도를 하여 일대일 양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그들의 실제 문제를 알고 돕고자 한다면 자세가 많이 바뀔 것입니다. 요즈음은 캠퍼스에 올라가서 불쑥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걸면 적대감을 보입니다. 학생들은 전도를 하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도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동아리 박람회를 둘러보고 관심을 보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돕고 있습니다. 또 바이블 까페에 초청하여 말씀과 함께 선배들의 진로 상담을 받고 교제하며 신뢰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일대일 성경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가도록 양육합니다. 식사 교제, 영어그룹 바이블 스터디, 운동도 관계성을 맺는데 좋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며 여러 모양으로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도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먹을 것이 필요한 자들에게 먹을 것도 주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양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은 친구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좋은 친구요 성경 선생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시도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데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된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나는 가운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관계가 맺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시대를 탓하며 뒤로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말씀을 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돕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수적인 일들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일하도록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 머물라는 것은 그 집안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지 말고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과 깊이 사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의 문제를 파악하게 되고 도와 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팀을 나누어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그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야 합니다(5). 복음 전도자가 사람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생각하며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사람에게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의 문제지 제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서 당당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이리 속에 들어가면 당연히 물리고 찢기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십니다. 그들이 연약해도 실제 훈련을 통해 더 배우고 강해질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양들이 부족해도 예수님처럼 실제 캠퍼스 전도 훈련을 보내야 합니다. 외국 대학에 가서도 외국어로 전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전도하면서 전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전도하다 보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배척을 받더라도 이런 고난을 통해서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지혜롭게 말하는지 깨닫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또한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행1:8). 한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말도 더듬고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있어도 몇 마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교지에 나아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하며 담대하게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어로 주일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립하는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이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권위로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는 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헤롯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불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강포한 왕이었지만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는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로 인해서 헤롯의 마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제자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둘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0-17).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여섯 팀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여섯 팀이 복음을 얼마나 열심히 전했는지 헤롯 왕이 심히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섯 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총장님이 놀라서 이 대학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목자님들이 전도를 힘써 하면 캠퍼스에 금방 소문이 퍼집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교단체들이 너무나 열심을 내어 전도했을 때 학교에서 전도 금지령을 내리고 학생과에 신고하라는 플랭카드도 걸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핍박에 위축되지 말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바쁘고 힘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캠퍼스에 올라가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하여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명하니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아멘으로 영접하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 역사에 쓰시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에 큰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한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습니다. 벳새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만의 수양회를 기대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리가 알고 따라왔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남자만 오천 명이니 약 만 명 이상이 모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쉼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몰려오는 양들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너무 피곤하면 양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을 만나 말씀을 전하고 교제하면 더욱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재미있고 끝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세상 짐과 염려로 마음이 눌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자 평강과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쫙 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길어지고 배가 고프면 듣기가 힘들어 집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배가 쪼르륵 쪼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 이제 말씀을 마치고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현재 있는 곳은 빈 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지금 보낸다고 해도 가다가 기진할 것입니다. 또 이 많은 무리를 한꺼번에 먹일 만한 음식점도 없었고 그 만한 음식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불가능한 현실을 보고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개인이 강조되어 나오는데 비해서 본문은 열두 사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리더들입니다. 무리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입니다.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책임을 지라고 하십니다. 양무리들의 목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리더가 책임을 회피하면 0으로 남지만 내가 책임을 지면 하나가 있게 되고 거기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나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책임의식을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에게 책임을 지우되 큰 책임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방법이 한계를 높이 잡는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의 몇 백배의 높이로 뛸 수가 있습니다. 그 높이가 33센티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컵 위에 유리를 막아놓으면 그 높이에 맞춘다고 합니다. 더 이상 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울 때 한계로 정한 유리 천장을 깨도록 격려하고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무리에게 목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무리에게 심정을 갖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슴이 뛰는 큰 문제로 도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듣자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오병이어 외에 더 없을까요? 예수님이 볼 때는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빼놓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과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병자도 고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천 명을 먹이는 문제 앞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을 한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며 우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어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보행자가 60만명인데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며 불신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말씀하시고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공급하심을 때마다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승부를 하려고 하니 힘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말씀과 사랑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어렸지만 위로부터 지혜를 공급 받아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는 감사기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셨습니다. 그것은 작지만 역사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아서 무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오천 명이 푸른 풀밭에 앉아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다 배불리 먹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자들은 그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실제 먹이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목자이십니다. 빈들의 오병이어 사건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광야 만나 사건의 진정한 성취를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만나는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캠퍼스 양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캠퍼스 양들은 사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밥을 사 주어도 과거처럼 감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에 기갈이 들리고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내가 배운 말씀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양무리를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 굶주려 있는 학생들 앞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과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영혼들을 먹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9:1-17
요절 | 누가복음 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사도들을 훈련하십니다. 사도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사역을 보고 배웠습니다. 이론을 배운 다음에는 실전연습을 통해서 자기 몸에 익숙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론을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는 실전이 약하기 때문에 성과가 없는 것입니다. 실전이 약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집니다. 아무리 태권도를 열심히 배워도 강도를 만났을 때 싸워서 이겨야지 폼만 잡고 싸우지를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론가들이 아니라 복음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키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 훈련을 시키고 배고픈 오천 명을 앞에 두고 먹이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이후에 제자들은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훈련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겸손히 주님의 일을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전도 훈련(1-9).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런 능력과 권위를 주신 목적은 그들이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돕고자 할 때 전도를 하여 일대일 양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그들의 실제 문제를 알고 돕고자 한다면 자세가 많이 바뀔 것입니다. 요즈음은 캠퍼스에 올라가서 불쑥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걸면 적대감을 보입니다. 학생들은 전도를 하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도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동아리 박람회를 둘러보고 관심을 보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돕고 있습니다. 또 바이블 까페에 초청하여 말씀과 함께 선배들의 진로 상담을 받고 교제하며 신뢰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일대일 성경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가도록 양육합니다. 식사 교제, 영어그룹 바이블 스터디, 운동도 관계성을 맺는데 좋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며 여러 모양으로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도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먹을 것이 필요한 자들에게 먹을 것도 주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양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은 친구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좋은 친구요 성경 선생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시도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데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된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나는 가운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관계가 맺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시대를 탓하며 뒤로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말씀을 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돕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수적인 일들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일하도록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 머물라는 것은 그 집안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지 말고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과 깊이 사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의 문제를 파악하게 되고 도와 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팀을 나누어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그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야 합니다(5). 복음 전도자가 사람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생각하며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사람에게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의 문제지 제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서 당당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이리 속에 들어가면 당연히 물리고 찢기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십니다. 그들이 연약해도 실제 훈련을 통해 더 배우고 강해질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양들이 부족해도 예수님처럼 실제 캠퍼스 전도 훈련을 보내야 합니다. 외국 대학에 가서도 외국어로 전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전도하면서 전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전도하다 보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배척을 받더라도 이런 고난을 통해서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지혜롭게 말하는지 깨닫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또한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행1:8). 한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말도 더듬고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있어도 몇 마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교지에 나아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하며 담대하게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어로 주일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립하는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이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권위로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는 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헤롯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불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강포한 왕이었지만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는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로 인해서 헤롯의 마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제자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둘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0-17).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여섯 팀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여섯 팀이 복음을 얼마나 열심히 전했는지 헤롯 왕이 심히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섯 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총장님이 놀라서 이 대학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목자님들이 전도를 힘써 하면 캠퍼스에 금방 소문이 퍼집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교단체들이 너무나 열심을 내어 전도했을 때 학교에서 전도 금지령을 내리고 학생과에 신고하라는 플랭카드도 걸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핍박에 위축되지 말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바쁘고 힘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캠퍼스에 올라가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하여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명하니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아멘으로 영접하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 역사에 쓰시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에 큰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한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습니다. 벳새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만의 수양회를 기대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리가 알고 따라왔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남자만 오천 명이니 약 만 명 이상이 모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쉼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몰려오는 양들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너무 피곤하면 양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을 만나 말씀을 전하고 교제하면 더욱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재미있고 끝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세상 짐과 염려로 마음이 눌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자 평강과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쫙 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길어지고 배가 고프면 듣기가 힘들어 집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배가 쪼르륵 쪼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 이제 말씀을 마치고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현재 있는 곳은 빈 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지금 보낸다고 해도 가다가 기진할 것입니다. 또 이 많은 무리를 한꺼번에 먹일 만한 음식점도 없었고 그 만한 음식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불가능한 현실을 보고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개인이 강조되어 나오는데 비해서 본문은 열두 사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리더들입니다. 무리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입니다.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책임을 지라고 하십니다. 양무리들의 목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리더가 책임을 회피하면 0으로 남지만 내가 책임을 지면 하나가 있게 되고 거기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나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책임의식을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에게 책임을 지우되 큰 책임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방법이 한계를 높이 잡는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의 몇 백배의 높이로 뛸 수가 있습니다. 그 높이가 33센티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컵 위에 유리를 막아놓으면 그 높이에 맞춘다고 합니다. 더 이상 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울 때 한계로 정한 유리 천장을 깨도록 격려하고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무리에게 목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무리에게 심정을 갖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슴이 뛰는 큰 문제로 도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듣자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오병이어 외에 더 없을까요? 예수님이 볼 때는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빼놓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과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병자도 고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천 명을 먹이는 문제 앞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을 한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며 우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어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보행자가 60만명인데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며 불신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말씀하시고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공급하심을 때마다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승부를 하려고 하니 힘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말씀과 사랑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어렸지만 위로부터 지혜를 공급 받아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는 감사기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셨습니다. 그것은 작지만 역사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아서 무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오천 명이 푸른 풀밭에 앉아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다 배불리 먹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자들은 그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실제 먹이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목자이십니다. 빈들의 오병이어 사건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광야 만나 사건의 진정한 성취를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만나는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캠퍼스 양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캠퍼스 양들은 사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밥을 사 주어도 과거처럼 감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에 기갈이 들리고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내가 배운 말씀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양무리를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 굶주려 있는 학생들 앞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과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 영혼들을 먹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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