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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14강(8:40-5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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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7회 작성일 17-05-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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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4 강
말씀 | 누가복음 8:40-56
요절 | 누가복음 8:50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박한 인생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하고 죽음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물질 문제와 인간관계로 인해서 힘들어 합니다. 우리에게 물질 문제와 인간관계의 갈등, 질병과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은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죽어가는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회당장 야이로와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과 치료의 은혜를 덧입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광풍을 만나서 잠잠하게 하시고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를 온전하게 하시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호수 저편에서 돌아오심을 환영했습니다. 이는 다 기다렸음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 중에 회당장 야이로가 있었습니다. 회당장에게는 열 두 살 된 사랑하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딸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포옹을 하면 생명 비타민을 먹은 것 같이 모든 피로가 사라졌습니다. 딸의 애교와 성장은 그의 삶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던 딸이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더니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딸을 더 이상 볼 수 없던 그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지난 밤은 광풍이 불면서 비가 억수로 쏟아졌습니다. 날이 밝자 그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는데 그가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숨 가쁘게 달렸습니다. 그가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간구했습니다. “예수님, 열 두 살 된 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제 딸을 살려 주옵소서.” 그는 회당장의 지위나 체면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딸만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말을 듣고 그 집으로 가시는데 무리가 밀려들었습니다.

  밀려드는 무리 틈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재산만 탕진하고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짧게 기록했지만 마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는 것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고 설명합니다(5:26). 아무래도 의사인 누가는 자기의 한계를 잘 알았기 때문에 의사 편에서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마가는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12년을 병으로 앓고 있었으니 참으로 오랜 시간입니다. 병이 호전되지 않으니 몸도 더욱 야위어 가고 회복에 대한 희망도 희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 부인병입니다. 그로 인해 빈혈이 생기고 어지럼증이 빈번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앉던 의자나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과 만남을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도 오랜 투병 생활과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외로웠습니다. 그녀는 행복한 결혼 생활도 꿈꿀 수 없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깨끗해지고 싶었지만 아무도 여자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오셔서 각종 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심지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도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자신의 병도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자신이 만지는 것마다 부정해지고 또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생각해 낸 방법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면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 무리들이 밀치는 중에도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피의 흐름이 즉시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뒤로 왔고 그의 옷 가에 손만 댔습니다. 그런데도 나았습니다. 본문은 여인과 야이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손만 옷 가에 대었는데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다양하게 자기 방식대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인은 사회적인 신분과 부정함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의 뒤로 나아가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뒤로 간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게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야이로의 딸이 부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아버지를 두지 못한 것이 슬펐습니다. 아버지도 그녀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면  뒤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른 손이 안 되면 왼 손으로 하면 되고,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됩니다. 누가복음은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하는 여자의 의도(마8:21)를 생략하고 옷 가에 손을 댄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율법에 금지된 행동이었습니다(레15:19).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여자를 정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정죄하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여자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창조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과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을 때 그녀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고, 부정한 여인이지만 이런 것을 운명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각색 병자들을 일일이 만져주어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예수님의 옷 가에만 손을 대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백부장은 사랑하는 하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사람들이 많아 나아갈 수 없었지만 지붕을 뚫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지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그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결국 믿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믿음으로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그의 몸에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45,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예수님은 믿음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밀치는 중에도 믿음으로 손을 댄 자가 있었고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여자는 치유를 받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여자를 찾으신 것은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이 여자를 온전하게 도와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여인의 온 몸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과 외로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 물결치듯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 예수님은 “딸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를 찾는 예수님이 검사처럼 느껴졌던 데서 딸이라고 불러주시니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능력을 가져간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딸아” 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한 마디에 여인의 외로움, 상처, 슬픔이 다 녹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딸의 아픔을 다 아시고 달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이 여인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흐르던 피가 멈추고 온 몸에 피가 돌면서 여인은 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의욕이 넘쳤습니다. 피가 흘러 나가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피곤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보충이 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욕도 상실하게됩니다. 그런데 이제 여인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평안해졌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육신의 병이 고침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계성의 병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자신을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슬픔과 외로움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여자를 한 가족으로 맞아주심으로 사랑받지 못해 병든 마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평강의 왕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치료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서 평안이 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니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나이가 좀 들었지만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복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한 인생을 온전히 회복해 주십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넘치는 축복의 선물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주님은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를 구원해 주신 것인데, 왜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이 자기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실까요? 믿음이 예수님이 일하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한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와 옷을 만질 생각도 못하고 슬픔과 체념 속에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많은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 나와 옷을 만졌습니다. 믿음이 여자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믿음을 얼마나 기뻐하고 축복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학사수양회에서 대표소감을 발표한 광주3부 박치영 목자님은 내과 전공의 시절 힘든 환자를 만났습니다. C형 간염으로 입원한 환자가 발치 후에 구강에서 계속 출혈이 있었습니다. 지혈을 시키기 위해 머리를 붕대로 감아놓고 별의별 약을 다 써도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혈이 안 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들은 의사들을 원망했습니다. “멀쩡한 사람 걸어 들어왔는데 죽어나가게 생겼네.” 치영목자님은 막무가내로 대드는 보호자들과 말싸움하다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이때 치영 목자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전문의도 되기 전에 여기서 의사 생명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방에 들어와서 드러누워 있는데 먼지 쌓인 성경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한 손 마른 자, 혈루증 앓는 여인 등 각종 병든 자를 치료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술로는 환자를 지혈시킬 수 없지만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보호자들에게 혈기 부린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서 환자를 고쳐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기도한 후에 보호자들을 찾아가서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병실에 가 보니, 신기하게도 환자가 지혈이 되어서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얼마 후 퇴원했고, 보호자들은 고맙다며, 양말까지 선물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 믿음의 체험을 기초로 술도 마시지 않고자 결단했습니다. 교수님, 선배들이 무서워서 마지못해 마시던 술을 담대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캠퍼스 미션을 위해 대학병원에 남도록 기도하자, 신기하게 갑자기 혈액내과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그 후에 내과교수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하늘만이 안다”는 교수자리를 신기하게 얻고, 지금은 조대병원 내과과장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시도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환자가 지혈이 안 될 때 성경책을 펴서 읽고 기도하는 것. 별 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수 자리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작은 믿음의 시도를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둘째,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49절을 보십시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야이로 편에서 생각해 보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나음을 받고 간증을 하던 모습을 보는 것은 은혜가 되면서도 애간장이 타게 하였습니다. 빨리 끝낼 것이지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은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이 길어지는 것을 보고 안절부절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할 능력이 없는데 해 달라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고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계속 매달리는 것은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는 거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50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야이로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개 사람들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는 소망을 갖지만 목숨이 끊어지면 포기합니다. 야이로가 포기했으면 ‘포기하지 마’ 라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포기는 하지 않는데 정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아도 잘 될까? 여기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딸이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또 다른 두려움은 예수님을 믿었는데 믿음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함께 왔는데 상황이 최악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죽음 앞에서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으신가? 지금까지 믿음을 지킨 것이 물거품이 된다면 앞으로도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 결국 예수님을 영영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두려움은 믿음을 잃고 예수님과 이별할 위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도전하고 애를 썼는데 결과가 나쁘면 지금까지 믿음의 노력이 물거품이고 헛수고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다시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원망스럽고 떠나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과 싸워 주십니다.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사탄이 역사합니다. “신앙생활 해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결국은 네가 알아서 해야 돼.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고? 웃기지마. 인생은 단 한 번 뿐인데 망하고 나서 도대체 누구를 원망할래? 네 인생의 주인은 바로 너야 너 스스로를 믿고 살아야 해.” 이런 말은 호소력이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갑니다. 월평균 150-200만원의 급여를 받고 학자금 대출 받은 것 갚으면 통장은 ‘텅장’이 됩니다. 결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청년들이 대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에 5-10년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 결혼, 출산의 기회는 줄어듭니다. 이런 현실과 사람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기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과 반대입니다. 계시록 21:8절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자들에 대한 목록이 나옵니다. 두 번째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고 첫 번째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두려움은 거대한 세력입니다. 두려움이 들면 마음이 짓눌리고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 놓아 버리고 무기력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 절망, 슬픔과 싸워 주십니다. 인간이 절망할 때, 끝났다고 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직 믿으라. 당황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 편에서 보면 나만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는 이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외아들이었습니다. 자기 딸은 외동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딸이 살아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혈루증 여인에게 주셨던 말씀과 같은 말씀을 야이로에게 주셨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의 경우는 아버지의 믿음이 딸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믿기만 하라’ 말씀하신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지금까지 지켜왔던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스펙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믿음을 문제 해결의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나야 할까요?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과 결과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께 둔 소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죽음 앞에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내가 죽음보다 크고 강하다.’는 약속입니다. 야이로에게 딸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죽은 딸이 생명을 얻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넘치도록, 초월적인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절망적인 상황들은 무엇입니까? 불행으로 보이는 질병과 사고와 죽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양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불신하며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따랐는데 결과가 안 좋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어도 안 되는 한계 앞에 서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문제보다 크고 죽음보다 강한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을 기뻐하며 믿음의 사람을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보이는 현실과 나타나는 결과보다 더 복잡하고 신비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가져오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죽더라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이르셨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세 제자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기적의 현장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좋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기적 체험이 아니라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통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는 것이라면 울고 통곡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었는데 잔다고 하실까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죽은 자를 깨워 살리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54,5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사람을 모두 살리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딸도 결국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이심을 보여줍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 중 죽음이 최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보다 강하십니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심각한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듯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탄이 쏘는 독화살입니다. 믿음으로 이런 독화살을 막고 구원을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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