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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12강(7:36-50) 죄 사함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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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5회 작성일 17-05-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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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2 강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죄 사함과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 전국 학사 목자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수양회가 짧았지만 풍성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유사무엘 선교사님의 강의가 우리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나온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2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였습니다. 환자를 살릴 의약품이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를 보면서 속수무책으로 있었습니다. 자기의 딸 주은이가 병들어 숨을 몰아쉬다가 멈추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산소호흡기가 없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딸이 나음을 받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의 아픔을 나누면서 우간대 대학생들을 올바로 가르쳐 그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그들로 인해 사회가 변화되는 소망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병원을 설립하고 의과대학에서 가르쳐습니다. 그로 인해서 2000명의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그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향유를 부은 여인과 닮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를 온 힘을 다해서 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인이 어떻게 이런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비밀을 알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식사를 할 때 머리를 식탁 근처로 향한 채 의자에 기대고 한 쪽 팔꿈치로 하중을 받치고 발은 뒤로 뻗는 자세를 취합니다. 손님이 식탁에 앉기 전에 종들이 와서 발을 씻어주는 것이 풍습입니다. 예수님이 식탁에 앉기 전에 종이 와서 발을 씻지 않고 예상치 않는 한 여인이 와서 특이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했는데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그녀를 부정한 죄를 지은 여인으로 봅니다. 이런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온 것 자체가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공적인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이 거기 계신 것을 알고 들어왔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는 물대신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여인이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흘려내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털을 풀어 예수님의 젖은 발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은 발이 간지러웠을 것이지만 참으셨습니다. 여인은 발을 닦은 후에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까지도 파격적인데 이제는 향유 옥합을 기울여 그 발에 부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그 집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광경은 너무나 감동적이라 손님들은 그저 입을 벌리고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향유는 머리에 부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발은 종이 씻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종처럼 낮고 천한 자라는 표현이었고 물 대신에 자신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로 발을 씻고 값비싼 향유를 발랐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은 여인의 영광이었고 품위를 상징했습니다. 그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누가 하라고 시켜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열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 눈살을 찌뿌리건 말건, 조롱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향유는 매우 비싸기 때문에 머리에 한 두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향유를 아낌없이 발에 부었습니다. 값비싼 향유는 흘러 내렸습니다. 허비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 대한 여인의 예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감사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수치스러운 죄를 다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한량없이 크기 때문에 나의 것을 주님께 쏟아 부어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진홍같이 붉은 나의 죄를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씻어서 눈같이 희게 해 주셨으니 나의 아까운 옥합이, 나의 진심의 눈물이, 주님께 드려져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의 생각이 어떠하였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여자의 행동이 몹시 못 마땅하였습니다. 그것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님도 판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가 이 여인이 죄인인 줄도 모르는 선지자란 말인가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이 영적, 도덕적으로 무지 내지는 무감각한 분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입니다. 죄인은 분리시켜야 그들의 죄에 다른 사람들이 오염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이런 여인은 멀리 해야만 할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죄와 죄책감을 해결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인이 왜 저렇게 감사하는지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없었습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가지고 판단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같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도 이해되지 않고, 죄인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백성들의 목자로서 죄인을 배척하고 쫓아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문제를 돕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길을 제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들과 같이 판단만 하고 분리만 시킨다면 이 세상에 누가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목자라면” 사람의 문제를 분석하는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든지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선생님 말씀하소서.”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2).”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은 그의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군 하루 품삯입니다. 죄는 빚입니다. 사람들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 빚진 죄인이라고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많이 탕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함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50데나리온 탕감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볼 때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같지만 우리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깊은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할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을 어떤 자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많이 탕감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감사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별로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얼마나 빚을 졌는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에 해당할까요? 나 자신은 과연 얼마나 빚 진 자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주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이 약하다면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사죄의 은혜에 대한 은택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이 내게 뭘 해 주셨는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주님이 내게 별로 해 주신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죄 사함의 깊이가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서도 아무 것도 아니했습니다. 감람유는 그 지방에서는 흔한 기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식용유로 많이 쓰고 있지요?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그저 타인 일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만 세어보고 있으면 마음이 딱딱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세어보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받은 은총을 세어 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에 대한 표현은 말로도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드림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집니다. 주님과 관계가 친밀해 질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나를 위해서 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합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알 때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 생각하는 것까지도 알고 넘치게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힘을 쓸 때 죄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깊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주님의 사랑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많은 죄를 탕감 받은 자임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3-16).” 바울은 이 주님의 은혜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했습니다(고전15:10). 한경직 목사님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 상을 받을 때 자신은 신사참배한 죄인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고 주님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사실 죄는 하나님만이 사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향유가 죄 사함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믿고 나온 그 진심과 순수한 믿음을 주님은 받으시고 일방적으로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 속에 담긴 믿음을 보셨습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943년 어느 가을 맑은 날, 피카소가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버려진 고장 난 자전거 한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버려진 자전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안장과 핸들을 떼버리고 안장에 핸들을 거꾸로 붙이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인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으로서 런던의 경매장에서 293억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습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버려진 고물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고 자전거가 산책하던 화가 피카소를 만나자, 값싼 고물이 아니라 불후의 작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됐습니다. 인생의 만남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버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그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로 빚어 주시고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비천한 죄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왕자요 공주들로 높여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시고 거룩한 백성들로 살게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을 겸손히 발견하고 감격적으로 감사를 표현해야겠습니다. 의인 심정으로 가득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정죄만 하는 바리새인을 통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범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도와주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죄의 크기만 보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크기를 보십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의인으로서 믿음의 비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삽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과거의 죄만 보고 죄책감에 빠져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사죄의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진심을 사랑하고 돌보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또 자기를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남을 돕다 보면 내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주님과의 첫 사랑, 천국의 비밀을 간직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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