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 10강(6:20-49) 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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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0 강
말씀 | 누가복음 6:20-49
요절 | 누가복음 6:47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여 세우시고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자들을 고치고,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과 사역을 함께 하시면서 이제는 제자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일만 잘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에 기초한 비범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또 제자로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복(20-26). 20,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함으로 인해 복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가난합니다. 점심에 먹을 것이 없어서 밀밭에 들어가서 밀 이삭을 훑어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하루 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가난 사람은 의지할만한 돈이 없으니 마음이 겸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없으니 늘 채움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결핍된 것을 채울 능력이 없으니 마음이 낮아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것은 불행이요 사회의 낙오자라는 생각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제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들의 경제 문제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개입해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어서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가난하고, 사람이 없어서 가난하고, 사람을 잘 몰라서 가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개입해서 지혜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해서 필요한 돈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람을 얻게 하십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부족한 것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해 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니 삶이 역동적입니다.
한양센터의 김모세 목자님의 아들 김모세 주니어는 중국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그가 한양대 중문과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첫 번째에 실패하고 재수를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선교사로 살다가 왔기 때문에 그의 한국어 실력과 다른 학과에 지원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한양대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학원에 다녔지만 중국어 에세이를 쓰는 것이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어려웠기 때문에 중간에 집에 오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잘 아는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중국의 화폐에 대해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개혁을 하면서 모택동이 모든 지폐에 나오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지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기 때문에 쉽게 자기 의견을 쓸 수 있었고 합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편을 아시고 놀랍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해서 캠퍼스 복음 역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라는 표현은 23절에 ‘그 날에’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온 제자들은 주린 자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복됩니다. 왜냐하면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린 영혼이기에 그들은 주님 앞에 나아왔고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와 생명으로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답답해서 울 때가 있습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다는 증거입니다. 우는 사람들은 곧 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섬기다가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한계로 인해서 울고 양들의 죄로 인해서 울고 양들이 당하는 아픔으로 인해서 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위로와 기쁨으로 인해 웃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양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복이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진정으로 복된 자입니다. 예수님이 복의 원천이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하며 버릴 때 복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이런 온갖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않으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텐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에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고난과 박해받음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받아왔습니까? 지금도 세상에는 그런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믿으면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박해가 생깁니다. 전도하고자 할 때 욕을 당하고 무시와 배척을 받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캠퍼스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배척당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당하는 우리가 진정 복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먹고 버림당했으면 기뻐하고 뛰놀아야 합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자비량하면서 가정 교회 역사를 섬기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덴버의 이요한 선교사님 가정도 가정 교회 사역을 하면서 캠퍼스에 나아가 전도를 하고 자비량을 위해서 사이먼 까페를 운영합니다. 그는 많은 일과 친척들이나 이웃들부터 이해 받지 못함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네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물질의 부요함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경고가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물질적인 부요로 인해서 자만해지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 숭배자가 되는 것이 죄입니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나누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또 지금 배부른 자는 화가 있습니다. 그는 주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애통하며 울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즐김으로 위로를 얻으면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적인 것들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참된 만족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주리고 곤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화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회개하기보다 죄를 합리화시켜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죄인들을 즐겁게 하고 죄를 즐기도록 합니다. 결국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하고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 단계씩 사회가 공의와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자라왔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플 때 새벽을 깨우고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전쟁 후 어려울 때 영적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안정되고 평안할 때 세계 선교를 위해서 힘을 썼고 선교사 파송 2위의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영적인 포만감에 빠지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의와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실패를 모르고, 배고픔을 모르는 자, 배척과 아픔을 당해보지 않고 칭찬만 받는 사람들은 심령이 매우 연약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복음의 감격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가난과 핍박을 싫어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난이 오히려 감동과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해 줍니다. 고난에 숨겨진 축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전심으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합니다. 웃을 일과 슬픈 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자족하기를 배우며 어떻게 행할 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27-36). 원수 같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원수는 미워하고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과 똑같이 그들을 미워하고 복수하고 저주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십니다. 이 뺨을 치면 저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고 말하지 말라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에게 악을 행하면 내가 당한만큼 아니 그 이상 백배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세상의 방식입니다. 남이 내 것을 빼앗고자 할 때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이나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만 피해보고 손해 보는 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앞에 모든 원수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사울의 마음에 금이 가게 되고 결국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알지 못하고 행하는 원수들의 악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비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비범한 사랑을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우리가 성장해야 하고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우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구별된 삶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셋째, 비판하지 말라(37-42). 37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여기서 비판은 재판관이 재판석에 앉아서 판결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사법상으로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은 의롭고 남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짓고 있고 그럴 가능성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반발심만 일으키고 논쟁만 하게 됩니다.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해야 합니다. 말없이 남의 허물을 용서할 때 그것이 형제의 잘못을 마음 깊이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 줄 때 더 많이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주는 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표현은 주는 것입니다. 줄 때 하나님께서 후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십니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잠 11:24,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없는대로 나누는 생활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이 보일 때 용서하고 그 다음에 해야 할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인도한다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을 것입니다. 온전하게 된다는 말은 충분히 훈련을 받아서(fully trained) 성숙하게 된 상태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르치기 위해서 배우지 말고 자신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빼어낼 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발견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성찰에 힘쓸 때 다른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더 큰 허물이 있음을 알 때 겸손한 마음과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며 투쟁하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기에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도 겸손과 사랑의 권면으로 그것을 빼도록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넷째, 나무와 열매(43-49).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압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입으로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입으로 말한 것을 따라서 행동하도록 명령합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가득하면 예수님을 말하게 되고 은혜가 가득하면 은혜로운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믿음의 말이 나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잠4:23). 온갖 더럽고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 18:20,21을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마음에 선한 것을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선한 것이 가득해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내적으로 선한 생각을 쌓아야 합니다. 뇌는 상상하는 것과 실제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상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실제 경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합니다. 탁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심판 날에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고난이나 심판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반대로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면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삶과 윤리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주옥같은 말씀이라도 행하지 아니하면 내 것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할 때 내 안에 보물이 쌓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됩니다. 진리의 참 맛을 보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고 제자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6:20-49
요절 | 누가복음 6:47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여 세우시고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자들을 고치고,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과 사역을 함께 하시면서 이제는 제자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일만 잘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에 기초한 비범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또 제자로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복(20-26). 20,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함으로 인해 복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가난합니다. 점심에 먹을 것이 없어서 밀밭에 들어가서 밀 이삭을 훑어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하루 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가난 사람은 의지할만한 돈이 없으니 마음이 겸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없으니 늘 채움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결핍된 것을 채울 능력이 없으니 마음이 낮아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것은 불행이요 사회의 낙오자라는 생각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제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들의 경제 문제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개입해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어서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가난하고, 사람이 없어서 가난하고, 사람을 잘 몰라서 가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개입해서 지혜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해서 필요한 돈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람을 얻게 하십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부족한 것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해 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니 삶이 역동적입니다.
한양센터의 김모세 목자님의 아들 김모세 주니어는 중국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그가 한양대 중문과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첫 번째에 실패하고 재수를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선교사로 살다가 왔기 때문에 그의 한국어 실력과 다른 학과에 지원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한양대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학원에 다녔지만 중국어 에세이를 쓰는 것이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어려웠기 때문에 중간에 집에 오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잘 아는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중국의 화폐에 대해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개혁을 하면서 모택동이 모든 지폐에 나오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지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기 때문에 쉽게 자기 의견을 쓸 수 있었고 합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편을 아시고 놀랍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해서 캠퍼스 복음 역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라는 표현은 23절에 ‘그 날에’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온 제자들은 주린 자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복됩니다. 왜냐하면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린 영혼이기에 그들은 주님 앞에 나아왔고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와 생명으로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답답해서 울 때가 있습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다는 증거입니다. 우는 사람들은 곧 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섬기다가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한계로 인해서 울고 양들의 죄로 인해서 울고 양들이 당하는 아픔으로 인해서 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위로와 기쁨으로 인해 웃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양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복이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진정으로 복된 자입니다. 예수님이 복의 원천이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하며 버릴 때 복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이런 온갖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않으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텐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에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고난과 박해받음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받아왔습니까? 지금도 세상에는 그런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믿으면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박해가 생깁니다. 전도하고자 할 때 욕을 당하고 무시와 배척을 받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캠퍼스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배척당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당하는 우리가 진정 복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먹고 버림당했으면 기뻐하고 뛰놀아야 합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자비량하면서 가정 교회 역사를 섬기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덴버의 이요한 선교사님 가정도 가정 교회 사역을 하면서 캠퍼스에 나아가 전도를 하고 자비량을 위해서 사이먼 까페를 운영합니다. 그는 많은 일과 친척들이나 이웃들부터 이해 받지 못함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네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물질의 부요함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경고가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물질적인 부요로 인해서 자만해지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 숭배자가 되는 것이 죄입니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나누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또 지금 배부른 자는 화가 있습니다. 그는 주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애통하며 울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즐김으로 위로를 얻으면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적인 것들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참된 만족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주리고 곤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화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회개하기보다 죄를 합리화시켜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죄인들을 즐겁게 하고 죄를 즐기도록 합니다. 결국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하고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 단계씩 사회가 공의와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자라왔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플 때 새벽을 깨우고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전쟁 후 어려울 때 영적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안정되고 평안할 때 세계 선교를 위해서 힘을 썼고 선교사 파송 2위의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영적인 포만감에 빠지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의와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실패를 모르고, 배고픔을 모르는 자, 배척과 아픔을 당해보지 않고 칭찬만 받는 사람들은 심령이 매우 연약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복음의 감격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가난과 핍박을 싫어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난이 오히려 감동과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해 줍니다. 고난에 숨겨진 축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전심으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합니다. 웃을 일과 슬픈 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자족하기를 배우며 어떻게 행할 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27-36). 원수 같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원수는 미워하고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과 똑같이 그들을 미워하고 복수하고 저주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십니다. 이 뺨을 치면 저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고 말하지 말라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에게 악을 행하면 내가 당한만큼 아니 그 이상 백배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세상의 방식입니다. 남이 내 것을 빼앗고자 할 때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이나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만 피해보고 손해 보는 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앞에 모든 원수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사울의 마음에 금이 가게 되고 결국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알지 못하고 행하는 원수들의 악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비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비범한 사랑을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우리가 성장해야 하고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우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구별된 삶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셋째, 비판하지 말라(37-42). 37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여기서 비판은 재판관이 재판석에 앉아서 판결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사법상으로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은 의롭고 남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짓고 있고 그럴 가능성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반발심만 일으키고 논쟁만 하게 됩니다.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해야 합니다. 말없이 남의 허물을 용서할 때 그것이 형제의 잘못을 마음 깊이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 줄 때 더 많이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주는 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표현은 주는 것입니다. 줄 때 하나님께서 후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십니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잠 11:24,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없는대로 나누는 생활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이 보일 때 용서하고 그 다음에 해야 할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인도한다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을 것입니다. 온전하게 된다는 말은 충분히 훈련을 받아서(fully trained) 성숙하게 된 상태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르치기 위해서 배우지 말고 자신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빼어낼 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발견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성찰에 힘쓸 때 다른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더 큰 허물이 있음을 알 때 겸손한 마음과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며 투쟁하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기에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도 겸손과 사랑의 권면으로 그것을 빼도록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넷째, 나무와 열매(43-49).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압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입으로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입으로 말한 것을 따라서 행동하도록 명령합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가득하면 예수님을 말하게 되고 은혜가 가득하면 은혜로운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믿음의 말이 나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잠4:23). 온갖 더럽고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 18:20,21을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마음에 선한 것을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선한 것이 가득해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내적으로 선한 생각을 쌓아야 합니다. 뇌는 상상하는 것과 실제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상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실제 경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합니다. 탁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심판 날에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고난이나 심판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반대로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면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삶과 윤리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주옥같은 말씀이라도 행하지 아니하면 내 것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할 때 내 안에 보물이 쌓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됩니다. 진리의 참 맛을 보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고 제자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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