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9강(6:6-19)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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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9 강
말씀 | 누가복음 6:6-19
요절 | 누가복음 6:13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가 부패하여 진리를 잃어버리고 교회 건축을 위해서 돈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일어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는 개혁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한기총과 한교연이 교권주의와 이단 문제로 갈라서고 연합을 하고자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지탄거리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던 때도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이 극심하였습니다. 시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 선포와 치유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셨습니다. 우리가 혼란한 이 때에 무엇에 전념해야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를 양성하고자 결심하신 시대 배경을 살펴보고 우리도 이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 손을 내밀라(6-11).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랐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수를 하거나, 옷을 입을 때나, 타이핑을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많은 제약을 느꼈고 직장을 얻고자 해도 불이익을 많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서 마음도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장애인들은 성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회당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영접하시는 새로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그를 보고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끼로 삼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규례를 많이 만들어 사람들이 쉼이 없도록 두 어깨에 짐을 지웠습니다. 안식일에 예배하러 와서 병을 치료 받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안식일 규례는 생명 유지에 지장이 없는 한 안식일에는 어떤 병도 치료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안식일에도 치료가 허용되는 질병은 출산중인 부인, 전염성이 악화되는 병, 눈병이나 목병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 마른 것은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안식일에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태도로 인해서 백성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당시 백성들의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양을 앞에 두고도 도와주기는커녕 그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잡고자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보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의도로 만들었던 안식일 규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안식일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사람을 잡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과 율법을 따르기 전에 그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꼬리보다 머리를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면 고발하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살피시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일어나 섰습니다. 그는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믿음의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고 질문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분별력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도울 때 감정적이 되거나 판단하기보다 질문을 던짐으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을 피해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진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이 자기 발견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라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이 말라 버린 자들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더러움과 허물을 발견하고 씻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비쩍 마른 손을 내 밀어 봐라”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부분을 내밀었을 때 치료가 되고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소감 발표에도 치료의 기능이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드러냄으로 자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경험하고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사랑이 말라 있었습니다. 성품이 찌그러들고 사랑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그치지 않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섬기는 데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마른 손은 무엇인지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자이십니다. 그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매우 용감하신 말씀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보다는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했습니다.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으나, 잘못을 지적 받을 때도 돌이키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가장 악한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3:5절에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둘러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선을 악하다 판단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사회는 비정상입니다. 진리를 불의로 막는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키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밤새워 고민하시고 열 두 사도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에 대한 긍휼로 무장된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이 이 사회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입니다.
둘째, 열 두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12-16). 이 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암담한 현실과 종교지도자들의 악함을 보시고 미래를 새롭게 만들고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으시고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싸우는 일을 하는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을 키우는 일에 힘을 쓰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시작할 때는 마음이 밤과 같이 어두웠지만 기도가 끝날 때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날이 밝자 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새롭게 세우는 의미가 있습니다. 열둘은 완전수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비전 가운데 다양한 열두 사람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전권대사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해서 이 땅에 그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 세우시고 훈련하심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를 계승시키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양성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들로 키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열두명으로 시작된 제자 공동체는 앞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전세계에 확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을 목표로 활동할 것입니다. 제자양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진리와 사랑으로 다른 제자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목자가 예수님을 잘 배워 예수님의 양을 말씀의 양식으로 먹이고 양육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열 두 사도는 각각 누구입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이들은 당시 평범한 젊은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충성스러운 수제자 베드로도 있지만 그를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열두 사도를 키우심으로 이들에게 미래를 걸었습니다. 우리도 남의 일을 돌아볼 것 없이 먼저 내 곁에 있는 양들을 제자로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자녀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계를 복음화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행동파도 있고, 요한과 같은 사색파도 있고, 빌립과 같이 계산이 앞서는 분, 안드레 같이 심정이 앞서는 분,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 야고보와 같이 우레의 아들로 불릴 만큼 다혈질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대 출신도 있었습니다. 직업도 어부들이 많았지만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공동체를 다양성 가운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통일성이 있게 구성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와 열광자라는 뜻을 가진 셀룟 시몬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로마를 위해서 일했던 세리였고, 시몬은 로마 통치에 극단적으로 반발했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 둘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새 가죽부대였습니다. 제자들이 다양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은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새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이나 율법, 규례에 얽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였고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가 되는 데는 인간적 능력이나 자질보다 성품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열두 사도는 갈릴리 촌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 비해 떨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새 이스라엘을 이루고, 나아가 세계 만민을 섬길 새로운 지도자로 키우고자 소망을 두셨습니다. 이들이 현재에는 부족하지만 위대한 인물들로 성장할 것을 믿으셨습니다. 사람들을 키우는 데는 믿음과 소망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모습에 실망하기보다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열둘을 3년 동안 믿음과 소망 가운데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석한 학자, 치밀한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발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순수하고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을 택하셔서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여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멸시받던 갈릴리 청년들을 택하여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인류의 스승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없는 사람들을 찾기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이 시대를 섬길 만한 제자로 키우는 것이 실제적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의 공동체를 잘 이루고 예수님을 힘써 배우며 기쁨이 충만하고 거룩한 사람들로 성장할 때 주위 사람들이 우리 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여러 부류의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세상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획일적인 공동체보다 다양성 속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 누구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누구나 위대한 사람들로 변화가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현장에서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17-19).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이방 지역에서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 속에서 일하는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론만 있고 실무가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사도로서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생활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이름뿐인 목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사람에게라도 꾸준히 말씀을 먹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목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가르치고자 애쓰다보면 자신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 심방을 통해서 선교사님들이 꾸준히 전도하면서 양을 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하려면 한계를 느끼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가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나음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따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들어오셔서 양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전파, 병을 치유하는 사역,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돌봐야 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 격동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선거, 북한의 핵 위협,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인 갈등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볼 때 복음 전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돌보고 훈련하고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작지만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오셨지만 구체적으로 열두 사도를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제자 양성은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제자 양성을 넘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6:6-19
요절 | 누가복음 6:13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가 부패하여 진리를 잃어버리고 교회 건축을 위해서 돈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일어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는 개혁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한기총과 한교연이 교권주의와 이단 문제로 갈라서고 연합을 하고자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지탄거리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던 때도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이 극심하였습니다. 시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 선포와 치유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셨습니다. 우리가 혼란한 이 때에 무엇에 전념해야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를 양성하고자 결심하신 시대 배경을 살펴보고 우리도 이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 손을 내밀라(6-11).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랐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수를 하거나, 옷을 입을 때나, 타이핑을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많은 제약을 느꼈고 직장을 얻고자 해도 불이익을 많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서 마음도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장애인들은 성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회당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영접하시는 새로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그를 보고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끼로 삼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규례를 많이 만들어 사람들이 쉼이 없도록 두 어깨에 짐을 지웠습니다. 안식일에 예배하러 와서 병을 치료 받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안식일 규례는 생명 유지에 지장이 없는 한 안식일에는 어떤 병도 치료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안식일에도 치료가 허용되는 질병은 출산중인 부인, 전염성이 악화되는 병, 눈병이나 목병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 마른 것은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안식일에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태도로 인해서 백성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당시 백성들의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양을 앞에 두고도 도와주기는커녕 그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잡고자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보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의도로 만들었던 안식일 규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안식일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사람을 잡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과 율법을 따르기 전에 그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꼬리보다 머리를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면 고발하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살피시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일어나 섰습니다. 그는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믿음의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고 질문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분별력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도울 때 감정적이 되거나 판단하기보다 질문을 던짐으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을 피해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진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이 자기 발견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라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이 말라 버린 자들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더러움과 허물을 발견하고 씻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비쩍 마른 손을 내 밀어 봐라”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부분을 내밀었을 때 치료가 되고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소감 발표에도 치료의 기능이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드러냄으로 자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경험하고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사랑이 말라 있었습니다. 성품이 찌그러들고 사랑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그치지 않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섬기는 데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마른 손은 무엇인지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자이십니다. 그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매우 용감하신 말씀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보다는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했습니다.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으나, 잘못을 지적 받을 때도 돌이키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가장 악한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3:5절에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둘러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선을 악하다 판단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사회는 비정상입니다. 진리를 불의로 막는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키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밤새워 고민하시고 열 두 사도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에 대한 긍휼로 무장된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이 이 사회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입니다.
둘째, 열 두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12-16). 이 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암담한 현실과 종교지도자들의 악함을 보시고 미래를 새롭게 만들고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으시고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싸우는 일을 하는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을 키우는 일에 힘을 쓰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시작할 때는 마음이 밤과 같이 어두웠지만 기도가 끝날 때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날이 밝자 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새롭게 세우는 의미가 있습니다. 열둘은 완전수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비전 가운데 다양한 열두 사람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전권대사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해서 이 땅에 그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 세우시고 훈련하심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를 계승시키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양성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들로 키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열두명으로 시작된 제자 공동체는 앞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전세계에 확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을 목표로 활동할 것입니다. 제자양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진리와 사랑으로 다른 제자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목자가 예수님을 잘 배워 예수님의 양을 말씀의 양식으로 먹이고 양육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열 두 사도는 각각 누구입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이들은 당시 평범한 젊은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충성스러운 수제자 베드로도 있지만 그를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열두 사도를 키우심으로 이들에게 미래를 걸었습니다. 우리도 남의 일을 돌아볼 것 없이 먼저 내 곁에 있는 양들을 제자로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자녀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계를 복음화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행동파도 있고, 요한과 같은 사색파도 있고, 빌립과 같이 계산이 앞서는 분, 안드레 같이 심정이 앞서는 분,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 야고보와 같이 우레의 아들로 불릴 만큼 다혈질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대 출신도 있었습니다. 직업도 어부들이 많았지만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공동체를 다양성 가운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통일성이 있게 구성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와 열광자라는 뜻을 가진 셀룟 시몬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로마를 위해서 일했던 세리였고, 시몬은 로마 통치에 극단적으로 반발했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 둘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새 가죽부대였습니다. 제자들이 다양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은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새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이나 율법, 규례에 얽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였고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가 되는 데는 인간적 능력이나 자질보다 성품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열두 사도는 갈릴리 촌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 비해 떨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새 이스라엘을 이루고, 나아가 세계 만민을 섬길 새로운 지도자로 키우고자 소망을 두셨습니다. 이들이 현재에는 부족하지만 위대한 인물들로 성장할 것을 믿으셨습니다. 사람들을 키우는 데는 믿음과 소망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모습에 실망하기보다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열둘을 3년 동안 믿음과 소망 가운데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석한 학자, 치밀한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발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순수하고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을 택하셔서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여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멸시받던 갈릴리 청년들을 택하여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인류의 스승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없는 사람들을 찾기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이 시대를 섬길 만한 제자로 키우는 것이 실제적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의 공동체를 잘 이루고 예수님을 힘써 배우며 기쁨이 충만하고 거룩한 사람들로 성장할 때 주위 사람들이 우리 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여러 부류의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세상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획일적인 공동체보다 다양성 속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 누구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누구나 위대한 사람들로 변화가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현장에서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17-19).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이방 지역에서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 속에서 일하는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론만 있고 실무가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사도로서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생활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이름뿐인 목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사람에게라도 꾸준히 말씀을 먹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목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가르치고자 애쓰다보면 자신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 심방을 통해서 선교사님들이 꾸준히 전도하면서 양을 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하려면 한계를 느끼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가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나음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따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들어오셔서 양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전파, 병을 치유하는 사역,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돌봐야 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 격동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선거, 북한의 핵 위협,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인 갈등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볼 때 복음 전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돌보고 훈련하고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작지만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오셨지만 구체적으로 열두 사도를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제자 양성은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제자 양성을 넘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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