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8강(5:17-39)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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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눅8강(5:17-39)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2017년 누가복음 7 강
말씀 | 누가복음 5:17-39
요절 | 누가복음 5:32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올 봄은 제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제가 작년초에 나이지리아에서 돌아왔을 때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맞이하여 그 봄의 기쁨과 감사가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 땅에서 이 땅과 함께 겨울을 견뎌내고 맞이하는 봄이라 그런지 감회가 더 새롭게 느껴집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 잎사귀를 내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나무들과 꽃들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요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녹여주시고 자기들만의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우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말씀/ 누가복음 5:17-39
요절/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
오늘 본문은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죄사함을 받고 병고침을 받은 사건과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다가 자신을 찾아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잔치집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며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이 3가지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남의 죄를 정죄하는 사람들과 그 죄를 정죄당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이 죄사함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아픈 부분을 치유받고 기쁨의 꽃이 활짝 피어 우리의 삶이 잔치집과 같이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는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1장.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하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이나 율법자들은 말씀을 가르칠 때 주로 회당에서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어디서든지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뭇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심지어는 예루살렘 본부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특별파견된 감사팀처럼 예수님을 행동과 말을 예의주시하며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 존재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때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집에서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실 때에 한 상식 밖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지더니 누가 지붕에 올라 쿵쾅거리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붕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조용했던 말씀공부 시간이 참을 수 없는 층간소음과 먼지들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갑자기 지붕이 뻥 뚫리고 하늘로부터 중풍병자를 매단 침상이 예수님이 계신 곳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출입문이 있고 먼저 온 사람들이 있는데.. 순서표 뽑고 기다려야지.. 이런 무례한 같은 자들.. 하며 정죄하지 않았을까요? 집주인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저...저.. 죽일 놈들... ’ 하며 입을 다물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어떤 법과 울례를 어겼는지, 바리새인들은 그로인해 어떤 동물을 제사로 드려야하는 지 금방 결론을 내렸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이 오늘날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황당한 일들은 모두 비디오로 찍여 당장 SNS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수많은 댓글과 악플을 달아가며 신나게 난도질을 해댈 것이고, 그 병자와 친구들에 대한 얼굴 알리기와 신상털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보는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보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지라도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낫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이 사람아’라는 말은 ‘친구여’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Friend, 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소중한 친구로 맞이하셨습니다. 또 본문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은 영어로 ‘your sins are forgiven’으로서 뜻은 ‘너의 죄들이 면제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죄’는 ‘빚’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이 빚을 지면 이 빚으로 인해 눌리고 압박을 받게 됩니다. 또 빚을 갚지 못하면 결국 감옥에 가거나 그의 노예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로 인해 압박당하고 찌그러지고 기가 죽어 살면서 마치 본문의 중풍병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중풍병자를 온전히 낫게 하시기 위해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신성모독하는 사람은 누구냐? 오직 하나님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그들은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과 규례에 따라 성전에서 죄에 상당한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뿌림으로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수 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한낱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죄들을 사해졌다고 하니 신성모독으로 돌아맞아 죽을 죄에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 ‘너는 죄인이니 감옥에 들어가 있거라’ 하는데 전혀 알지 못하던 일개 목수가 와서 ‘내가 너에게 죄사함을 선포하노니 너는 그 감옥에서 나와라’ 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그 감옥에서 끄집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감옥장은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데려다가 혼줄을 내거나 아니면 임금을 모욕한 죄를 뒤집어 씌어 감옥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것입니다.
22절에 예수님께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사실 둘 다 사람으로선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고, 또한 그 중한 중풍병자를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당장 눈으로 그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리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걸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불가능한 것들을 동시에 행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권세를 하나님께서부터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신 곳은 율법이 정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신 방식은 율법이 정한 제물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방법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법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이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죄사함 받기 위해 성전에 가서 예식을 차리거나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현존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는 현존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나오는자는 고침을 받고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눌렸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마음에 평화를 누릴수 있습니다. 치료의 역사, 용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사 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와 죄사함을 받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장. 세리 레위를 불러주신 예수님.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보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레위의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가 직분이 세리라는 것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세리는 누구입니까? 세리는 당시 로마의 압제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식적인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편에 서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세금을 넘기던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정해진 세금보다도 더 많이 거두어서 자기들의 부를 챙겼습니다. 즉 자신의 동족의 고름을 짜고 피를 빨아먹음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웠던 흡혈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친구가 되기는커녕 이들과 같이 있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레위가 왜 세리의 길을 택했는지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의 판단과 율법의 잣대로 그들을 정죄하며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속사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보셨고 그 안에 숨어있는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그는 친구가 필요한 가련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소원이 숨어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시며 ‘나를 따르라(follow me)’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율법을 짊어지게 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죄인의 친구로서 그의 이기적인 약점을 감당해 주면서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이처럼 내가 예수님을 죽어라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일생동안 언제나 한결같이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속에는 벌써 레위가 그동안 행했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이 들어있고 희망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그를 더 이상 사회의 악의 축이 아닌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예수님의 각오와 그도 새롭게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같이 들어있습니다.
레위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럴 때 그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죄사함의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렸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청에 응하셨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세리집에서 웃음소리가 밖으로 흘러 넘쳐나는 것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하며 그들을 비빙하였습니다. 이는 사실 예수님을 겨냥해서 비방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가? 31절, 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 죄인이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죄인이었고, 그 친구들은 남의 집을 부수고 무단 침입한 죄인이었고, 세리는 이기적인 죄인이었고, 제자들은 먹기를 탐하고 죄인들과 즐기는 어울려노는 것을 좋아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신성모독 매우 건방진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들에게 죄인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변경될 수 없는 고정이었습니다. 더 이상 좋아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정죄하고 심판하고 잘라버려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을 보시는 눈은 의사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람을 분리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는 연약함과 죄성을 고치면 충분히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환자를 보고 더렵다고 흉하다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환자에게 사랑과 희망으로 다가갑니다. 다시 낳을 수 있고 다시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가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죄도 고치고 사할수 있는 명의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사람들은 그 병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이런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요즘 남자고 여자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방송에서는 ‘나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함께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등등 많은 이유로 우리는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함께 했다가도 금방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나타나면 금방 토라지고 쉽게 갈라집니다. 그걸 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쿨한 것이 아니라 그 함께 함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은 많은 믿음과 희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허물과 죄 문제가 들어날 때 사람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너가 그런 사람이었어?’ 하며 그냥 짤라 버립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죄 문제가 드러날 때 그냥 잘라버리고 이혼합니다. 마치 레위를 친구삼기를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많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서도 서로 작은 실수들을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서로의 작은 죄문제들을 발견하면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냥 버려버리고 짤라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에게도 오셔서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감당하고 그들과 끝까지 함께 가고자 하십니다.
이 사랑의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우리는 금식하며 슬퍼하거나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혼인잔치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을 누리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죄로 병든 모습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자학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죄사함받고 치료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의 은혜와 영육간의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7년 누가복음 7 강
말씀 | 누가복음 5:17-39
요절 | 누가복음 5:32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올 봄은 제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제가 작년초에 나이지리아에서 돌아왔을 때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맞이하여 그 봄의 기쁨과 감사가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 땅에서 이 땅과 함께 겨울을 견뎌내고 맞이하는 봄이라 그런지 감회가 더 새롭게 느껴집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 잎사귀를 내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나무들과 꽃들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요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녹여주시고 자기들만의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우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말씀/ 누가복음 5:17-39
요절/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
오늘 본문은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죄사함을 받고 병고침을 받은 사건과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다가 자신을 찾아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잔치집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며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이 3가지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남의 죄를 정죄하는 사람들과 그 죄를 정죄당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이 죄사함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아픈 부분을 치유받고 기쁨의 꽃이 활짝 피어 우리의 삶이 잔치집과 같이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는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1장.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하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이나 율법자들은 말씀을 가르칠 때 주로 회당에서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어디서든지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뭇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심지어는 예루살렘 본부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특별파견된 감사팀처럼 예수님을 행동과 말을 예의주시하며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 존재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때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집에서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실 때에 한 상식 밖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지더니 누가 지붕에 올라 쿵쾅거리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붕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조용했던 말씀공부 시간이 참을 수 없는 층간소음과 먼지들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갑자기 지붕이 뻥 뚫리고 하늘로부터 중풍병자를 매단 침상이 예수님이 계신 곳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출입문이 있고 먼저 온 사람들이 있는데.. 순서표 뽑고 기다려야지.. 이런 무례한 같은 자들.. 하며 정죄하지 않았을까요? 집주인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저...저.. 죽일 놈들... ’ 하며 입을 다물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어떤 법과 울례를 어겼는지, 바리새인들은 그로인해 어떤 동물을 제사로 드려야하는 지 금방 결론을 내렸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이 오늘날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황당한 일들은 모두 비디오로 찍여 당장 SNS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수많은 댓글과 악플을 달아가며 신나게 난도질을 해댈 것이고, 그 병자와 친구들에 대한 얼굴 알리기와 신상털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보는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보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지라도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낫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이 사람아’라는 말은 ‘친구여’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Friend, 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소중한 친구로 맞이하셨습니다. 또 본문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은 영어로 ‘your sins are forgiven’으로서 뜻은 ‘너의 죄들이 면제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죄’는 ‘빚’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이 빚을 지면 이 빚으로 인해 눌리고 압박을 받게 됩니다. 또 빚을 갚지 못하면 결국 감옥에 가거나 그의 노예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로 인해 압박당하고 찌그러지고 기가 죽어 살면서 마치 본문의 중풍병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중풍병자를 온전히 낫게 하시기 위해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신성모독하는 사람은 누구냐? 오직 하나님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그들은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과 규례에 따라 성전에서 죄에 상당한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뿌림으로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수 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한낱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죄들을 사해졌다고 하니 신성모독으로 돌아맞아 죽을 죄에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 ‘너는 죄인이니 감옥에 들어가 있거라’ 하는데 전혀 알지 못하던 일개 목수가 와서 ‘내가 너에게 죄사함을 선포하노니 너는 그 감옥에서 나와라’ 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그 감옥에서 끄집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감옥장은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데려다가 혼줄을 내거나 아니면 임금을 모욕한 죄를 뒤집어 씌어 감옥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것입니다.
22절에 예수님께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사실 둘 다 사람으로선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고, 또한 그 중한 중풍병자를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당장 눈으로 그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리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걸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불가능한 것들을 동시에 행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권세를 하나님께서부터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신 곳은 율법이 정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신 방식은 율법이 정한 제물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방법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법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이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죄사함 받기 위해 성전에 가서 예식을 차리거나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현존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는 현존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나오는자는 고침을 받고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눌렸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마음에 평화를 누릴수 있습니다. 치료의 역사, 용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사 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와 죄사함을 받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장. 세리 레위를 불러주신 예수님.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보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레위의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가 직분이 세리라는 것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세리는 누구입니까? 세리는 당시 로마의 압제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식적인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편에 서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세금을 넘기던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정해진 세금보다도 더 많이 거두어서 자기들의 부를 챙겼습니다. 즉 자신의 동족의 고름을 짜고 피를 빨아먹음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웠던 흡혈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친구가 되기는커녕 이들과 같이 있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레위가 왜 세리의 길을 택했는지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의 판단과 율법의 잣대로 그들을 정죄하며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속사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보셨고 그 안에 숨어있는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그는 친구가 필요한 가련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소원이 숨어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시며 ‘나를 따르라(follow me)’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율법을 짊어지게 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죄인의 친구로서 그의 이기적인 약점을 감당해 주면서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이처럼 내가 예수님을 죽어라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일생동안 언제나 한결같이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속에는 벌써 레위가 그동안 행했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이 들어있고 희망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그를 더 이상 사회의 악의 축이 아닌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예수님의 각오와 그도 새롭게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같이 들어있습니다.
레위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럴 때 그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죄사함의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렸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청에 응하셨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세리집에서 웃음소리가 밖으로 흘러 넘쳐나는 것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하며 그들을 비빙하였습니다. 이는 사실 예수님을 겨냥해서 비방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가? 31절, 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 죄인이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죄인이었고, 그 친구들은 남의 집을 부수고 무단 침입한 죄인이었고, 세리는 이기적인 죄인이었고, 제자들은 먹기를 탐하고 죄인들과 즐기는 어울려노는 것을 좋아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신성모독 매우 건방진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들에게 죄인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변경될 수 없는 고정이었습니다. 더 이상 좋아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정죄하고 심판하고 잘라버려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을 보시는 눈은 의사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람을 분리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는 연약함과 죄성을 고치면 충분히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환자를 보고 더렵다고 흉하다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환자에게 사랑과 희망으로 다가갑니다. 다시 낳을 수 있고 다시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가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죄도 고치고 사할수 있는 명의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사람들은 그 병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이런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요즘 남자고 여자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방송에서는 ‘나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함께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등등 많은 이유로 우리는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함께 했다가도 금방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나타나면 금방 토라지고 쉽게 갈라집니다. 그걸 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쿨한 것이 아니라 그 함께 함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은 많은 믿음과 희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허물과 죄 문제가 들어날 때 사람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너가 그런 사람이었어?’ 하며 그냥 짤라 버립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죄 문제가 드러날 때 그냥 잘라버리고 이혼합니다. 마치 레위를 친구삼기를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많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서도 서로 작은 실수들을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서로의 작은 죄문제들을 발견하면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냥 버려버리고 짤라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에게도 오셔서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감당하고 그들과 끝까지 함께 가고자 하십니다.
이 사랑의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우리는 금식하며 슬퍼하거나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혼인잔치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을 누리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죄로 병든 모습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자학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죄사함받고 치료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의 은혜와 영육간의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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