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5강(4:1-15) 다만 그를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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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5 강
말씀 | 누가복음 4:1-15
요절 | 누가복음 4:8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제 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 죄를 지음으로 온 인류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첫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십니다. 구원자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 역사를 감당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무엇이고 또 그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마귀의 시험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이끄셨을까요?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를 비방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대적자’를 말합니다. 마귀는 하와를 꾀던 옛 뱀으로서,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인데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계 12:9). 옛 뱀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어 그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아담이 시험에 실패한 것을 만회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메시야 자격시험입니다. 인류의 왕이 될 자격시험입니다. 시험은 메시야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온전케 하고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해서 검증을 받으신 것입니다. 검증은 반대파에게서 신랄하게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으로 보고 한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이런 검증을 받으셔야 시험 받는 인생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요일3:8).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셔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사십 일 동안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날 수가 다하여 심히 주리셨습니다.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먹는 문제는 기본권에 속합니다.
마귀는 육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영적인 면 세 가지 곧 전인격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첫째, 먹어야 되지 않는가? 3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는 육체적인 시험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하루만 굶어도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으니 더 이상 금식을 한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마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와 속삭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을 명하여 먹음직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그 크신 능력으로 돌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능력을 먹는데 사용한다면 육의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빠지고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구원자가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는데 마귀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먹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사명도 좋고 다 좋은데 먼저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돌들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돌들에게 말을 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돌에게 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로 자신의 먹는 문제를 위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에 강조를 두었는데 예수님은 ‘사람’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가정법을 써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라는 전제 하에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에 초점을 맞추어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8: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본질이 육신만이 아니라는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비즈니스를 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떡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방식을 고정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자유롭습니다. 상상력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가 친히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먹을거리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렛대는 먼저입니다. 내 삶의 최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 차원의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뷔페 음식을 매일 먹는다고 사람이 행복할까요? 먹고 마시는 일도 한도가 있고 또 그것이 계속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잘 먹고 육신을 즐겼지만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기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전 12: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전12:13).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양식을 삼으셨습니다. 한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를 말씀으로 도우시는 것을 참된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인류를 위한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셨습니다(요6:35).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사명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다음 먹을거리를 풍성히 주셨습니다. 오늘날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탐욕과 지도자들의 부패로 인해서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근본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며 내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이를 감당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충만할 줄 믿습니다.
둘째, 명예와 권세에 대한 시험. 마귀는 첫 시험에 실패하자 예수님을 다시 시험했습니다. “좋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 주겠다.” 그러면서 마귀가 또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5-7).” 마귀는 사람이 떡만이 아니라 명예와 권세와 영광으로 사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권세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을 합니다. 마귀는 당시 로마 제국의 화려한 궁전과 온 세계를 지배하는 가이사의 권세와 그가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를 한 눈에 다 보여 주었습니다. 마귀는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와! 세상 권세를 다 갖게 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권세란 무슨 일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권세를 갖는 것입니다. 5월 9일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자 출사표를 내고 선거전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자기가 임명할 수 있는 직책이 3천개가 넘습니다. 언론과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통령에게 쏠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합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따라서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자 합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항복하면, 자신을 경배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위임하겠다고 합니다. 마귀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도 서슴치 말고 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어떤 불의한 방법도 사용하고자 합니다. 사람을 몇 명 죽이는 것도 예사롭게 행사합니다.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권력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크든 작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악하게 되기 쉽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모든 권력자들이 가는 길을 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길을 감으로써 자멸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갖기까지는 주인에게 순종하지만 권력을 갖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비참한 결과를 남긴 권력자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하십니다. 마귀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통치하면 부패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다스리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스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권력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기고자 하심으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고자 할 때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집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얻기보다 정직한 노력으로 세 끼를 겨우 때우더라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이 굳게 불잡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일생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의 권위와 영광을 덤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권위와 영광에 매이면 그것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이 삶의 좌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말씀을 의심하고 테스트하는 시험. 9-11절을 보십시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너를 던지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하였습니다(시 91:11,12).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킵니다(마 22:29;고후 2:17).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초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신명기 6:16절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시험 받을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천지의 주재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할 뿐입니다. 이 관계가 깨어지면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세우셨음을 확신하셨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부 사이도, 목자와 양 사이도 의심하고 회의를 품으면 관계성에 금이 갑니다. 그 금은 점점 커져서 사이가 벌어집니다. 나중에는 관계성이 파괴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했고, “마귀를 대적하라(약4:7)”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 속에 여러 가지 세상 유혹이 있을 때 그것이 마귀의 시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먹는 문제에 얽매여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게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일도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는 음녀의 모습으로, 게임이나 도박 등 한탕주의의 모습으로, 이단의 속임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생각, 의심, 불신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게 하는 생각도 아주 교묘한 마귀의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항상 말씀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심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는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7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가장 좋은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소에 양식을 잘 먹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 마귀를 분별하고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마귀는 기도하는 개인과 기도하는 모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이 많은 봄 학기, 젊은 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4:1-15
요절 | 누가복음 4:8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제 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 죄를 지음으로 온 인류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첫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십니다. 구원자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 역사를 감당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무엇이고 또 그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마귀의 시험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이끄셨을까요?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를 비방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대적자’를 말합니다. 마귀는 하와를 꾀던 옛 뱀으로서,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인데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계 12:9). 옛 뱀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어 그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아담이 시험에 실패한 것을 만회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메시야 자격시험입니다. 인류의 왕이 될 자격시험입니다. 시험은 메시야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온전케 하고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해서 검증을 받으신 것입니다. 검증은 반대파에게서 신랄하게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으로 보고 한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이런 검증을 받으셔야 시험 받는 인생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요일3:8).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셔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사십 일 동안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날 수가 다하여 심히 주리셨습니다.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먹는 문제는 기본권에 속합니다.
마귀는 육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영적인 면 세 가지 곧 전인격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첫째, 먹어야 되지 않는가? 3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는 육체적인 시험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하루만 굶어도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으니 더 이상 금식을 한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마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와 속삭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을 명하여 먹음직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그 크신 능력으로 돌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능력을 먹는데 사용한다면 육의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빠지고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구원자가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는데 마귀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먹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사명도 좋고 다 좋은데 먼저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돌들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돌들에게 말을 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돌에게 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로 자신의 먹는 문제를 위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에 강조를 두었는데 예수님은 ‘사람’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가정법을 써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라는 전제 하에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에 초점을 맞추어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8: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본질이 육신만이 아니라는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비즈니스를 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떡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방식을 고정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자유롭습니다. 상상력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가 친히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먹을거리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렛대는 먼저입니다. 내 삶의 최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 차원의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뷔페 음식을 매일 먹는다고 사람이 행복할까요? 먹고 마시는 일도 한도가 있고 또 그것이 계속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잘 먹고 육신을 즐겼지만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기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전 12: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전12:13).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양식을 삼으셨습니다. 한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를 말씀으로 도우시는 것을 참된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인류를 위한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셨습니다(요6:35).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사명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다음 먹을거리를 풍성히 주셨습니다. 오늘날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탐욕과 지도자들의 부패로 인해서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근본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며 내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이를 감당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충만할 줄 믿습니다.
둘째, 명예와 권세에 대한 시험. 마귀는 첫 시험에 실패하자 예수님을 다시 시험했습니다. “좋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 주겠다.” 그러면서 마귀가 또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5-7).” 마귀는 사람이 떡만이 아니라 명예와 권세와 영광으로 사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권세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을 합니다. 마귀는 당시 로마 제국의 화려한 궁전과 온 세계를 지배하는 가이사의 권세와 그가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를 한 눈에 다 보여 주었습니다. 마귀는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와! 세상 권세를 다 갖게 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권세란 무슨 일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권세를 갖는 것입니다. 5월 9일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자 출사표를 내고 선거전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자기가 임명할 수 있는 직책이 3천개가 넘습니다. 언론과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통령에게 쏠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합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따라서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자 합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항복하면, 자신을 경배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위임하겠다고 합니다. 마귀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도 서슴치 말고 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어떤 불의한 방법도 사용하고자 합니다. 사람을 몇 명 죽이는 것도 예사롭게 행사합니다.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권력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크든 작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악하게 되기 쉽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모든 권력자들이 가는 길을 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길을 감으로써 자멸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갖기까지는 주인에게 순종하지만 권력을 갖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비참한 결과를 남긴 권력자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하십니다. 마귀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통치하면 부패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다스리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스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권력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기고자 하심으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고자 할 때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집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얻기보다 정직한 노력으로 세 끼를 겨우 때우더라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이 굳게 불잡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일생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의 권위와 영광을 덤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권위와 영광에 매이면 그것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이 삶의 좌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말씀을 의심하고 테스트하는 시험. 9-11절을 보십시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너를 던지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하였습니다(시 91:11,12).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킵니다(마 22:29;고후 2:17).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초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신명기 6:16절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시험 받을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천지의 주재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할 뿐입니다. 이 관계가 깨어지면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세우셨음을 확신하셨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부 사이도, 목자와 양 사이도 의심하고 회의를 품으면 관계성에 금이 갑니다. 그 금은 점점 커져서 사이가 벌어집니다. 나중에는 관계성이 파괴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했고, “마귀를 대적하라(약4:7)”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 속에 여러 가지 세상 유혹이 있을 때 그것이 마귀의 시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먹는 문제에 얽매여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게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일도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는 음녀의 모습으로, 게임이나 도박 등 한탕주의의 모습으로, 이단의 속임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생각, 의심, 불신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게 하는 생각도 아주 교묘한 마귀의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항상 말씀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심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는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7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가장 좋은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소에 양식을 잘 먹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 마귀를 분별하고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마귀는 기도하는 개인과 기도하는 모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이 많은 봄 학기, 젊은 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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