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024년 잠5강(10,11장) 재물보다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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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5강
말씀 | 잠언 10장,11장
요절 | 잠언 11:4
재물보다 공의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언 10-29장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 2행시로 되어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삶에 각각 따르는 보응이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배울 10장은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의인의 말과 악인의 말이 잘 대조되어 나옵니다. 11장에서는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올바른 재물관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의인과 악인(10:1-10). 솔로몬의 잠언(10:1-22:16)은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의 대조로 시작합니다. 기준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가, 슬프게 하는가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부모의 감정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해 그들의 기쁨이 되고, 근심이 되지 않으려는 자녀가 성숙하고 철 든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려는 사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을 멀리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녀입니다.
사람을 둘로 나눈다는 것은 한 가지 절대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악으로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악을 사랑하게 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이 지혜요,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재물보다 공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인데, 의로움, 곧음(straight)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부러지거나 기울어지지 않아 측정의 절대 기준이 됩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의롭고 올바른 성품과 판단입니다. 재물이 없어도 공의를 가지면 죽음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공의는 무형 재산이지만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새겨지는 진정한 소유입니다. 재물은 죽을 때 떠나지만 공의는 죽을 때도 가져가는 영원한 재산이니 재물보다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 즉 복음의 의입니다.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배부름을 주십니다. 공의를 추구할 때 머리에 복이 임해 온 삶에 축복이 흐르게 하시며 칭찬 받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하시고 계명을 받고 바른 길 가는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의의 재물로 부자가 되려 하다 죽음의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악인의 소욕은 여호와가 물리치셔서 항상 주리게 됩니다. 불의의 재물을 추구하면 손이 게을러집니다. 돈 버는 일에 바쁜 것 같지만 의의 손이 게을러져 영적 빈곤에 시달립니다. 추수 때 잠자면 부끄러운 아들이 됩니다.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입에 독이 머금어져 원망 불평 험담이 흘러나옵니다.
오늘날 부모나 자녀나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아들, 딸이 되는 길은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의를 많이 가져 공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진 영적인 부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는 많지만 공의 많은 부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의는 보이는 재산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귀하게 보시는 영적인 재산입니다. 천국 재산입니다. 마음에 의를 쌓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 딸입니다. 돈은 유익이 있지만 돈 때문에 불의에 빠지면 차라리 좀 부족한 것이 낫습니다. 돈이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둘째, 말의 중요성(6,8,10,11,13,14,18,19,20,21,31,32). 말은 단순한 언어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6:45). 말은 마음에 쌓은 것, 사람의 생각과 인격과 성품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말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입이 생명을 살리는 생명 샘이 될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독의 샘이 될지는 그 마음에 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생명의 샘은 사람을 치유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만족스럽게 합니다. 입은 샘과 같이 끊임없이 말을 흘려보냅니다. 생명의 샘에서 나오는 말은 인정의 말, 칭찬의 말, 여호와 경외의 말, 믿음의 말,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라는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누구보다도 우리 부모님을 존경해요”, “부모님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 힘을 얻습니다. 또 남편들은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최고예요”라는 아내의 말을, 아내들은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야”라는 남편의 말을 꼽았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할 때, 부모는 자녀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가장 큰 상처를 받습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그 만남은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사랑하셔서 섬기시는 주도적인 사귐 때문에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그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고 말을 통하여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 수를 줄여야 합니다(19). 말하기 전에 세 번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참말인가?’를 생각하고, ‘이 말은 나에게 혹은 상대방에게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친절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정해 주는 말, 격려의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할 수 있다는 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큰 파도 같은 축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하려던 그가 이를 취소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나.” 이 말이 전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미움은 독의 근원입니다. 미운 생각이 들면 적대적이 되고, 상대를 경멸하고,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무관심해버리게 됩니다. 미움은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지적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하다보면 오해가 생기고 공동체는 서서히 금이 가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모임이나 예배에 오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잘못을 위에서 덮어줍니다. 용서해줍니다. 용서는 복수하지 않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수의 천재들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습니다. 눈짓으로, 얼굴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시간이 지나서 그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 무관심으로 등등. 그러나 용서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자기를 채찍질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과 생명의 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가 매일매일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면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와 친밀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축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 갈등을 끝내는 길은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 뿐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한 목적을 가지면 지속적으로 열정적으로 배우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면 지속적으로 배우게 되고 열정을 갖게 됩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혜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더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을 목양합니다.
셋째, 재물의 중요성. 15절을 보십시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부자와 재화는 좋은 것입니다. 부자의 힘은 돈에 있습니다. 빈곤한 자가 망하는 이유는 가난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돈뿐만 아니라 훈계를 지키는 삶, 입술을 제어하는 삶, 순은과 같은 의인의 혀, 여러 사람을 교육하는 의인의 입술 등 영적인 재산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의로운 수고를 감당할 뿐 아니라 생명이 풍성한 말씀, 사랑, 지혜 부자가 되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의로운 자는 생명을 위해서 노동을 합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수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악한 자의 수확물은 죄를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야 사람이 부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는 “수고함으로 더하지 못하느니라”의 뜻이 있습니다. 수고하라 하고 수고로 더하지 못한다 하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깊은 세계는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고전15:10). 영육간에 부자 되기 위해 기도하고 수고해야 하지만 그 수고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11:1을 보십시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돈을 버는 과정이 정의로워야 합니다. 돈을 버는 과정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십니다. “속이는 저울”은 부정한 거래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조급한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를 힘씁니다(3).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부를 이룹니다(16). 인자한 사람은 자기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신을 해칩니다. 악인이 받는 삯은 허무요, 공의를 뿌린 자의 삯은 확실합니다.
또한 돈을 버는 것만큼 쓰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는 일이기에 경제정의를 힘써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 10:19b은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money is the answer for everything)”고 말씀합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돈을 대문자로 맘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전지전능한 신과 같이 여깁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11:24-26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흩어 구제하는 것은 ‘흩어 뿌리다, 널리, 광범위하게 던지다’라는 뜻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 소유로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넓게 뿌립니다. 뿌린 만큼 자기 소유가 줄어들어야 할텐데 더 부유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세상 계산법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도히 아끼는 것은 남에게 주기를 아까워하는 것입니다. 아낀 만큼 부자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가난하게 될 뿐입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가 윤택해집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이 결국 나에게 돌아옵니다. 물론 그걸 계산하고 선을 행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만 잘 먹고 살려고 하면 부와 풍요와 윤택함 얻을 수 없습니다. 흉년에 곡식 안 내놓고 매점매석해 돈 벌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와 이웃을 주신 의미는 그들을 돌보고 섬겨 세상을 풍요롭게 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따라 살 때 내 삶도 풍요롭고 윤택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돌아보고 사랑할수록 내가 더 사랑 받고 행복해집니다.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곡식을 팔아 남을 먹이고 살리는 사람의 머리에 복이 임합니다. 이웃 사랑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얻으며 재물 의지하지 않고 이웃 사랑 실천하는 사람이 푸른 잎사귀처럼 번성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을 더듬어 찾아 악이 임하고, 재물을 의지하다 패망하며, 소득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27-29).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9:17)”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하나님은 몇 배로 갚아 주십니다.
회오리바람 즉 태풍은 악인이나 의인을 차별하지 않고 붑니다. 그러나 악인은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나 의인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초로 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비유가 생각납니다. 의인은 인생의 기초를 잘 놓는 사람인데, 악인은 화려한 부실 건축에 관심 많은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생의 기초공사와 같습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룹니다. 의인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 믿음 소망 사랑 같은 영적인 재산들, 관계의 풍성함입니다. 악인의 가벼움은 태풍이 불면 날아가 사라지고 부리는 자의 이에 식초, 눈에 연기처럼 고통 자체가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악인은 세상에서 장수할지라도 생명 없는 삶을 살기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지식과 지혜가 풍족해 짧은 삶을 살다 가더라도 장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는 삶이 영생이고, 하나님 모르는 삶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삶, 무가치한 삶, 죽지 못해 사는 삶, 육신의 쾌락과 만족이 전부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많은 사람이 재물을 인생의 열매로 추구합니다. 돈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돈 나무를 가꿉니다. 하지만 의인은 생명나무를 열매로 맺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얻습니다. 돈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지혜입니다. 재물을 투자해서 사람을 얻고 믿음의 길을 같이 가는 동역자로 삼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환난을 헤쳐 나가는 것이 복되고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돈을 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잠언 10장,11장
요절 | 잠언 11:4
재물보다 공의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언 10-29장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 2행시로 되어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삶에 각각 따르는 보응이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배울 10장은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의인의 말과 악인의 말이 잘 대조되어 나옵니다. 11장에서는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올바른 재물관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의인과 악인(10:1-10). 솔로몬의 잠언(10:1-22:16)은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의 대조로 시작합니다. 기준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가, 슬프게 하는가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부모의 감정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해 그들의 기쁨이 되고, 근심이 되지 않으려는 자녀가 성숙하고 철 든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려는 사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을 멀리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녀입니다.
사람을 둘로 나눈다는 것은 한 가지 절대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악으로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악을 사랑하게 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이 지혜요,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재물보다 공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인데, 의로움, 곧음(straight)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부러지거나 기울어지지 않아 측정의 절대 기준이 됩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의롭고 올바른 성품과 판단입니다. 재물이 없어도 공의를 가지면 죽음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공의는 무형 재산이지만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새겨지는 진정한 소유입니다. 재물은 죽을 때 떠나지만 공의는 죽을 때도 가져가는 영원한 재산이니 재물보다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 즉 복음의 의입니다.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배부름을 주십니다. 공의를 추구할 때 머리에 복이 임해 온 삶에 축복이 흐르게 하시며 칭찬 받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하시고 계명을 받고 바른 길 가는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의의 재물로 부자가 되려 하다 죽음의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악인의 소욕은 여호와가 물리치셔서 항상 주리게 됩니다. 불의의 재물을 추구하면 손이 게을러집니다. 돈 버는 일에 바쁜 것 같지만 의의 손이 게을러져 영적 빈곤에 시달립니다. 추수 때 잠자면 부끄러운 아들이 됩니다.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입에 독이 머금어져 원망 불평 험담이 흘러나옵니다.
오늘날 부모나 자녀나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아들, 딸이 되는 길은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의를 많이 가져 공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진 영적인 부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는 많지만 공의 많은 부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의는 보이는 재산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귀하게 보시는 영적인 재산입니다. 천국 재산입니다. 마음에 의를 쌓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 딸입니다. 돈은 유익이 있지만 돈 때문에 불의에 빠지면 차라리 좀 부족한 것이 낫습니다. 돈이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둘째, 말의 중요성(6,8,10,11,13,14,18,19,20,21,31,32). 말은 단순한 언어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6:45). 말은 마음에 쌓은 것, 사람의 생각과 인격과 성품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말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입이 생명을 살리는 생명 샘이 될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독의 샘이 될지는 그 마음에 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생명의 샘은 사람을 치유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만족스럽게 합니다. 입은 샘과 같이 끊임없이 말을 흘려보냅니다. 생명의 샘에서 나오는 말은 인정의 말, 칭찬의 말, 여호와 경외의 말, 믿음의 말,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라는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누구보다도 우리 부모님을 존경해요”, “부모님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 힘을 얻습니다. 또 남편들은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최고예요”라는 아내의 말을, 아내들은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야”라는 남편의 말을 꼽았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할 때, 부모는 자녀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가장 큰 상처를 받습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그 만남은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사랑하셔서 섬기시는 주도적인 사귐 때문에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그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고 말을 통하여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 수를 줄여야 합니다(19). 말하기 전에 세 번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참말인가?’를 생각하고, ‘이 말은 나에게 혹은 상대방에게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친절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정해 주는 말, 격려의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할 수 있다는 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큰 파도 같은 축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하려던 그가 이를 취소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나.” 이 말이 전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미움은 독의 근원입니다. 미운 생각이 들면 적대적이 되고, 상대를 경멸하고,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무관심해버리게 됩니다. 미움은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지적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하다보면 오해가 생기고 공동체는 서서히 금이 가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모임이나 예배에 오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잘못을 위에서 덮어줍니다. 용서해줍니다. 용서는 복수하지 않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수의 천재들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습니다. 눈짓으로, 얼굴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시간이 지나서 그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 무관심으로 등등. 그러나 용서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자기를 채찍질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과 생명의 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가 매일매일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면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와 친밀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축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 갈등을 끝내는 길은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 뿐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한 목적을 가지면 지속적으로 열정적으로 배우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면 지속적으로 배우게 되고 열정을 갖게 됩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혜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더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을 목양합니다.
셋째, 재물의 중요성. 15절을 보십시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부자와 재화는 좋은 것입니다. 부자의 힘은 돈에 있습니다. 빈곤한 자가 망하는 이유는 가난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돈뿐만 아니라 훈계를 지키는 삶, 입술을 제어하는 삶, 순은과 같은 의인의 혀, 여러 사람을 교육하는 의인의 입술 등 영적인 재산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의로운 수고를 감당할 뿐 아니라 생명이 풍성한 말씀, 사랑, 지혜 부자가 되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의로운 자는 생명을 위해서 노동을 합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수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악한 자의 수확물은 죄를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야 사람이 부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는 “수고함으로 더하지 못하느니라”의 뜻이 있습니다. 수고하라 하고 수고로 더하지 못한다 하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깊은 세계는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고전15:10). 영육간에 부자 되기 위해 기도하고 수고해야 하지만 그 수고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11:1을 보십시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돈을 버는 과정이 정의로워야 합니다. 돈을 버는 과정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십니다. “속이는 저울”은 부정한 거래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조급한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를 힘씁니다(3).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부를 이룹니다(16). 인자한 사람은 자기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신을 해칩니다. 악인이 받는 삯은 허무요, 공의를 뿌린 자의 삯은 확실합니다.
또한 돈을 버는 것만큼 쓰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는 일이기에 경제정의를 힘써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 10:19b은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money is the answer for everything)”고 말씀합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돈을 대문자로 맘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전지전능한 신과 같이 여깁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11:24-26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흩어 구제하는 것은 ‘흩어 뿌리다, 널리, 광범위하게 던지다’라는 뜻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 소유로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넓게 뿌립니다. 뿌린 만큼 자기 소유가 줄어들어야 할텐데 더 부유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세상 계산법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도히 아끼는 것은 남에게 주기를 아까워하는 것입니다. 아낀 만큼 부자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가난하게 될 뿐입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가 윤택해집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이 결국 나에게 돌아옵니다. 물론 그걸 계산하고 선을 행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만 잘 먹고 살려고 하면 부와 풍요와 윤택함 얻을 수 없습니다. 흉년에 곡식 안 내놓고 매점매석해 돈 벌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와 이웃을 주신 의미는 그들을 돌보고 섬겨 세상을 풍요롭게 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따라 살 때 내 삶도 풍요롭고 윤택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돌아보고 사랑할수록 내가 더 사랑 받고 행복해집니다.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곡식을 팔아 남을 먹이고 살리는 사람의 머리에 복이 임합니다. 이웃 사랑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얻으며 재물 의지하지 않고 이웃 사랑 실천하는 사람이 푸른 잎사귀처럼 번성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을 더듬어 찾아 악이 임하고, 재물을 의지하다 패망하며, 소득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27-29).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9:17)”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하나님은 몇 배로 갚아 주십니다.
회오리바람 즉 태풍은 악인이나 의인을 차별하지 않고 붑니다. 그러나 악인은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나 의인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초로 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비유가 생각납니다. 의인은 인생의 기초를 잘 놓는 사람인데, 악인은 화려한 부실 건축에 관심 많은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생의 기초공사와 같습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룹니다. 의인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 믿음 소망 사랑 같은 영적인 재산들, 관계의 풍성함입니다. 악인의 가벼움은 태풍이 불면 날아가 사라지고 부리는 자의 이에 식초, 눈에 연기처럼 고통 자체가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악인은 세상에서 장수할지라도 생명 없는 삶을 살기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지식과 지혜가 풍족해 짧은 삶을 살다 가더라도 장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는 삶이 영생이고, 하나님 모르는 삶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삶, 무가치한 삶, 죽지 못해 사는 삶, 육신의 쾌락과 만족이 전부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많은 사람이 재물을 인생의 열매로 추구합니다. 돈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돈 나무를 가꿉니다. 하지만 의인은 생명나무를 열매로 맺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얻습니다. 돈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지혜입니다. 재물을 투자해서 사람을 얻고 믿음의 길을 같이 가는 동역자로 삼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환난을 헤쳐 나가는 것이 복되고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돈을 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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