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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024년 잠4강(8,9장) 지혜의 사랑을 입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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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24-10-0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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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4강 
말씀 | 잠언 8장,9장
요절 | 잠언 8:17

지혜의 사랑을 입는 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온 세상에 가득한 지혜의 소리(8:1-21), 둘째, 태초부터 계셨던 지혜(22-36), 셋째, 왕비의 잔치와 어리석은 여인의 잔치입니다. 지혜 여인을 사랑하는 자는 그녀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지혜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생명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고 즐거움과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첫째, 온 세상에 가득한 지혜의 소리(8:1-21). 8:1-5을 보십시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지혜가 부르고 명철 즉 깨달음이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혜와 깨달음의 소리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듣고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지혜와 깨달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눈을 뜨면 보고, 우주의 질서와 생명 현상을 통해서 지혜와 깨달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주십니다. 

  지혜와 깨달음은 가장 “선한 것”(새번역 옳은 말)과 “정직”(새번역 바른 말)을 말합니다. 그는 진리, 진실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합니다. 의로운 것만 말합니다. 따라서 진실을 알아볼 눈이 있는 사람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들은 돈이나 진귀한 보물보다 지혜를 더 귀히 여깁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혜와 깨달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12-21절은 지혜 여인이 자신을 설명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는다고 했습니다. 명철은 신중함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할 때에 옳고 그름, 최선과 차선, 목적과 과정과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문제가 무엇인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신중하게 생각할 때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떠오릅니다. 성급하면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신중함은 냉정함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습니다. 지혜에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는데  계략을 현명한 조언(counsel)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식과 현명한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힘이 필요합니다.

  지혜는 누구를 초청합니까?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를 초청합니다. 지혜는 명철한 사람에게도 필요하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이들에게 더욱 절실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분별력이 없어 누구의 말도 순진하게 듣고 믿고 따르는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완고하게 미련한 자들이나 거만한 자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미성숙하지만 지혜의 메시지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응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순진하게 함부로 믿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적절한 방법이나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필연적으로 이 사람은 어두움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가 지혜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나오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합니다. 지혜는 악한 삶의 방식과 사실을 뒤틀리게 말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지혜는 왕들, 재상, 도지사, 의로운 재판관들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지도자의 다스림도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골로새서 1:16에서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듣는 마음이요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11,12).” 신명기는 왕들에게 율법을 옆에 두고 자주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지혜와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주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유롭고 복되고 부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하나님을 버리니 영혼이 병들고 사망과 흑암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억압과 불평등이 편만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니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지혜 여인은 그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을 늘 생각하고 보고 또 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말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그 말대로 하고자 합니다. 사랑한다고 해 놓고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혜를 사랑하면 지혜도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합니다. 또한 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가 지혜를 만날 것입니다. 지혜를 똥줄 빠지게 찾는 자들이 그를 만날 것입니다. 지혜를 사모하여 마치 보물을 찾듯 지혜를 구하는 사람을 지혜 여인은 만나 줍니다. 어떤 여인을 사랑하여 집까지 찾아갔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아무리 불러도 듣지 않아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차이기도 합니다. 만나서 사랑을 해도 변덕쟁이라면 감정과 기분에 따라 변하지 않을까 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오늘은 좋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변할지 불안합니다. 그러나 지혜에 대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지혜 여인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찾으면 지혜 여인은 우리를 만나 줍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찾다는 일찍 일어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일용할 양식을 먹고 성경을 읽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에 힘쓰는 것입니다.

  지혜 여인의 사랑을 입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19-21절을 보십시오.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지혜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의 귀한 것을 줍니다. 부귀, 장구한 재물, 공의를 줍니다. 지혜가 항상 함께 하고, 기쁨과 즐거움, 위로와 도움을 줍니다. 특별한 존재로 대합니다. 지혜의 사랑을 입은 자는 지혜로부터 귀한 것을 얻고, 지혜와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립니다.

  둘째, 태초부터 계셨던 지혜(22-36). 그러면 우리가 구해야 하는 지혜의 근원과 권위는 어떠합니까? 22-2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지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지혜 여인은 자신이 창조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지혜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왜 지혜의 기원을 말할까요? 인간의 지혜도 위대한 면이 많지만 태초 전부터 있었던 지혜는 그 출처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27-31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창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창 1:31). 지혜는 창조주 이십니다. 요한복음 1:1-3은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말씀(로고스)’이 잠언에서는 지혜(호크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는 죄로 인해 어리석은 길을 가는 인간들을 부르고 지혜의 길로 인도하고자 오셨습니다. 지혜 여인은 자신에게 ‘생명’이 있으며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거부하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지혜를 가르친 위대한 선생님이 아닙니다. 그는 지혜 자체요,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진리 안에,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이 남기신 말씀으로 지혜를 배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격적인 사귐으로 그 분의 지혜가 흘러나오고, 그분에게서 성육된 지혜가 나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기보다 지혜이신 존재와 하나가 되어 지혜의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야 할 것은 무심코 생각나는 대로, 끌리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입니다.

  32-36절을 보십시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지혜를 얻은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습니다. 지혜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이고 사망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지혜에게 들으며 날마다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왕비와 음녀의 잔치(9장). 지혜는 얼마나 완벽하고 풍성하게 잔치 준비를 하고 사람들을 초청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집을 지었는데, 일곱 기둥을 다듬은 집입니다. 이는 일곱 기둥이 세워진 집입니다. 많은 사람이 와도 좁아서 돌아갈 일이 없는 크고 아름다운 집입니다. 이 집은 가장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혜는 영원한 진리이기에 일곱 기둥을 세운 집과 같습니다.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이 완전합니다. 지혜 위에 세워진 인생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매우 아름답습니다. 지혜가 준비한 음식은 풍성합니다. 지혜의 초청은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혼인 잔치 비유와 같이 완벽하고 풍성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고대에는 고기가 사치품이었는데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합니다. 지혜 여인은 그들이 자기 집에 와서 자신과 함께 식사를 나누도록 초대합니다. 지혜 여인이 원하는 것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반면에 미련한 여인이 초청하는 잔치는 어떠합니까? 13-18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미련한 여인은 시끄럽게 떠듭니다. 혼란스럽고 교란시키는 잡음을 냅니다, 너무나 무지해서 자신의 무지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무의미하거나 잠재적으로 해로운 발언을 합니다. 미련한 여인의 집은 이방 신전입니다. 

  지혜 왕비가 대낮에 공개적으로 초청하는데 음녀는 밤에 은밀한 곳에서 유혹합니다. 그녀는 자기 길을 바로 가는 사람을 부릅니다. 이는 초청이라기보다 유혹이요, 유인입니다. 자기 길을 바로 계속 갔으면 좋았을 텐테 미련한 여인의 말에 귀 기울인 것이 문제입니다. ‘도둑질한 물’, ‘몰래 먹는 떡’은 부부 관계를 떠난 불륜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불륜은 달콤하고 유혹적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초청에 따라가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는 순간의 쾌락을 따라 가지만 그곳이 죽음의 장소인 줄도 모르고 따라갑니다. 미련한 여인을 따라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왕비가 좋은 음식을 차려 놓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음란한 여인에게는 자기 발로 찾아가 유혹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혜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지혜의 초청을 부담스러워하고 그것이 자신을 불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리석고 악한 유혹에는 곁눈질을 하며 침까지 흘립니다. 왜 우리의 본성은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는 관심이 없고 악하고 추하고 거짓된 것에는 흥미를 보일까요?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두면 어리석은 길로 자연스럽게 기웁니다. 그 길 끝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힙니다.  거만한 사람은 교만하고 완고하고 비판을 거부하고 책망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이렇게 책망을 싫어하는 거만한 자는 결국 홀로 해를 당하게 됩니다. 책망을 하는 것도 책망을 받는 것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깊은 배려 속에서 그 사람 또는 나 자신의 느낌과 경험 그리고 행동에 대해서 깊이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왜곡된 행동에 대해서 깨닫고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모호하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부정적이 되어 ‘해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문제를 분명히 알고 나면 어느 정도 혼란을 겪고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나의 부족한 점이나 고쳐야 할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 말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고칠 것인지 방법을 정합니다. 결심을 하고 누구에게 확인받을 것인지 정합니다. 책망을 듣고 돌이키면 어떻게 될까요?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면 그가 나를 사랑합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면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면 그의 학식이 더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단순한 존중도 아니고 완전한 공포도 아닙니다. 경외함은 둘 사이의 중간에 있습니다. 사람은 우월한 힘을 두려워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여호와가 자신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외함은 순종을 동반합니다. 여호와를 떠나서는 어떤 지혜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온 세상에 가득한 지혜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경험, 교회와 사건들을 통해서 지혜를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또한 지혜의 초청 잔치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고 생명을 얻게 합니다. 반대로 음녀가 초청하는 잔치는 우리를 피폐하게 하고 결국 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혜의 초청과 음녀의 초청을 잘 분별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혜의 말씀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 삶, 지혜 되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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