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24강(15:1-47) 십자가에서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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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4강
말씀 | 마가복음 15:1-47
요절 | 마가복음 15:39
찬송/ 136장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빌라도의 재판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장례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침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를 말씀하셨는데 마가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첫째, 빌라도의 재판(1-15). 새벽에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다음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처형을 몹시 서둘렀습니다. 만약 안식일 다음날로 일이 미루어지면 그 사이에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의 체포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지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그들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급하게 밤에 두 차례에 걸쳐 불법 집회를 열어 예수님을 심문하고 다시 새벽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공회에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했는데, 재판장인 빌라도에게는 반란 수괴죄로 고소장을 변경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대 민족주의적 메시아사상에 적합하지 않으면서 메시아임을 시인한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군사적인 메시아가 아니면 로마법으로 처형할 수 없기에 일관성 없이 고소장을 바꾸어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유대인의 왕’은 반로마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사형을 판결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각 나라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서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범을 사형시킬 권한이 있었습니다(행4:1-22;5:17-42;7:55;26:10,11). 그들은 신성모독죄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는다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고 말했습니다(신 21:23).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선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는 로마 총독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수사였습니다. 그러니 아니라고는 못 할지언정 침묵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의 입으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십니다. 재판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연실색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당당하다 못해 마치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발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판결을 받아내려는 의도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 우려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집요하게 고발합니다. 재판관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변론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고소를 믿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고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0).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발당할 어떤 악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4). 예수님은 생사여탈권이 있는 재판관인 빌라도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스스로 변호하기를 거부하면 유죄로 추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빌라도가 보기에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아직도 충분히 풀려날 희망이 있는 상황에서도 그 희망의 가능성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예수님이 이상했습니다. 보통은 법관 앞에서 죄를 감량시키든지 살려고 애를 씁니다. 당시 총독에게 모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총독에게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그 흔한 존칭조차 쓰지 않습니다(행24:3). 아무 동요도 없고 침묵하시는데, 오히려 재판하는 총독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입증하고 풀어 주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죄가 없는 유대인의 왕 예수를 풀어주어야 마땅한데 정말 살인을 행하고 사형을 받아야 하는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니 재판정에 공의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소리질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무리는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16-41).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그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렇게 인사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군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런 모욕을 당하면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제대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온전히 마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살을 뚫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대못이 박힐 때에 까무러치고 또 까무러쳤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때가 제 삼시(로마시간 오전 9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못 박아 세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자를 믿을 만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자유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큰 유혹이자 짐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모든 순간에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성경은 지금 예수님이 왕에 오르시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의 왕이 되시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메시아의 죽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 우리를 위해 죽고 모든 고통을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무능한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믿음을 갖게 해 보라고, 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실 표적과 증거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최후에 승리하고 이기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제자들과 우리가 가야 할 본이 되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의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19-25).”
예수님은 숨지시기 전에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늘 함께 하셨고 역동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 예수님은 가장 깊은 고독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자의 고통, 나 혼자라는 슬픔과 두려움, 자신의 최후 보루인 하나님 아버지께마저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복음 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이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그가 이런 고독과 슬픔을 지신 이유는 우리를 치유하고 평화를 누리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음으로 우리는 그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 우리의 죄가 속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부관계가 깨어졌고 건강한 자아상도 깨어지고 육체마저 병들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용서를 위해서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바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됨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제 육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가장 밝을 때인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오후 세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지셨을 때(오후 3시)는 매일 어린 양 제사를 드리는 시간(오후 3-4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마저도 차마 이 광경을 바로 보실 수 없었던 듯이 온 땅이 어두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으심으로 무시무시한 고독을 체험하셨습니다. 어둠은 단절을 뜻하고 어둠이 임한 후에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부르짖음이 그를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찢어졌다는(막 1:10)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어진 것입니다. 휘장은 카페트와 같이 두꺼웠습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으로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새 길이 난 것입니다. 옛 질서의 종말이 오고 구속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 길은 산 길입니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이요, 축복과 생명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죠. 그는 지금까지 많은 사형수를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대하는 다른 죄수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보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황제에게 쓰던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황제를 숭배하고 황제에게 충성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은 어떻게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매달린 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보았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 때문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무한한 거룩함과 신성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이 처음부터 밝히고 알리고자 한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1:1). 하나님이 예수님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4).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에 산에서 변형되셨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9:7). 이제 마지막에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마가복음이 원하던 이 일이 로마 백부장을 통해 고백되고 성취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최초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버림받으심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죄사함과 영생을 받고 누리기를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장사되심(42-47).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사람 중에 변화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믿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마음이 담대해졌습니다. 그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세마포를 사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이 행동의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해서 거는 신앙의 모험을 단행했습니다. 아마 그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칭송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것들을 희생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었던 참으로 지혜롭고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 같지만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드러내는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형 판결을 받고, 군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나의 구원자로 등극하시는 과정 즉 왕의 즉위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는 진정한 왕이 되셨고,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5:1-47
요절 | 마가복음 15:39
찬송/ 136장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빌라도의 재판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장례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침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를 말씀하셨는데 마가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첫째, 빌라도의 재판(1-15). 새벽에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다음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처형을 몹시 서둘렀습니다. 만약 안식일 다음날로 일이 미루어지면 그 사이에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의 체포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지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그들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급하게 밤에 두 차례에 걸쳐 불법 집회를 열어 예수님을 심문하고 다시 새벽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공회에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했는데, 재판장인 빌라도에게는 반란 수괴죄로 고소장을 변경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대 민족주의적 메시아사상에 적합하지 않으면서 메시아임을 시인한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군사적인 메시아가 아니면 로마법으로 처형할 수 없기에 일관성 없이 고소장을 바꾸어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유대인의 왕’은 반로마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사형을 판결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각 나라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서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범을 사형시킬 권한이 있었습니다(행4:1-22;5:17-42;7:55;26:10,11). 그들은 신성모독죄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는다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고 말했습니다(신 21:23).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선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는 로마 총독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수사였습니다. 그러니 아니라고는 못 할지언정 침묵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의 입으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십니다. 재판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연실색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당당하다 못해 마치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발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판결을 받아내려는 의도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 우려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집요하게 고발합니다. 재판관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변론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고소를 믿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고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0).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발당할 어떤 악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4). 예수님은 생사여탈권이 있는 재판관인 빌라도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스스로 변호하기를 거부하면 유죄로 추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빌라도가 보기에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아직도 충분히 풀려날 희망이 있는 상황에서도 그 희망의 가능성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예수님이 이상했습니다. 보통은 법관 앞에서 죄를 감량시키든지 살려고 애를 씁니다. 당시 총독에게 모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총독에게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그 흔한 존칭조차 쓰지 않습니다(행24:3). 아무 동요도 없고 침묵하시는데, 오히려 재판하는 총독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입증하고 풀어 주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죄가 없는 유대인의 왕 예수를 풀어주어야 마땅한데 정말 살인을 행하고 사형을 받아야 하는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니 재판정에 공의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소리질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무리는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16-41).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그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렇게 인사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군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런 모욕을 당하면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제대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온전히 마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살을 뚫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대못이 박힐 때에 까무러치고 또 까무러쳤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때가 제 삼시(로마시간 오전 9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못 박아 세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자를 믿을 만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자유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큰 유혹이자 짐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모든 순간에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성경은 지금 예수님이 왕에 오르시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의 왕이 되시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메시아의 죽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 우리를 위해 죽고 모든 고통을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무능한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믿음을 갖게 해 보라고, 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실 표적과 증거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최후에 승리하고 이기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제자들과 우리가 가야 할 본이 되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의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19-25).”
예수님은 숨지시기 전에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늘 함께 하셨고 역동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 예수님은 가장 깊은 고독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자의 고통, 나 혼자라는 슬픔과 두려움, 자신의 최후 보루인 하나님 아버지께마저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복음 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이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그가 이런 고독과 슬픔을 지신 이유는 우리를 치유하고 평화를 누리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음으로 우리는 그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 우리의 죄가 속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부관계가 깨어졌고 건강한 자아상도 깨어지고 육체마저 병들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용서를 위해서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바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됨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제 육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가장 밝을 때인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오후 세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지셨을 때(오후 3시)는 매일 어린 양 제사를 드리는 시간(오후 3-4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마저도 차마 이 광경을 바로 보실 수 없었던 듯이 온 땅이 어두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으심으로 무시무시한 고독을 체험하셨습니다. 어둠은 단절을 뜻하고 어둠이 임한 후에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부르짖음이 그를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찢어졌다는(막 1:10)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어진 것입니다. 휘장은 카페트와 같이 두꺼웠습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으로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새 길이 난 것입니다. 옛 질서의 종말이 오고 구속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 길은 산 길입니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이요, 축복과 생명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죠. 그는 지금까지 많은 사형수를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대하는 다른 죄수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보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황제에게 쓰던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황제를 숭배하고 황제에게 충성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은 어떻게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매달린 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보았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 때문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무한한 거룩함과 신성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이 처음부터 밝히고 알리고자 한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1:1). 하나님이 예수님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4).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에 산에서 변형되셨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9:7). 이제 마지막에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마가복음이 원하던 이 일이 로마 백부장을 통해 고백되고 성취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최초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버림받으심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죄사함과 영생을 받고 누리기를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장사되심(42-47).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사람 중에 변화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믿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마음이 담대해졌습니다. 그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세마포를 사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이 행동의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해서 거는 신앙의 모험을 단행했습니다. 아마 그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칭송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것들을 희생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었던 참으로 지혜롭고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 같지만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드러내는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형 판결을 받고, 군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나의 구원자로 등극하시는 과정 즉 왕의 즉위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는 진정한 왕이 되셨고,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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