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 15강(9:30-50)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24년 마가복음 15강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자신이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쟁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큰 자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버림받을 준비를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겪어야 합니다. 마치 물건 넘기듯이 인격이나 의지가 묵살된 채 투명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죄를 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료하고, 폭풍우까지도 다스리고 죽음까지 통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넘겨지지만, 넘기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사람들의 손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기록된 말씀대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9:12).
예수님께서 33세인데 한참 꽃을 피워야 할 나이에 버림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는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20대의 젊은이들입니다. 고난이 싫고 죽음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죽는다는 말씀이 불행하고 비극적인 미래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어보기도 두려워한 이유는 자신들이 원치 않는 대답이 예상되고 있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회피하였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버림받고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황당한 소리를 하신다며 들이대고 반발하였는데 이제는 더디고 답답하지만 마음에 생각을 하고 서로 물으면서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누가 위대한 자인가?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였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크게 되고자 하는 소원 자체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진 천성적인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성품을 닮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큰 것이고 어떻게 위대한 품격을 갖추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어야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어야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끝에 있는 사람과 가까워져봤자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끝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드러나지도 않고 효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 싶은 제자들에게 뭇 사람의 끝이 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상하고 생각하던 첫째 되는 조건 혹은 첫째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끝으로 가라고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보통 끝에 있는 사람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고, 관심을 덜 받거나 무시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 있으나마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첫째는 내 뒤에 뭇 사람을 세우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는 내 앞에 뭇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사람은 맨 끝에 있는 사람 뒤로 가는 것이고, 맨 끝에 있는 사람을 내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해 갈수록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앞에서 자신의 무익함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맨 끝에 있는 사람, 문제 많은 사람,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섬겨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 뒤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과 가까워지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지금 잘 나가는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그 사람의 독특한 위대함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아서 발휘하고 섬길 때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은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과 섬김을 받으려는 욕구 때문에 생깁니다. 부부끼리 왜 싸울까요? 아내는 남편이 섬겨주기를 바라는데 안 섬기고, 남편은 아내가 섬겨주기를 바라는 데, 안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그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이 섬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다 나의 섬김을 받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왜 출세하려고 하는가? 더 섬기기 위해서, 나를 섬겨줄 사람을 늘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을 섬기는 것에 두면 참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라고 생각이 되지만 크리스천의 삶의 자유가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섬김은 무분별한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섬김에는 지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지만 부자 청년을 사랑하사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며 섬기셨습니다. 아주 인격적인 섬김입니다. 섬기는데 끊임없이 요구할 때는 짜증이 납니다. 섬김의 동기는 사랑이고 목표는 그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섬김이 쉽지 않기에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섬김을 연습하다 보면 섬김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줄어들고, 섬기는 삶에서 자라 성숙한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내가 섬기면 상대방이 무엇을 내게 줄거다, 이런 섬김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방적으로 섬겨주라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섬겨주라는 거죠. 나를 섬겨줄 수 없는 사람, 되갚을 수 없는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섬김이 아니라 자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섬기는 종 예수님을 닮아가는 가장 큰 상급이 무엇일까요? 자유함입니다. 기쁨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는 순수하고 잘 배우고 겸손한 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어린 아이는 계속 섬겨야 합니다. 섬겨 주어도 감사한 줄을 잘 모릅니다. 이기적이고 버릇이 없습니다. 하는 행동이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를 섬기는 것은 손이 많이 갑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로, 예수님을 대표하여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안아주십니다. 예수님 뒤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혹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신성하고 위대한 행동으로 보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45).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가족처럼 환영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 즉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5).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셋째, 다른 공동체까지 포용하는 섬김. 지금까지 공동체 내부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셨다면, 이제 공동체 외부,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게 첫째 되는 길인지 가르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우리 그룹이 아니라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서 다른 그룹들을 배척하고 무시했습니다. 요한은 귀신을 쫓는 권한을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권세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도록 주신 권세를 특권 혹은 권력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 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귀신 쫓아내는 권세를 가진 사람을 볼 때 위기의식을 느끼며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기들만 했는데, 이제는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자 인정하고 싶지 않고, 아예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예수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포용의 범위가 점점 넓어집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로 넓어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을 주는 자에게 상급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 다른 단체에서도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에게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로서 다른 교회나 단체의 다양성과 차이점을 인정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동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만으로 호의를 베푸는 아주 작은 행동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철저해야 할까요?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작은 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할까요? 42,43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나의 손이 죄를 짓게 만들면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또 발이 죄를 범하는 곳으로 향하거든 찍어 버리고, 눈이 나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작은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아서 무시했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작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행동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할 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실족시키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상처를 줄 경우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각오를 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손과 발과 눈은 얼마나 소중한 신체의 일부입니까? 공동체 안에서 첫째가 되려고 하다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실족하게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은 맛을 냅니다. 5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소금으로서 그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를 잃어버리면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쓸모없게 됩니다. 서로 큰 자가 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공동체를 맛없게 만듭니다. 제자 공동체가 화목하기 위해서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지는 것처럼 자기희생을 해야 합니다. 소금을 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서 섬기고 포용하라는 뜻입니다. 부패한 세상을 회복시키고 썩지 않게 하는 힘은 제자들이 모든 사람의 끝으로 가서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 제자들이 서로 화목하게 됩니다. 화목한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화평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종이 되어 섬기고 어린 아이 같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환영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자신이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쟁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큰 자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버림받을 준비를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겪어야 합니다. 마치 물건 넘기듯이 인격이나 의지가 묵살된 채 투명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죄를 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료하고, 폭풍우까지도 다스리고 죽음까지 통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넘겨지지만, 넘기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사람들의 손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기록된 말씀대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9:12).
예수님께서 33세인데 한참 꽃을 피워야 할 나이에 버림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는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20대의 젊은이들입니다. 고난이 싫고 죽음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죽는다는 말씀이 불행하고 비극적인 미래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어보기도 두려워한 이유는 자신들이 원치 않는 대답이 예상되고 있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회피하였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버림받고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황당한 소리를 하신다며 들이대고 반발하였는데 이제는 더디고 답답하지만 마음에 생각을 하고 서로 물으면서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누가 위대한 자인가?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였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크게 되고자 하는 소원 자체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진 천성적인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성품을 닮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큰 것이고 어떻게 위대한 품격을 갖추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어야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어야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끝에 있는 사람과 가까워져봤자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끝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드러나지도 않고 효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 싶은 제자들에게 뭇 사람의 끝이 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상하고 생각하던 첫째 되는 조건 혹은 첫째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끝으로 가라고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보통 끝에 있는 사람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고, 관심을 덜 받거나 무시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 있으나마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첫째는 내 뒤에 뭇 사람을 세우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는 내 앞에 뭇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사람은 맨 끝에 있는 사람 뒤로 가는 것이고, 맨 끝에 있는 사람을 내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해 갈수록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앞에서 자신의 무익함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맨 끝에 있는 사람, 문제 많은 사람,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섬겨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 뒤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과 가까워지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지금 잘 나가는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그 사람의 독특한 위대함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아서 발휘하고 섬길 때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은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과 섬김을 받으려는 욕구 때문에 생깁니다. 부부끼리 왜 싸울까요? 아내는 남편이 섬겨주기를 바라는데 안 섬기고, 남편은 아내가 섬겨주기를 바라는 데, 안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그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이 섬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다 나의 섬김을 받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왜 출세하려고 하는가? 더 섬기기 위해서, 나를 섬겨줄 사람을 늘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을 섬기는 것에 두면 참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라고 생각이 되지만 크리스천의 삶의 자유가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섬김은 무분별한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섬김에는 지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지만 부자 청년을 사랑하사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며 섬기셨습니다. 아주 인격적인 섬김입니다. 섬기는데 끊임없이 요구할 때는 짜증이 납니다. 섬김의 동기는 사랑이고 목표는 그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섬김이 쉽지 않기에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섬김을 연습하다 보면 섬김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줄어들고, 섬기는 삶에서 자라 성숙한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내가 섬기면 상대방이 무엇을 내게 줄거다, 이런 섬김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방적으로 섬겨주라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섬겨주라는 거죠. 나를 섬겨줄 수 없는 사람, 되갚을 수 없는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섬김이 아니라 자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섬기는 종 예수님을 닮아가는 가장 큰 상급이 무엇일까요? 자유함입니다. 기쁨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는 순수하고 잘 배우고 겸손한 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어린 아이는 계속 섬겨야 합니다. 섬겨 주어도 감사한 줄을 잘 모릅니다. 이기적이고 버릇이 없습니다. 하는 행동이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를 섬기는 것은 손이 많이 갑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로, 예수님을 대표하여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안아주십니다. 예수님 뒤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혹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신성하고 위대한 행동으로 보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45).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가족처럼 환영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 즉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5).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셋째, 다른 공동체까지 포용하는 섬김. 지금까지 공동체 내부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셨다면, 이제 공동체 외부,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게 첫째 되는 길인지 가르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우리 그룹이 아니라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서 다른 그룹들을 배척하고 무시했습니다. 요한은 귀신을 쫓는 권한을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권세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도록 주신 권세를 특권 혹은 권력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 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귀신 쫓아내는 권세를 가진 사람을 볼 때 위기의식을 느끼며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기들만 했는데, 이제는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자 인정하고 싶지 않고, 아예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예수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포용의 범위가 점점 넓어집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로 넓어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을 주는 자에게 상급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 다른 단체에서도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에게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로서 다른 교회나 단체의 다양성과 차이점을 인정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동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만으로 호의를 베푸는 아주 작은 행동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철저해야 할까요?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작은 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할까요? 42,43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나의 손이 죄를 짓게 만들면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또 발이 죄를 범하는 곳으로 향하거든 찍어 버리고, 눈이 나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작은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아서 무시했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작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행동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할 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실족시키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상처를 줄 경우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각오를 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손과 발과 눈은 얼마나 소중한 신체의 일부입니까? 공동체 안에서 첫째가 되려고 하다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실족하게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은 맛을 냅니다. 5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소금으로서 그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를 잃어버리면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쓸모없게 됩니다. 서로 큰 자가 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공동체를 맛없게 만듭니다. 제자 공동체가 화목하기 위해서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지는 것처럼 자기희생을 해야 합니다. 소금을 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서 섬기고 포용하라는 뜻입니다. 부패한 세상을 회복시키고 썩지 않게 하는 힘은 제자들이 모든 사람의 끝으로 가서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 제자들이 서로 화목하게 됩니다. 화목한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화평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종이 되어 섬기고 어린 아이 같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환영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