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28강(18:1-17)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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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8 강
말씀 | 누가복음 18:1-17
요절 | 누가복음 18: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조지 뮬러는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거짓과 도둑질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1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절제를 모르는 삶을 살았고, 16세에 절도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꺼내서 때리고 난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는 할례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였던 1825년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았는데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그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어째서 행복한지 질문을 받았더라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말씀을 전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영국으로 건너갔고 덕분에 은혜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윌슨 가에 주택을 빌려 30명의 고아들로 고아 사역을 시작하여 무려 일만 명의 고아들을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과 기도로 보살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낙망하지 않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첫째, 한 과부와 재판관 비유(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낙심이 되는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가 생각하는 때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니 낙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또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를 누리며 행복해야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오래 동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몇 사람을 위해서 50년 이상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했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를 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병을 앓든지, 뭍이나 바다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이 몹시 분주하더라도 늘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18개월이 지나자 한 사람이 회심했습니다. 5년 후에 또 다른 사람이 회심했고, 나머지 셋을 위해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기도한 덕분에 세 번째 사람 역시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을 위해서 36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회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할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서 회심하였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장에게서 약자에 대한 존중이나 긍휼 공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간청했습니다. 과부는 그 당시 가장 배경 없고 가난하고 무시 받는 약자의 대명사와 같았습니다. 이 과부가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체 만 체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청을 거절당한 과부가 날마다 계속 찾아왔습니다. 만나주지 않자 출근시간에 아예 사무실 입구에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와 호소를 했습니다. 점심 먹고자 사무실 나설 때도 기다리고 있다 달려와 호소하고 저녁에는 집까지 따라오며 호소했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가 너무나 자신을 성가시게 하니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괴롭게 하리라’는 말은 어떤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자 한 것은 과부가 끈질기게 찾아와 공의롭게 해 달라고 호소함으로 너무나 자기를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것이고 사람들은 재판관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재판관은 마침내 명예도 특권도 상실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불의한 재판장도 그렇게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는 분이십니다(신10:18) 또 우리는 누구입니까? 불의한 재판장에게 있어 하찮은 과부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부르짖는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히 풀어주십니다. 오래 참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수 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원한 맺힌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풀지 않으면 억울해서 죽을 것 같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쉬지 않고 공격을 합니다.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도록 역사합니다. 세상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도록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도록 역사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 중임을 안다면 원수의 공격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욕심을 부추겨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 ‘원한’은 ‘공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도록 항상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명의 제자라도 가정 교회에서 키울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오늘날 캠퍼스 복음역사가 힘들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불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 나라에 복음을 통한 평화 통일을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9-14).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며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 의가 가득했습니다. 죄인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자기는 그렇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해 해야 합니다. 사람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하나님의 빛 앞에 우리는 다 시커먼 죄인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량한 자기 의에 빠져 자랑하는 그를 볼 때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행위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왔지만 감히 성전 앞에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머리를 쳐들고 기도했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는 죄인이라며 기도합니다. 시51:17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할까요? 세리와 같이 통회하는 심령으로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롭다 여겨주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해서 선을 행합니다. 신자는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교만해지거나 자랑거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참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확산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라(15-17).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면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쁘고 피곤하신데 애들을 그렇게 자꾸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꾸짖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많으면 시끄럽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손이 많이 갑니다. 당시에 어린 아이들은 사람 숫자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린이들은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종종 학대의 대상이 되고 한 인격체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6).” 하나님 나라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고, 어떤 특권도 주장할 수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약하고 무시 받고 쓸모없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섬기는 사람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정직합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늙고 생각이 복잡하고 세속적이고 계산적입니까?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고 현실적입니까? 우리가 낡고 늙은 마음을 회개합시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순수하게 간절하게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고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 의존과 절대 신뢰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있습니다. 미혼인 분들은 결혼에 대한 염려, 결혼을 한 분들은 아이들 학비에 대한 염려, 자녀들을 출가시킨 분들은 자신의 노후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등 매일 매일 염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이런 염려를 다 맡겨야 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주님의 돌보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몇 번이고 거듭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장차 부족해 질 것에 대해서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한 동안 기도했다고 해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인내와 믿음의 자세로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실패 할 때가 있습니다. 축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고 축복을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기꺼이 공급해주시며 고아들의 필요를 채우심을 믿고 기도했을 때 한 끼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도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외면해 보이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사역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치명적인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주님을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때일수록 계속 말씀을 읽어야 은혜를 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지 않으면 않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영적으로 점점 무뎌지고 안일해 집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와 성경 읽기를 격려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법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그렇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과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치기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며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8:1-17
요절 | 누가복음 18: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조지 뮬러는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거짓과 도둑질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1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절제를 모르는 삶을 살았고, 16세에 절도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꺼내서 때리고 난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는 할례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였던 1825년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았는데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그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어째서 행복한지 질문을 받았더라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말씀을 전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영국으로 건너갔고 덕분에 은혜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윌슨 가에 주택을 빌려 30명의 고아들로 고아 사역을 시작하여 무려 일만 명의 고아들을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과 기도로 보살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낙망하지 않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첫째, 한 과부와 재판관 비유(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낙심이 되는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가 생각하는 때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니 낙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또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를 누리며 행복해야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오래 동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몇 사람을 위해서 50년 이상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했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를 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병을 앓든지, 뭍이나 바다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이 몹시 분주하더라도 늘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18개월이 지나자 한 사람이 회심했습니다. 5년 후에 또 다른 사람이 회심했고, 나머지 셋을 위해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기도한 덕분에 세 번째 사람 역시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을 위해서 36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회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할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서 회심하였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장에게서 약자에 대한 존중이나 긍휼 공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간청했습니다. 과부는 그 당시 가장 배경 없고 가난하고 무시 받는 약자의 대명사와 같았습니다. 이 과부가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체 만 체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청을 거절당한 과부가 날마다 계속 찾아왔습니다. 만나주지 않자 출근시간에 아예 사무실 입구에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와 호소를 했습니다. 점심 먹고자 사무실 나설 때도 기다리고 있다 달려와 호소하고 저녁에는 집까지 따라오며 호소했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가 너무나 자신을 성가시게 하니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괴롭게 하리라’는 말은 어떤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자 한 것은 과부가 끈질기게 찾아와 공의롭게 해 달라고 호소함으로 너무나 자기를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것이고 사람들은 재판관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재판관은 마침내 명예도 특권도 상실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불의한 재판장도 그렇게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는 분이십니다(신10:18) 또 우리는 누구입니까? 불의한 재판장에게 있어 하찮은 과부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부르짖는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히 풀어주십니다. 오래 참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수 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원한 맺힌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풀지 않으면 억울해서 죽을 것 같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쉬지 않고 공격을 합니다.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도록 역사합니다. 세상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도록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도록 역사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 중임을 안다면 원수의 공격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욕심을 부추겨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 ‘원한’은 ‘공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도록 항상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명의 제자라도 가정 교회에서 키울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오늘날 캠퍼스 복음역사가 힘들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불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 나라에 복음을 통한 평화 통일을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9-14).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며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 의가 가득했습니다. 죄인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자기는 그렇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해 해야 합니다. 사람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하나님의 빛 앞에 우리는 다 시커먼 죄인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량한 자기 의에 빠져 자랑하는 그를 볼 때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행위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왔지만 감히 성전 앞에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머리를 쳐들고 기도했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는 죄인이라며 기도합니다. 시51:17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할까요? 세리와 같이 통회하는 심령으로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롭다 여겨주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해서 선을 행합니다. 신자는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교만해지거나 자랑거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참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확산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라(15-17).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면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쁘고 피곤하신데 애들을 그렇게 자꾸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꾸짖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많으면 시끄럽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손이 많이 갑니다. 당시에 어린 아이들은 사람 숫자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린이들은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종종 학대의 대상이 되고 한 인격체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6).” 하나님 나라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고, 어떤 특권도 주장할 수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약하고 무시 받고 쓸모없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섬기는 사람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정직합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늙고 생각이 복잡하고 세속적이고 계산적입니까?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고 현실적입니까? 우리가 낡고 늙은 마음을 회개합시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순수하게 간절하게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고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 의존과 절대 신뢰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있습니다. 미혼인 분들은 결혼에 대한 염려, 결혼을 한 분들은 아이들 학비에 대한 염려, 자녀들을 출가시킨 분들은 자신의 노후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등 매일 매일 염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이런 염려를 다 맡겨야 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주님의 돌보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몇 번이고 거듭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장차 부족해 질 것에 대해서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한 동안 기도했다고 해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인내와 믿음의 자세로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실패 할 때가 있습니다. 축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고 축복을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기꺼이 공급해주시며 고아들의 필요를 채우심을 믿고 기도했을 때 한 끼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도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외면해 보이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사역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치명적인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주님을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때일수록 계속 말씀을 읽어야 은혜를 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지 않으면 않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영적으로 점점 무뎌지고 안일해 집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와 성경 읽기를 격려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법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그렇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과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치기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며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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