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 27강(17:20-37) 인자가 나타나는 날
페이지 정보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 27 강
말씀 | 누가복음 17:20-37
요절 | 누가복음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성경의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세상은 종말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급격하게,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임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완전성과는 관계가 없고,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권능으로써 임하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자의 날에 대해서 배우는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교훈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은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20). 또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6:16).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이고 현세적으로 임하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를 몰아내고 새 나라를 건설하실 것인데, 그 나라는 다윗 왕국의 재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어떠합니까? 빈부 격차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게 되는 나라,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 모든 불의가 없어지고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나라, 국가 및 민족 간의 전쟁과 사나움, 폭력이 없어지고 가장 약한 자라도 두려움 없이 살게 되는 나라를 소망합니다. 만물이 회복되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그 나라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0b,21).”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하나님 나라 관념을 지적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판을 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라들이 많습니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일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제자들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자기 밖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고 하나님 나라는 외부에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외부에만 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하나님 나라는 곧 부패하고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지역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서 ‘안에’라는 말은 그들 ‘가운데’, ‘사이에’로 번역을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 공동체 가운데,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공의와 인애가 실현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만약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 속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공의와 평화와 기쁨, 그의 은혜와 축복을 누립니다. 세상 나라는 늘 변하고, 시끄럽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 충만한 생명력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왕이 되셔서 나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양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리며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구원할 사람들을 이끄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시며 자신의 구속 역사를 친히 그의 열심으로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조직이나 인간관계에 나타납니다. 사회에 공의가 퍼져나가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고, 어린이와 약자들의 권익이 증진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퍼져나가게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인간 주변에 있는 피조물의 세계에 까지 다 미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처럼 우주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때가 이른다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인자의 날입니다. 다시 오신 예수님은 심판의 권세를 갖고 사탄의 모든 통치를 종식시키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그 날은 영광과 승리의 날이요 모든 믿는 자들이 보기를 소망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오지만 제자들은 인자의 날 하루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제자들이 살아서 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라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지만 그들은 가지도 말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입니다(23).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오시는 날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밀스럽게 여기에 임하고 저기에 임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주가 그리스도라며 그가 이미 재림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다 거짓말입니다.
22절에서 제자들은 인자의 날을 보고자 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이 날에 그들의 의로움에 대해서 인정을 받고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날이 임하는 증거를 두루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날을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십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에 진리를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인자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순교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인자의 날은 승리와 영광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노아의 때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 있기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심판의 때를 준비하지 않고 세상 일에 몰두한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홍수 심판이 오자 다 멸망했습니다. 인자의 때에도 사람들은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롯의 때와도 같을 것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8,29).” 롯의 때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며 상거래와 부동산으로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 심판이 오자 다 멸망했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입니다(30). 사람들은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세상 일에 빠져들어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기에 별 문제 의식이 없이 세상의 일락을 즐기며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멸망의 날이 닥칠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심판에 대해서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가 심판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 평가받을 것을 알 때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십니다. 요즈음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해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퍼지고 있고 어떻게 피할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에 힘쓰고 내적 외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처는 소돔 성에 남겨둔 재산과 명품 가방, 보석 등에 대한 미련으로 심판의 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인자의 날, 롯의 처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집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밭에 있는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날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이기적인 욕심과 미련에 따라 행동하면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인자의 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세상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훨씬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주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롯의 처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밤에 일상적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각각 어떻게 됩니까? 34-3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아버지와 아들, 또는 친구가 밤에 잠을 자다가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데려감을 당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주검이 있는 곳에 썩은 고기를 먹으려는 독수리가 모입니다. 예수님은 이 속담을 통해 죄로 인해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즉 그들이 데려감을 당할 곳은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장소가 결정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정 요인은 사람 자체입니다. 심판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날의 구별은 내가 어떤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믿음과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어느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거나 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능력 있는 모임에 있다거나, 혹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 내가 있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결정 요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인자의 날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그 날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죄악과 물질에 기초한 안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믿음으로 살아 인자가 나타나는 그 날에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하루 하루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써야 합니다.
한때 신촌 로터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땅 부자였던 이종웅씨는 사업 실패 후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63년 서울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고 65년 서울대 공대 기독학생회 초대회장이 됐습니다. 졸업 직후인 70년 할아버지로부터 신촌역 앞 건물을 물려받아 광신서점을 차렸습니다. 당시 신촌 로터리 3분의 1가량이 그 집안 소유였습니다. 그는 신촌 일대에 의류 대리점을 여럿 차리며 사업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종합건설 회사를 인수해 강원 지역 도로포장을 도맡아 했고 83년에는 홍대입구역 앞에 서교호텔을 세웠습니다. 호텔이 흑자를 내자 85년 신촌 그랜드마트의 전신인 크리스탈 백화점을 지었습니다. 이때 첫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백화점 분양 실패 이후 직영을 하며 매년 50여억원의 적자를 냈고 부도가 났고 90년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서 3개월을 복역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호텔 사장할 때 편안해하더니 평안하더냐.” 그는 “지금까지 편리를 위해 살았지 평안을 위해 살아온 적은 없었다”고 반성했습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를 때면 옆방 수감자들도 창살을 붙들고 함께 눈물 흘렸습니다. 두 번째 시련은 콩팥 통증이 출소 후 재발했고 93년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목사는 중환자실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섰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전도한 사람 10명을 써 보아라”고 말했지만 한 명도 쓸 수 없었습니다. 다음 해 서울대에서 노방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돈과 건강 모두를 잃은 후였습니다. 캠퍼스 계단에 걸터앉자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청년이 이 목사를 따라 예수님 믿기를 약속하고 나서야 아팠던 마음이 눈 녹듯 풀렸습니다. 이 목사는 “백화점과 호텔 사장도 해 봤지만 그때와 같은 감동이 몰려온 적은 없었다”며 “한 영혼이 들어오면 천국에서 잔치가 일어난다고 하는 게 이 말씀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서울대 기독교수기도회 설립과 문화관 대강당 전도집회, 기독인 오리엔테이션 등을 주도하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삶의 밑바닥에서 비로소 빛을 찾았습니다. 삶을 반추하며 그를 웃게 만든 순간은 돈도 명예도 아닌 단 한 명의 전도였습니다(국민일보 2017.8.31.).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 함께 기뻐하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며 복음 전도와 수요 캠퍼스 바이블 까페를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거룩함과 경건함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7:20-37
요절 | 누가복음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성경의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세상은 종말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급격하게,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임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완전성과는 관계가 없고,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권능으로써 임하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자의 날에 대해서 배우는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교훈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은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20). 또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6:16).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이고 현세적으로 임하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를 몰아내고 새 나라를 건설하실 것인데, 그 나라는 다윗 왕국의 재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어떠합니까? 빈부 격차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게 되는 나라,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 모든 불의가 없어지고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나라, 국가 및 민족 간의 전쟁과 사나움, 폭력이 없어지고 가장 약한 자라도 두려움 없이 살게 되는 나라를 소망합니다. 만물이 회복되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그 나라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0b,21).”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하나님 나라 관념을 지적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판을 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라들이 많습니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일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제자들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자기 밖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고 하나님 나라는 외부에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외부에만 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하나님 나라는 곧 부패하고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지역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서 ‘안에’라는 말은 그들 ‘가운데’, ‘사이에’로 번역을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 공동체 가운데,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공의와 인애가 실현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만약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 속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공의와 평화와 기쁨, 그의 은혜와 축복을 누립니다. 세상 나라는 늘 변하고, 시끄럽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 충만한 생명력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왕이 되셔서 나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양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리며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구원할 사람들을 이끄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시며 자신의 구속 역사를 친히 그의 열심으로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조직이나 인간관계에 나타납니다. 사회에 공의가 퍼져나가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고, 어린이와 약자들의 권익이 증진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퍼져나가게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인간 주변에 있는 피조물의 세계에 까지 다 미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처럼 우주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때가 이른다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인자의 날입니다. 다시 오신 예수님은 심판의 권세를 갖고 사탄의 모든 통치를 종식시키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그 날은 영광과 승리의 날이요 모든 믿는 자들이 보기를 소망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오지만 제자들은 인자의 날 하루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제자들이 살아서 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라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지만 그들은 가지도 말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입니다(23).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오시는 날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밀스럽게 여기에 임하고 저기에 임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주가 그리스도라며 그가 이미 재림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다 거짓말입니다.
22절에서 제자들은 인자의 날을 보고자 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이 날에 그들의 의로움에 대해서 인정을 받고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날이 임하는 증거를 두루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날을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십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에 진리를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인자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순교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인자의 날은 승리와 영광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노아의 때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 있기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심판의 때를 준비하지 않고 세상 일에 몰두한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홍수 심판이 오자 다 멸망했습니다. 인자의 때에도 사람들은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롯의 때와도 같을 것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8,29).” 롯의 때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며 상거래와 부동산으로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 심판이 오자 다 멸망했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입니다(30). 사람들은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세상 일에 빠져들어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기에 별 문제 의식이 없이 세상의 일락을 즐기며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멸망의 날이 닥칠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심판에 대해서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가 심판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 평가받을 것을 알 때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십니다. 요즈음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해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퍼지고 있고 어떻게 피할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에 힘쓰고 내적 외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처는 소돔 성에 남겨둔 재산과 명품 가방, 보석 등에 대한 미련으로 심판의 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인자의 날, 롯의 처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집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밭에 있는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날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이기적인 욕심과 미련에 따라 행동하면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인자의 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세상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훨씬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주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롯의 처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밤에 일상적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각각 어떻게 됩니까? 34-3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아버지와 아들, 또는 친구가 밤에 잠을 자다가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데려감을 당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주검이 있는 곳에 썩은 고기를 먹으려는 독수리가 모입니다. 예수님은 이 속담을 통해 죄로 인해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즉 그들이 데려감을 당할 곳은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장소가 결정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정 요인은 사람 자체입니다. 심판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날의 구별은 내가 어떤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믿음과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어느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거나 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능력 있는 모임에 있다거나, 혹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 내가 있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결정 요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인자의 날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그 날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죄악과 물질에 기초한 안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믿음으로 살아 인자가 나타나는 그 날에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하루 하루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써야 합니다.
한때 신촌 로터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땅 부자였던 이종웅씨는 사업 실패 후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63년 서울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고 65년 서울대 공대 기독학생회 초대회장이 됐습니다. 졸업 직후인 70년 할아버지로부터 신촌역 앞 건물을 물려받아 광신서점을 차렸습니다. 당시 신촌 로터리 3분의 1가량이 그 집안 소유였습니다. 그는 신촌 일대에 의류 대리점을 여럿 차리며 사업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종합건설 회사를 인수해 강원 지역 도로포장을 도맡아 했고 83년에는 홍대입구역 앞에 서교호텔을 세웠습니다. 호텔이 흑자를 내자 85년 신촌 그랜드마트의 전신인 크리스탈 백화점을 지었습니다. 이때 첫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백화점 분양 실패 이후 직영을 하며 매년 50여억원의 적자를 냈고 부도가 났고 90년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서 3개월을 복역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호텔 사장할 때 편안해하더니 평안하더냐.” 그는 “지금까지 편리를 위해 살았지 평안을 위해 살아온 적은 없었다”고 반성했습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를 때면 옆방 수감자들도 창살을 붙들고 함께 눈물 흘렸습니다. 두 번째 시련은 콩팥 통증이 출소 후 재발했고 93년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목사는 중환자실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섰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전도한 사람 10명을 써 보아라”고 말했지만 한 명도 쓸 수 없었습니다. 다음 해 서울대에서 노방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돈과 건강 모두를 잃은 후였습니다. 캠퍼스 계단에 걸터앉자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청년이 이 목사를 따라 예수님 믿기를 약속하고 나서야 아팠던 마음이 눈 녹듯 풀렸습니다. 이 목사는 “백화점과 호텔 사장도 해 봤지만 그때와 같은 감동이 몰려온 적은 없었다”며 “한 영혼이 들어오면 천국에서 잔치가 일어난다고 하는 게 이 말씀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서울대 기독교수기도회 설립과 문화관 대강당 전도집회, 기독인 오리엔테이션 등을 주도하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삶의 밑바닥에서 비로소 빛을 찾았습니다. 삶을 반추하며 그를 웃게 만든 순간은 돈도 명예도 아닌 단 한 명의 전도였습니다(국민일보 2017.8.31.).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 함께 기뻐하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며 복음 전도와 수요 캠퍼스 바이블 까페를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거룩함과 경건함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