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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 26강(17:1-19)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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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6회 작성일 17-08-2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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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6 강
말씀 | 누가복음 17:1-19
요절 | 누가복음 17: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매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용서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부담을 주는 죄에 대해서 용서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고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힘써 나아감으로 용서와 감사를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헬라어 ‘스칸달라’로써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는 말씀은 누구나 약하고 완전하지 못해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약함이 잘못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작은 자 하나’는 교회나 세상에서 주목 받지 못하는 약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 실족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던져져야 할 정도로 큰 문제입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이 실족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지도자의 관심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작은 자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내 사소한 언행이 연약한 한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한 번은 봄 소풍을 갔다가 <사랑해 당신을> 이라는 유행가를 불렀는데 그것을 듣고 한 형제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보니 미국 수양회 후에 시카고 미시건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저녁노을을 구경할 때 각국에서 온 목자들이 들떠서 노래를 할 때 영적인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도자는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못 본 체 하고 넘어가지 말고 책망하고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형제의 죄에 대해 책망해야 합니까? 형제의 죄를 방관하면 죄가 그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책망을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 같고 관계가 깨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책망은 간섭이 아닙니다. 책망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죄의 실체를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형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라(잠27:6).” “형제를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잠28:23).”

  그가 책망을 받아들여 회개하거든 용서해야 합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형제가 반복해서 죄를 짓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나중에는 용서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의문을 품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용서해도 마음으로는 꽁하고 있으면 그것이 전달되어 형제는 정죄의식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한 사람이 같은 죄를 지어도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끝작렬 때문에 사람을 실족시키면 안 됩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인천 송도를 다녀오다가 강변북로에서 가스가 떨어져서 차가 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유량을 계산해 보았는데 간당간당했습니다. 주유된 양에 비해서 너무 많은 거리를 운전을 했기 때문에 차가 서 버린 것입니다. 쌩쌩 거리며 달리는 차들 속에서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조웨슬레 목자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견인차가 와서 우리 차를 끌고 2Km 남짓한 주유소로 끌어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섬기다가 지쳐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견인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믿고 계속해서 용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다가 지치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들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도 속아서 선교사님들이 화를 내면 그들은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벌컥벌컥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며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피장파장입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범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용서를 생존의 도구로 여깁니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던 어린 시절, 실패를 반복하는 다이어트 등의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범죄 현장에서의 생존자들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피해를 입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몇 년 후에 그들의 발전 상황을 점검합니다. 용서는 매우 심오하여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다른 사람이 연관된 용서도 있으나 자기 자신과 관련된 용서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은 과거일 뿐입니다. 변하지 않을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남은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학교의 친구들과 직장의 동료들과 상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내가 회개하노라 하면서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무슨 요청을 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 생각에는 내게 사랑을 더 하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을까요? 이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죄 짓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뀔 것을 전제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나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은혜를 누리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볼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는 높이 10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뿌리도 10미터까지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뽕나무의 뿌리를 뽑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뽑힌 나무를 바다에 심기라고 하면 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가 뽑힐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죄의 뿌리가 깊어서 잘 변화되지 않는 습관들도 고쳐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게 막는 문제들에 대해 도전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도전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믿음 타령을 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뽑아야 할 뽕나무처럼 거대한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돕다가 한계에 부딪히고 사람을 돕고 섬길 사랑을 막는 죄 문제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오랫동안 깊이 뿌리 내려 뽑히지 않는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섬겨 세우려면 이런 문제를 뽑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미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섬기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염려하지만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계속 도전하여 믿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용서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의로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7-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내가 형제를 용서했다고 큰 일을 했다고 우쭐거리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 무익한 종의 자세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보상을 받기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유익을 드린 큰 일을 했다’는 교만한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자체가 축복과 즐거움인데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면 요구하고 불평하게 되고 주장하게 되어 행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상급을 잃게 합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제자들의 행복을 위해 주신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 서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본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았지만 낮아질대로 낮아진 그들은 자부심을 다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자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이 있는 성전을 향해 갔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본성은 변화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친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능히 자신들의 나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슬픈 운명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고 나음과 회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사건이 아닙니다. 핵심은 나음 받은 후 이야기에 있습니다. 나음 받은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왜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밝힐까요?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신앙과 혈통의 순수성을 잃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열 사람이 동일한 은혜를 받았고, 감사를 표현한다면 사마리아인보다 유대인이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이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인데, 예수님의 은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가라 하셔서 갔는데 왜 안 돌아왔다고 서운해 하시는 걸까요? 안 돌아와서 서운한 것이 아닙니다. 18절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나음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 해서 성공한 것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내가 잘 해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받은 은혜에 적극 감사를 표현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자인 로버트 에몬스, 마이애미 대학의 데이비스와 마이클 맥컬로는 감사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문제 자체를 중립적으로 기록하는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감사 목록을 쓰는 사람들이 개인의 중요한 목표에 더 빨리 도달하였습니다. 감사하는 것이 문제 극복의 최우선 방법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많은 사건들을 훨씬 더 잘 극복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홉 명이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물론 아홉 명도 제사장에게 가서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는 예수님이 성전이시고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제사장과 성전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용서도 근본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분만이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병에서 깨끗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열 사람 모두 믿음으로 나음 받았지만(14), 이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통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은 점에서 더 크고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감사는 우리를 예수님과 더 깊은 교제로 이끕니다. 은혜 받고 감사하면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제자의 길이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우리 삶을 더 깊은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제자의 길에 고난이 있지만 인상 쓰며 가지 않고 감사 찬양 영광 돌리며 가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 사랑의 관계성을 깊이 맺게 됩니다. 용서를 통해서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 지고 평안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살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가운데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용서의 능력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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