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 25강(16:1-31)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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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25 강
말씀 | 누가복음 16:1-31
요절 | 누가복음 16:9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돈을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남을 위해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 빌게이츠는 6월 6일 5조 25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기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어린 아이들에게 십일조와 기부에 대한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도록 경제 교육을 시킵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써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해야 합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인격이 드러나고 삶의 열매가 맺히고 미래가 달라집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세 비유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여기서 낭비한다는 단어는 15:13절에서 탕자가 재산을 허비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낭비하다, 뿔뿔이 흩어버리다는 뜻입니다. 작은 돈을 모아야 종자돈이 되고 그것을 가지고 일을 크게 벌일 수 있는데 있는 것을 뿔뿔이 흩어버리면 힘이 되지 않습니다. 고정주영씨는 10원도 모으면 큰 사업을 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과 재능도 흩어버리지 말고 모아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때 집중해야 하는데 여기 저기 흩어버리고 낭비를 했습니다.
주인은 자기 재산에 손해가 나니 청지기를 해고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통보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2).” 직분을 빼앗기게 된 청지기는 앞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 펜대나 굴리던 사람이 땅을 판다는 것은 힘이 없어서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4)” 그가 생각해낸 꾀는 직무를 정리하도록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대폭 탕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탕감 받은 사람들이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 청지기가 실직하고 나왔을 때 그를 영접하고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는지를 묻고 채무 액수를 줄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기름 백 말(100 바투스=약 3천 리터, 3년 치 품삯 정도)을 빚졌다는 사람에게는 그가 빚질 때 썼던 증서를 내주며 빨리 앉아 오십으로 줄여서 쓰라고 말했습니다. ‘빨리 앉아 이렇게 쓰라’고 한 말을 볼 때 청지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매우 급하게 일을 추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밀 백 석(100코루스= 35킬로리터, 1가마를 80kg으로 계산하면 437가마, 8~9년 치 품삯 정도)을 빚졌다고 하니 팔십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앞 사람의 경우는 50%를 줄여주었고 후자의 경우는 20%를 줄여주었습니다.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채무 규모를 줄여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탕감해준 액수가 원금에 붙은 이자이고, 그 이자는 청지기가 원래 받게 되어 있었던 커미션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채무자들에게는 상당한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였기 때문에 채무자들은 청지기에게 매우 큰 고마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고마움 때문에 청지기가 일을 그만두게 되어 찾아가면 기꺼이 영접하고 여러 모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도 이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함과는 별개로 그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그 청지기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나중을 생각해서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만들어둔 것입니다. 미래에 닥칠 일들을 알고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알지만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임기응변 능력이 좋아서 그런지 닥치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섬세한 마무리가 부족합니다. 또 건성건성 때우기 식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다보면 좀 더 완성도 있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8b).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신자들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오직 자신과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불신자들이 신자들보다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나중을 생각해서 자기 앞 일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물질을 가지고 친구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 그들보다 더 열심히 친구를 얻는데 물질을 투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후를 위해서는 준비를 하는데 사후를 위해서는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장래를 대비해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불의의 재물’이라는 표현은 없어지는 재물,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으로만 유용한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단지 재물을 모아 놓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귀어야 할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그와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그는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양들이 친구입니다. 복음의 동역자들은 일생을 함께 하는 친구들입니다. 이들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 재물을 써야 합니다. 또한 양들은 우리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데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 2차 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업가가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군용 식기공장에 유대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다 죽이는데 거기 채용된 유대인들은 군용 식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독일군들이 잡아가지 않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수백 만 마르크의 돈으로 독일 당국과 흥정을 해서 유대인 1,100명의 목숨을 구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독일군 측 식기 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쉰들러를 보호해 줍니다. “당신이 우리를 친구삼고 살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신에게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반지를 만들어줍니다. 그 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원함이로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entire world).”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우리에게 맡기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주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과 ‘불의한 재물’은 이 땅의 재물입니다. 이와 대조되어 나오는 ‘큰 것’(10)과 ‘참된 것’(11)은 하늘의 재물들 곧 천국 기업과 상급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재물 즉 천국 기업과 상급을 맡기십니다.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늘의 보화도 안 맡기십니다.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재물을 영육 간에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데 쓰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 땅의 재물은 남의 것입니다. 재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이 세상의 재물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재물을 잠시 사용하도록 위임 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남의 것을 위탁 받은 청지기는 당연히 위탁 받은 재물을 주인의 뜻에 맞게 써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청지기적인 자세로 충성하면 하나님은 그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에서 우리의 것 즉 천국 재물들,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재물에 충성하되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재물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청지기가 아니라 재물의 종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야 재물의 종이 되지 않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맘몬교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지 재물이 아닙니다. 재물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고 다스려야 할 대상입니다. 재물 욕심을 비롯해서 모든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영육 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선한 일에 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9).
둘째,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14-18).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영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제 삶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현실을 모른다고, 자신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쓸 데는 많은데 없어서 그렇지 저도 돈을 좋아합니다. 내 마음껏 돈을 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심을 믿기에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의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근거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제물이 많다고 해서 율법을 잘 지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준행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들 안에 율법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외적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혼을 쉽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지만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했던 내용들이 성취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서로 앞을 다투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해서 율법을 소홀히 다루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에도 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권위를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율법의 정신과 일치함을 보여주시려고 이혼에 대한 예를 드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의 연고 없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로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버림을 받는 것이 무효라면 버림받은 그 여인은 여전히 남의 아내입니다. 따라서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어기고 쉽게 이혼하고 재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에 기초하여 모세의 율법보다 더 엄격하게 이혼을 금하심으로써 율법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들 사이에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탐심과 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은 본질상 탐심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부자들 사이에서 이혼과 재혼이 많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율법보다 더 강력한 가르침을 주심으로써 경고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이혼한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된 사람은 제사장들이었는데(레21:7)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율법을 하나님의 나라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대하여 적용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 신실해야 하는 것처럼 재물에 대해서도 신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셋째,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는 왕과 귀족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왕궁과 같은 집과 황금과 명품으로 꾸미고 세계적인 명사들과 교제하며 권세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불황 속에서도 그의 사업은 호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겠다고 난리인데 그는 사업이 너무 잘 되어 행복한 고민 속에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쁜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으로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처럼 불쌍하고 비참한 일이 있을까요? 이런 나사로에게는 남은 음식을 갖다 주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움과 자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런 자선조차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지 나사로를 볼 때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사로에게 눈곱만큼의 긍휼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자기도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은 풍성했습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남을 섬겼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누가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 공동묘지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고 장례식 화환은 식장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들이 죽었을 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가 볼 때 나사로는 너무나 행복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 부자가 음부에서 아브라함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심했는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만 해도 족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죽기 전에 운명을 바꿔야 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직무에서 배제되기 전 필사적으로 조치를 취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기 전 살아 있을 동안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재물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지금 나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그를 위해 재물을 써야 합니다. 영육 간에 가난한 나사로들을 위해 재물을 쓴다면 그 나사로들이 음부와 낙원으로 운명이 갈릴 때에 나를 낙원으로 영접해줄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그의 다섯 형제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를 청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다섯 형제도 자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그들도 자신처럼 이곳 음부로 올 것이 확실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자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아버지의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섯 형제에게 모든 사실을 증언하게 해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다섯 형제들이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누구에게 듣고 회개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의인과 악인의 삶의 결국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물을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위해 사용할 것도 무수히 가르칩니다(출22:22-24, 신24:10-22). 이런 가르침들을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던 모세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가서 권하면 받아들일까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부활을 증거했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신 기적을 세 번이나 행했어도,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어도, 받아들인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핍박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권함을 받지 않습니다. 재물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시간과 재물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동역자들과 캠퍼스의 양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알도록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가진 것을 나누며 선한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6:1-31
요절 | 누가복음 16:9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돈을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남을 위해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 빌게이츠는 6월 6일 5조 25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기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어린 아이들에게 십일조와 기부에 대한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도록 경제 교육을 시킵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써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해야 합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인격이 드러나고 삶의 열매가 맺히고 미래가 달라집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세 비유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여기서 낭비한다는 단어는 15:13절에서 탕자가 재산을 허비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낭비하다, 뿔뿔이 흩어버리다는 뜻입니다. 작은 돈을 모아야 종자돈이 되고 그것을 가지고 일을 크게 벌일 수 있는데 있는 것을 뿔뿔이 흩어버리면 힘이 되지 않습니다. 고정주영씨는 10원도 모으면 큰 사업을 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과 재능도 흩어버리지 말고 모아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때 집중해야 하는데 여기 저기 흩어버리고 낭비를 했습니다.
주인은 자기 재산에 손해가 나니 청지기를 해고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통보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2).” 직분을 빼앗기게 된 청지기는 앞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 펜대나 굴리던 사람이 땅을 판다는 것은 힘이 없어서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4)” 그가 생각해낸 꾀는 직무를 정리하도록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대폭 탕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탕감 받은 사람들이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 청지기가 실직하고 나왔을 때 그를 영접하고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는지를 묻고 채무 액수를 줄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기름 백 말(100 바투스=약 3천 리터, 3년 치 품삯 정도)을 빚졌다는 사람에게는 그가 빚질 때 썼던 증서를 내주며 빨리 앉아 오십으로 줄여서 쓰라고 말했습니다. ‘빨리 앉아 이렇게 쓰라’고 한 말을 볼 때 청지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매우 급하게 일을 추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밀 백 석(100코루스= 35킬로리터, 1가마를 80kg으로 계산하면 437가마, 8~9년 치 품삯 정도)을 빚졌다고 하니 팔십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앞 사람의 경우는 50%를 줄여주었고 후자의 경우는 20%를 줄여주었습니다.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채무 규모를 줄여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탕감해준 액수가 원금에 붙은 이자이고, 그 이자는 청지기가 원래 받게 되어 있었던 커미션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채무자들에게는 상당한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였기 때문에 채무자들은 청지기에게 매우 큰 고마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고마움 때문에 청지기가 일을 그만두게 되어 찾아가면 기꺼이 영접하고 여러 모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도 이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함과는 별개로 그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그 청지기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나중을 생각해서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만들어둔 것입니다. 미래에 닥칠 일들을 알고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알지만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임기응변 능력이 좋아서 그런지 닥치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섬세한 마무리가 부족합니다. 또 건성건성 때우기 식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다보면 좀 더 완성도 있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8b).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신자들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오직 자신과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불신자들이 신자들보다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나중을 생각해서 자기 앞 일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물질을 가지고 친구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 그들보다 더 열심히 친구를 얻는데 물질을 투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후를 위해서는 준비를 하는데 사후를 위해서는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장래를 대비해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불의의 재물’이라는 표현은 없어지는 재물,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으로만 유용한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단지 재물을 모아 놓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귀어야 할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그와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그는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양들이 친구입니다. 복음의 동역자들은 일생을 함께 하는 친구들입니다. 이들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 재물을 써야 합니다. 또한 양들은 우리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데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 2차 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업가가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군용 식기공장에 유대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다 죽이는데 거기 채용된 유대인들은 군용 식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독일군들이 잡아가지 않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수백 만 마르크의 돈으로 독일 당국과 흥정을 해서 유대인 1,100명의 목숨을 구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독일군 측 식기 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쉰들러를 보호해 줍니다. “당신이 우리를 친구삼고 살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신에게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반지를 만들어줍니다. 그 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원함이로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entire world).”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우리에게 맡기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주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과 ‘불의한 재물’은 이 땅의 재물입니다. 이와 대조되어 나오는 ‘큰 것’(10)과 ‘참된 것’(11)은 하늘의 재물들 곧 천국 기업과 상급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재물 즉 천국 기업과 상급을 맡기십니다.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늘의 보화도 안 맡기십니다.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재물을 영육 간에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데 쓰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 땅의 재물은 남의 것입니다. 재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이 세상의 재물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재물을 잠시 사용하도록 위임 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남의 것을 위탁 받은 청지기는 당연히 위탁 받은 재물을 주인의 뜻에 맞게 써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청지기적인 자세로 충성하면 하나님은 그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에서 우리의 것 즉 천국 재물들,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재물에 충성하되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재물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청지기가 아니라 재물의 종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야 재물의 종이 되지 않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맘몬교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지 재물이 아닙니다. 재물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고 다스려야 할 대상입니다. 재물 욕심을 비롯해서 모든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영육 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선한 일에 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9).
둘째,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14-18).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영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제 삶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현실을 모른다고, 자신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쓸 데는 많은데 없어서 그렇지 저도 돈을 좋아합니다. 내 마음껏 돈을 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심을 믿기에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의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근거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제물이 많다고 해서 율법을 잘 지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준행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들 안에 율법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외적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혼을 쉽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지만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했던 내용들이 성취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서로 앞을 다투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해서 율법을 소홀히 다루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에도 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권위를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율법의 정신과 일치함을 보여주시려고 이혼에 대한 예를 드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의 연고 없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로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버림을 받는 것이 무효라면 버림받은 그 여인은 여전히 남의 아내입니다. 따라서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어기고 쉽게 이혼하고 재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에 기초하여 모세의 율법보다 더 엄격하게 이혼을 금하심으로써 율법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들 사이에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탐심과 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은 본질상 탐심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부자들 사이에서 이혼과 재혼이 많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율법보다 더 강력한 가르침을 주심으로써 경고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이혼한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된 사람은 제사장들이었는데(레21:7)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율법을 하나님의 나라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대하여 적용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 신실해야 하는 것처럼 재물에 대해서도 신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셋째,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는 왕과 귀족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왕궁과 같은 집과 황금과 명품으로 꾸미고 세계적인 명사들과 교제하며 권세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불황 속에서도 그의 사업은 호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겠다고 난리인데 그는 사업이 너무 잘 되어 행복한 고민 속에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쁜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으로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처럼 불쌍하고 비참한 일이 있을까요? 이런 나사로에게는 남은 음식을 갖다 주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움과 자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런 자선조차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지 나사로를 볼 때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사로에게 눈곱만큼의 긍휼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자기도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은 풍성했습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남을 섬겼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누가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 공동묘지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고 장례식 화환은 식장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들이 죽었을 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가 볼 때 나사로는 너무나 행복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 부자가 음부에서 아브라함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심했는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만 해도 족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죽기 전에 운명을 바꿔야 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직무에서 배제되기 전 필사적으로 조치를 취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기 전 살아 있을 동안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재물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지금 나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그를 위해 재물을 써야 합니다. 영육 간에 가난한 나사로들을 위해 재물을 쓴다면 그 나사로들이 음부와 낙원으로 운명이 갈릴 때에 나를 낙원으로 영접해줄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그의 다섯 형제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를 청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다섯 형제도 자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그들도 자신처럼 이곳 음부로 올 것이 확실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자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아버지의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섯 형제에게 모든 사실을 증언하게 해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다섯 형제들이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누구에게 듣고 회개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의인과 악인의 삶의 결국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물을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위해 사용할 것도 무수히 가르칩니다(출22:22-24, 신24:10-22). 이런 가르침들을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던 모세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가서 권하면 받아들일까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부활을 증거했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신 기적을 세 번이나 행했어도,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어도, 받아들인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핍박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권함을 받지 않습니다. 재물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시간과 재물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동역자들과 캠퍼스의 양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알도록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가진 것을 나누며 선한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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