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24강(15:1-32)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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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4 강
말씀 | 누가복음 15:1-32
요절 | 누가복음 15: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스마트 폰을 가지고 몇 시간씩 놀이를 하기 때문에 동역자가 스마트 폰을 감추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깊이 감추었다가 동역자 자신도 어디에 스마트 폰을 숨겼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게 되면 집안에서는 그 스마트 폰을 찾기 위한 기도와 치열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찾는지 옆에서 보기 딱할 정도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유들은 잃어버린 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율법적인 관점에서 정죄하고 포기하는 바리새인들과 끝까지 소망 가운데서 찾도록 찾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목자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우리도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치료하고 각자 가지고 있는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에 반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를 나눔으로 율법과 사회질서를 깨뜨린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고발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보여 주십니다.
첫째, 잃은 양 비유(3-7). 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먼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어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양을 치기 때문에 아주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어도 양의 이름과 성격과 행동양식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양 한 마리는 자기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자 다윗은 늑대나 곰의 공격을 받는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 걸고 싸웠던 것입니다. 양은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게 되면 목자는 양이 도망갔다거나 떠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이 잘못해서 길을 잃었지만 양을 탓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길을 잃은 자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서 헤맬 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와 사탄의 결박을 풀 수 없기에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한 양을 찾기 위해 목자는 99마리는 놔두고 나갔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양을 찾았을 때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즐거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어깨에 메고 와서 잔치를 벌입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책임추궁하거나 매로 때리지 않습니다. 찾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동안 수고한 것도 힘든데 왜 잔치까지 벌일까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의인 아흔 아홉도 귀하지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돌아온 죄인을 훈련을 시켜야 할 사람으로 봅니다. 돌아와도 여전히 죄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예수님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보십니다. 목자에게 없어져도 괜찮은 양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죽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천지창조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일생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둘째,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대 풍습에서는 결혼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로 지참금조로 드라크마 열 닢을 꿰어서 머리에 두르게 했습니다. 우리의 결혼반지처럼 유대 여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장식품입니다.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가치가 없습니다. 목걸이로서의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열 드라크마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단위로서 일꾼의 하루 품삯 정도인 한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한 드라크마가 10만원 정도의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당사자에게는 수 천 만원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드라크마를 찾으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스마트 폰을 잃었다가 찾아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별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사람의 구원에 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기다리심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종들을 보내서 말씀을 주시고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기쁨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며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잃은 아들의 비유(11-3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는 것은 무례한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둘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습니다. 세계를 마음껏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삶을 경험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두둑한 돈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이 청년을 예쁜 여자들이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이 청년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은 지갑이 비어버린 이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돈을 다 없앤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귀공자가 돼지치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습니까? 한끼 한끼 먹고 살기도 힘든데 힘든 돼지치기 아르바이트를 하려니 더욱 사는 것이 고단하였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사 직전에 이르자 그는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버지 집의 풍성함이 그리워졌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들도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같은 일꾼인데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인은 너무나 매정했습니다. 아버지가 품꾼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했는가 기억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엄격하고 일만 시키는 분으로 알았는데 자신이 품꾼의 위치에서 일하다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자상하게 대해 주셨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 나라의 주인과 아버지는 전혀 달랐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 몰랐고 오해를 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실수하고 깨달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얼마나 자기를 용납해 주셨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인색함 속에 살면서 풍성함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일들을 기억하면 그의 풍성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부터 풍성해 지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모이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준은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둘째 아들은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품꾼의 하나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깨닫고 그 집에서 품꾼으로 사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죄를 지으며 방탕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새롭고 큰 경험보다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이 행복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데 아직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왔습니다. 조에스라 선교사님이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터널을 파는 것 같았는데 저쪽에서도 하나님이 터널을 파고 들어오시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힘을 내어 박사 학위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도 내게로 달려오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회개는 가까운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더럽고 냄새 난다고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창기와 함께 허비해 버린 재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아들은 고백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잃은 아들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 잔치를 하였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죄인이 회개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감격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영적으로 죽은 것이라면 회개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에서 떠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정죄감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죄로 인한 절망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죄가 잠시 기쁨을 주지만 결국은 사람을 멸망으로 치닫게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시간과 생명과 기회를 상실하고 죽어가면서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다면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집 나간 탕자의 회복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집 안에 있는 탕자의 회복도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거늘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첫째 아들이 화가 난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 아들은 자기 의와 손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은 의롭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의 핵심은 사랑인데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죄인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동안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방탕한 죄에 빠지지 않고 풍족하게 살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비참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어떻게 설득합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사실은 그의 동생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은 동생입니다. 죽일 놈,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할 자가 아니라 동생과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심으로 죄인들, 바리새인들이 다 한 식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있고 실수가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가 됩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깊이와 높이, 풍성함이 다를 것입니다. 바리새인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되고 나서 아버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새인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풍성함을 새롭게 배울 때 성숙해집니다. 또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둘째 아들이었다가 신앙이 성장하면서 첫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첫째 아들이 성숙해져서 아버지와 같은 자세로 모든 죄인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아버지를 새롭게 배우며 그의 풍성한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자 생활을 해갈수록 사람의 연약함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길을 잃어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관용과 용서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돌이키는 죄인들로 인해서 늘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5:1-32
요절 | 누가복음 15: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스마트 폰을 가지고 몇 시간씩 놀이를 하기 때문에 동역자가 스마트 폰을 감추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깊이 감추었다가 동역자 자신도 어디에 스마트 폰을 숨겼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게 되면 집안에서는 그 스마트 폰을 찾기 위한 기도와 치열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찾는지 옆에서 보기 딱할 정도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유들은 잃어버린 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율법적인 관점에서 정죄하고 포기하는 바리새인들과 끝까지 소망 가운데서 찾도록 찾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목자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우리도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치료하고 각자 가지고 있는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에 반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를 나눔으로 율법과 사회질서를 깨뜨린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고발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보여 주십니다.
첫째, 잃은 양 비유(3-7). 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먼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어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양을 치기 때문에 아주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어도 양의 이름과 성격과 행동양식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양 한 마리는 자기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자 다윗은 늑대나 곰의 공격을 받는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 걸고 싸웠던 것입니다. 양은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게 되면 목자는 양이 도망갔다거나 떠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이 잘못해서 길을 잃었지만 양을 탓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길을 잃은 자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서 헤맬 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와 사탄의 결박을 풀 수 없기에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한 양을 찾기 위해 목자는 99마리는 놔두고 나갔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양을 찾았을 때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즐거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어깨에 메고 와서 잔치를 벌입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책임추궁하거나 매로 때리지 않습니다. 찾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동안 수고한 것도 힘든데 왜 잔치까지 벌일까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의인 아흔 아홉도 귀하지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돌아온 죄인을 훈련을 시켜야 할 사람으로 봅니다. 돌아와도 여전히 죄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예수님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보십니다. 목자에게 없어져도 괜찮은 양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죽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천지창조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일생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둘째,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대 풍습에서는 결혼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로 지참금조로 드라크마 열 닢을 꿰어서 머리에 두르게 했습니다. 우리의 결혼반지처럼 유대 여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장식품입니다.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가치가 없습니다. 목걸이로서의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열 드라크마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단위로서 일꾼의 하루 품삯 정도인 한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한 드라크마가 10만원 정도의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당사자에게는 수 천 만원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드라크마를 찾으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스마트 폰을 잃었다가 찾아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별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사람의 구원에 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기다리심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종들을 보내서 말씀을 주시고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기쁨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며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잃은 아들의 비유(11-3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는 것은 무례한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둘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습니다. 세계를 마음껏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삶을 경험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두둑한 돈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이 청년을 예쁜 여자들이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이 청년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은 지갑이 비어버린 이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돈을 다 없앤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귀공자가 돼지치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습니까? 한끼 한끼 먹고 살기도 힘든데 힘든 돼지치기 아르바이트를 하려니 더욱 사는 것이 고단하였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사 직전에 이르자 그는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버지 집의 풍성함이 그리워졌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들도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같은 일꾼인데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인은 너무나 매정했습니다. 아버지가 품꾼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했는가 기억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엄격하고 일만 시키는 분으로 알았는데 자신이 품꾼의 위치에서 일하다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자상하게 대해 주셨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 나라의 주인과 아버지는 전혀 달랐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 몰랐고 오해를 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실수하고 깨달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얼마나 자기를 용납해 주셨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인색함 속에 살면서 풍성함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일들을 기억하면 그의 풍성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부터 풍성해 지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모이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준은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둘째 아들은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품꾼의 하나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깨닫고 그 집에서 품꾼으로 사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죄를 지으며 방탕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새롭고 큰 경험보다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이 행복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데 아직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왔습니다. 조에스라 선교사님이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터널을 파는 것 같았는데 저쪽에서도 하나님이 터널을 파고 들어오시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힘을 내어 박사 학위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도 내게로 달려오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회개는 가까운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더럽고 냄새 난다고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창기와 함께 허비해 버린 재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아들은 고백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잃은 아들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 잔치를 하였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죄인이 회개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감격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영적으로 죽은 것이라면 회개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에서 떠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정죄감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죄로 인한 절망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죄가 잠시 기쁨을 주지만 결국은 사람을 멸망으로 치닫게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시간과 생명과 기회를 상실하고 죽어가면서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다면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집 나간 탕자의 회복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집 안에 있는 탕자의 회복도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거늘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첫째 아들이 화가 난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 아들은 자기 의와 손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은 의롭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의 핵심은 사랑인데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죄인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동안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방탕한 죄에 빠지지 않고 풍족하게 살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비참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어떻게 설득합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사실은 그의 동생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은 동생입니다. 죽일 놈,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할 자가 아니라 동생과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심으로 죄인들, 바리새인들이 다 한 식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있고 실수가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가 됩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깊이와 높이, 풍성함이 다를 것입니다. 바리새인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되고 나서 아버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새인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풍성함을 새롭게 배울 때 성숙해집니다. 또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둘째 아들이었다가 신앙이 성장하면서 첫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첫째 아들이 성숙해져서 아버지와 같은 자세로 모든 죄인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아버지를 새롭게 배우며 그의 풍성한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자 생활을 해갈수록 사람의 연약함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길을 잃어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관용과 용서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돌이키는 죄인들로 인해서 늘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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