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요나3강(박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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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여름수양회 주제3강
말씀/ 요나서 4:1-11
요절/ 요나서 4:11
부르심의 목적
“아끼시는 마음을 알도록”
우리는 어제 개회메시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취하는 어부로 부르신 것을 배웠고, 주제 1강과 주제 2강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의 메시지가 강력하고 감동적이어서 저는 성경의 요나가 부활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신용도 목자님이 최선을 다해 전하신 메시지를 들으면서, 요나 자신도 구원의 대상이었다는 것과,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 제국 앗시리아의 심장부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만큼 생사를 초월하고, 앗시리아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진 최적의 선지자가 바로 요나였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요나 같은 선지자에게 니느웨 프로젝트를 맡기셨을까 하는 의문을 푸는 데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살펴볼 요나서 4장은 요나서의 결론이자 선지자 요나와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깨닫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악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의 죄사함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달아 알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의 바로 앞 장에서 요나가 우려했던 일이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멸망하리라는 요나의 일성을 듣고 재 위에 앉아 회개했습니다. 회개의 분위기가 얼마나 진지하고 강력했던지, 심지어 소와 양까지 회개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예고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 상황에 대한 요나의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매우 싫어했다”는 말의 히브리어 표현은 “잘못인데, 정말 큰 잘못이다”는 뜻입니다. 현대적으로 푼다면, ‘킹, 왕, 짱, 대박’ 잘못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이기심,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무자비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1강 말씀을 통해 배운 앗시리아의 무자비함을 생각한다면, 그 시대 지식인 중에 이 나라가 처참히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역사적 경험 때문에, 우리나라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한 것과 유사합니다. ‘일본인’ 또는 ‘일본사람’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꼭 ‘놈’이라는 접미어를 쓰는 분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들의 만행을 현실에서 체험한 이들에게 일본은 죽으면 죽을 지언정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요나는 딱 그런 마음으로 니느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만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은 어쩌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화끈하게 심판하신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찬 지구를 홍수로 쓸어버리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구원하셨던 기록은, 요나의 선지자 생활이 힘들 때마다 그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이해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한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요나의 인식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비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된 독점적 특권이라 생각한 데 있습니다. 요나의 정신세계에서 앗시리아, 이집트 등 이방 나라들은 언제든 유황불에 태워지는 것이 마땅한 적폐세력이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눈에 비친 이방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멸시받던 동물인 개나 돼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독특한 뇌구조는 아마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요나는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두려워서, 혹은 싫어서 도망하고자 했을까요? 반항하는 자신을 향해 번개불을 창 같이 던지시는 하나님이었을까요? 깊은 밤중에 요나의 침실에 독거미를 보내어 조용히 목숨을 거둬가려 하시는 하나님이었을까요? 그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요나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것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니느웨를 향한 것이었기에 요나는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했습니다.
성경에서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장면은 출애굽기 34장에 처음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며 방탕하게 뛰놀았습니다. 죄를 결단코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 이스라엘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시게 했습니다 (출32:13). 모세는 나아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습니다 (출32:32).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다시 언약을 맺기 위해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을 준비토록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34:6b) 이 말씀은 민수기(14:18a), 시편(86:15, 103:8, 145:8), 나훔(1:3), 느헤미야(9:17b) 등 성경 곳곳에 인용되어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령 시편 103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고, 원망하고, 배반하는 사건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벌 주신다면, 1순위로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려 우리에게 한 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이 새겨진 돌판을 깨뜨린 후 매우 특이한 일 하나를 했습니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입니다(출32:20). 그 물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었습니다(신9:21). 이는 불타고 남은 잿가루처럼 아무 쓸모없는 우상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값을 맛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결단하게 하는 의미를 가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화학자들이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황금 가루를 미세하게 만들어 물에 1대 10만 비율로 희석하여 콜로이드 상태를 만들면 그 빛깔이 장미빛에 가까운 붉은 색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서 황금 송아지를 부순 가루가 섞인 그 시냇물은 십자가 위에서 흘러내린 예수님의 보혈과 같이 장미빛 붉은 색을 띠었을 것이라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때 흘러내린 시냇물의 색깔이 정말 붉은 색이었는지 여부가 성경의 기본 진리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히브리서 말씀처럼(히9:22),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이 용서받을 수 있는 비결은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쏟으신 그 보혈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멈추실 수 있었던 것은, 요나가 오해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그 누군가가 대신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물고기 배 속에서 고백한 회개의 기도를 잊은 채, 왜 니느웨를 용서하느냐고, 그럴 바엔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대드는 요나입니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요나를 한 방에 날려버리지 않으시고 참고 훈련하실 수 있었던 것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한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앗시리아를 비롯한 고대의 정복국가들이 주변 민족들을 압살하고 살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는 등 가장 잔인한 방법들로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그 중 가장 잔인한 방법이 십자가형입니다. 사람을 산 채로 나무 십자가에 못 박아 중동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매달아 두면, 그 사람은 몸에 있는 피를 쏟고, 수천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질식하여 죽는 형벌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피 흘리심으로 포악한 앗시리아의 죄악, 반항하는 요나의 죄악, 정욕적이고, 무정하고, 이기적이고, 게을러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는 커녕 근심만 끼친 저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와 은혜, 긍휼과 용서를 드러낸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상황에 괴로워하더니, 급기야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시도록 간청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탄식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더불어, UN이 지정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의 3대 거짓말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요나가 죽고 싶다고 한 말도 거짓이었을까요? 아무튼 요나가 얼마나 철저히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작권 이론 중에 “표준적삽화(scenes a faire)”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토리의 전개상 어떤 상황에서는 꼭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작품이었다면, 3절에서 반항적인 요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이 귀싸대기를 올려부치신다는 것이 바로 표준적삽화 이론입니다. 참 다행히도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성경은 문학작품을 넘어서 생명의 말씀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나의 반항적인 기도에 귀싸대기를 올리는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끝까지 인내하며 물으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신 일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는 그 동쪽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초막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소망으로 니느웨가 무엇인가 제대로 회개하지는 못하여 40일 후에는 결국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불과 유황으로 타버릴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 장관을 볼 생각을 하니 뭔가 새로운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습니다. 성읍 밖에 안전하게 터를 잡은 그 초막은 불타는 니느웨를 관람하기에 안성마춤인 명당 자리였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요나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뜨거운 햇볕에 괴로워하던 요나를 박넝쿨로 시원하게 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넉넉하게 넓은 잎사귀 그늘 아래서 중동의 뜨거운 태양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초막에 눌러앉은 괴씸한 반항아 요나를 하나님은 이토록 아껴 주셨습니다. 반발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는 그를 위해 구원의 물고기를 예비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한여름 뙤약볕에 탈진하여 쓰러질 그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최근 들어 인생에 기뻐할 일이 없던 요나도 이 박넝쿨만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다음날 새벽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사실 요나를 갉아먹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박넝쿨만 갉아먹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러자 박넝쿨은 당장 시들어버렸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시로코’, csirocco)”이 불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박넝쿨 그늘에 숨지도 못하는 요나의 머리에 햇빛이 내리 쪼였습니다. 시로코는 양이온(+)으로 가득한 중동의 뜨거운 바람으로, 세라토닌의 수치와 뇌 신경 전달 물질에 영향을 미쳐 극심한 피로와 우울증, 환각 증세를 일으킵니다. 몇몇 중동국가는 시로코가 부는 동안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하여 감형까지 할 정도입니다. 요나는 탈진하여 정신이 혼미한 중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며 저항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니느웨 성읍에 머물렀다면 말라버린 박 대신 시원한 달고나 수박을 맛보면서 상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 자신이 현재의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이에 요나는 자신에게 생명의 교훈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친철하게 박넝쿨 사건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박넝쿨이 벌레 먹어 죽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면,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낌(concern)’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를 아끼는 마음입니다. 요나가 박넝쿨에 대해 품은 감정들인 기쁨, 화냄, 실망, 좌절 등등은 그가 박넝쿨을 아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요나처럼 아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대상이 박넝쿨이 아니라 니느웨라는 것이 달랐습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아끼는 것이 옳았다면,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아끼신 것은 더더욱 옳았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을 심지도, 가꾸지도, 재배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고 가꾸고 재배하셨습니다. 더구나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멸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을 피로 압제하면서, 세상의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던 니느웨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지식이란 곧 회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결국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캠퍼스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영혼들이 죄와 멸망에서 벗어날 길을 알려 주는 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애니어그램 성격 유형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부르십니다. 다만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끼시는 마음을 잘 알아야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여 구원으로 이끌 마음 하나는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애니어그램 검사결과를 확인한 후, 저는 주제3강 메신저 선정이 잘못 되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저는 9번 평화주의자라서 요나와는 많은 심리적 거리가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불벼락을 맞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의 직장은 이공계 대학이어서 그런지 주변에 요나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주로 무슨 사건에 대해서든 “이거 누구 책임이야?”하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친철하게 자세히 적어 보낸 이메일을 쓰레기 같아서 안 읽었다는 사람도 있고, 계산이 10원 차이난 이유를 꼭 밝혀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잘못 했을 때는 슬슬 무마하다가 다른 사람의 실수가 발견되면 호되게 공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될 일로 싸우고 왜 싸우는가 생각하면서 충돌을 피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들과도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나 헌신자, 조력자 등 좀 부드러운 유형의 성격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더 쉽게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충만한 성격들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성격이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빨리 공감할 수는 있을 듯하고, 헌신자나 충성가라면 니느웨에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 걸고 따르려고 발버둥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은 성격으로 동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아끼는 이유에 대한 지적, 정서적으로 공감이 있어야 하고, 아끼는 마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 의지적 결단과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격유형에 따라 어떤 이는 공감능력이 좋고, 어떤 이는 의지가 강하고, 어떤 이는 이해가 빠르지만, 각자 반대급부로 취약한 점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적 장점을 극대화하고, 취약점을 보완해야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끼시는 마음을 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중 11절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라는 구절이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아끼는 마음을 매우 쉬운 방법으로 적용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논쟁으로 굴복시키지도 않았고, 눈물로 호소하여 감동적인 회개와 결단을 끌어낸 것도 아닙니다. 트윗 한 줄 날리듯이, 내키지 않는 마음에 마지못해 그야말로 40일 후에 있을 심판 schedule만 통보했습니다. 물론 앗시리아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 “심판하시리라”는 한마디에 리얼하게 베어있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단순하게 전한 메시지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 성이 모두 회개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서는 사실 복음역사상 투자 대비 효율성 극대화의 가장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양과 소도 회개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위해 요나가 한 유일한 일은, 하나님의 심판 스케줄을 통보한 것입니다.
요나서는 어쩌면 간단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하는 매우 좋은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눈물의 수고로 영적 성장을 돕는 제자양성 역사가 있으나, 요나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fact 중심으로 전달하는 복음역사의 또 다른 차원으로 부르십니다.
저는 작년 8월 대만 중부의 창화 기독병원에서 이하선 종양 수술을 받았습니다. 인천, 동교, 중앙 센터 목자님들은 잘 모르실 수 있지만, 2007년 시작된 이 병이 지난 몇 해 심하여져서 제 인생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수술은 위험하고, 여러 병원의 검사결과 안면마비 등 부작용도 우려되는 상태였는데, 미국도 아니고 세계 수준의 유명 대학병원도 아닌 대만 시골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것을 걱정해 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동역자님들의 기도지원 속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치료자라고 확신한 의사 선생님과 그 제자들, 간호사들, 병원의 목사님들이 수술대 주변에 모여 기도하신 후, 4시간 반 정도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병변의 크기와 특이한 신경의 배열 등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경손상이 오지 않고 무사히 수술이 끝났습니다. 특이한 구조 때문에 수술은 2시간 정도 지연되었었고, 담당 선생님은 수술 도중 대기하던 아내를 불러 열려진 저의 얼굴 부위를 보여주며 어려운 상황이 있으니 어찌어찌 하시겠다고 설명을 한 후 계속 진행을 했었습니다. 수술하는 날 새벽에 저를 찾아오신 의사선생님은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수술해 달라고,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취에서 깨었을 때 “Praise Jesus!” 라고 외치시던 이분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찌 하다보니 이 때 경험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역자들에게 소감으로 발표했던 스토리를 직장 상사에게, 동료에게, 직원에게, 학생들에게, 처음 만난 높은 분들에게, 말기 암으로 생명이 스러져 가던 복음을 모르던 외삼촌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 동안 세상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세상적인 투쟁만 너무 많이 했었습니다. 모임에도 못 갈 때가 많아 역사를 섬기는 부담은 동역자들에게 맡기고, 서울대 캠퍼스 대신 직장인 다른 대학 캠퍼스를 복음역사가 아닌 다른 목적들로만 쏘다녔습니다. 양이 와 주면 일대일 성경공부를 겨우 해 주곤 했습니다. 주일은 섬기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힐링캠프처럼 섬김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여름의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이 갈리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정욕과 두려움이 많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선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나마 제 삶에 있었던 중요한 이 사건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의 성격을 부인하고 수다를 많이 떤 것 같습니다. 믿지 않던 분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순식간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진술할 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얼굴 한 편에 난 수술자국을 보여주며 주절주절 떠드는 시간이 평균 40분쯤 되는데 심각한 일이어서인지 대부분 잘 들어주었습니다. 학교 강의실에서 종교적 발언을 하면 안 되지만, 그냥 수술받은 이야기 하는 것이라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 중에 영락교회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중장년부 모임에 와서 간증을 해달라고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때 평소에 알고 지냈지만 복음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다른 대학의 교수님 한 분, 회사 사장님 한 분, 변리사 한 분을 초청해서 한 시간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이든 아저씨들이 눈물로 회개하지 않으신 것이 아쉽지만, 그 일 후에는 종종 성경말씀에 대한 관심으로 대화를 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던 저의 인생사를 생명을 전하는 기회로 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복음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빅데이터가 인터넷과 통신망을 타고 빠르게 유통되는 정보의 홍수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단순한 복음 정보는 큰 의미없는 다른 정보들에 묻히고 있습니다. 협상전략에서 상대에게 가치 없는 수많은 정보를 흘려서 진짜 정보를 감추는 것을 snow job이라고 하는데, 사단은 현재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수많은 뉴스, 음향, 영상, 스포츠, 게임 등의 빅데이터와 함께 제공해서 혼란에 빠뜨리는 이 snow job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눈이 날리듯 진리를 묻어버리는 정보에는 세속적인 것만 있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잘못 가르치는 유튜브 영상들과 사이비이단의 잡설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단순하고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단순하더라도 복음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단순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니느웨가 회개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예비하여 두셨습니다. 그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숭배하던 태양이 빛을 잃는 개기일식이었을 수도 있고, 매일 밤마다 왕을 괴롭혀 온 심판의 악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역사의 기록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복음역사는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반발하는 요나를 끝까지 참아주시며, 차분하게 가르치셔서 그를 앗시리아의 심장부 니느웨를 강타한 메신저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두고두고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니느웨가 구원의 대상이요, 요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나서는 요나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지만, 사실 도전하고 반항하고 성내는 요나를 지속적으로 아끼신 점이 심히 큽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껴 주심을 그리 깊이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돌발 행동을 일삼은 요나 덕분에 영혼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죄로 고통받은 영혼들에게 복음의 정보를 제공하는 작은 수고를 감당할 용기를 낸다면, 오늘도 캠퍼스의 대학생, 우리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캠퍼스와 직장, 사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하며 복음의 단순한 메시지를 전파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요나서 4:1-11
요절/ 요나서 4:11
부르심의 목적
“아끼시는 마음을 알도록”
우리는 어제 개회메시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취하는 어부로 부르신 것을 배웠고, 주제 1강과 주제 2강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의 메시지가 강력하고 감동적이어서 저는 성경의 요나가 부활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신용도 목자님이 최선을 다해 전하신 메시지를 들으면서, 요나 자신도 구원의 대상이었다는 것과,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 제국 앗시리아의 심장부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만큼 생사를 초월하고, 앗시리아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진 최적의 선지자가 바로 요나였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요나 같은 선지자에게 니느웨 프로젝트를 맡기셨을까 하는 의문을 푸는 데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살펴볼 요나서 4장은 요나서의 결론이자 선지자 요나와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깨닫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악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의 죄사함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달아 알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의 바로 앞 장에서 요나가 우려했던 일이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멸망하리라는 요나의 일성을 듣고 재 위에 앉아 회개했습니다. 회개의 분위기가 얼마나 진지하고 강력했던지, 심지어 소와 양까지 회개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예고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 상황에 대한 요나의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매우 싫어했다”는 말의 히브리어 표현은 “잘못인데, 정말 큰 잘못이다”는 뜻입니다. 현대적으로 푼다면, ‘킹, 왕, 짱, 대박’ 잘못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이기심,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무자비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1강 말씀을 통해 배운 앗시리아의 무자비함을 생각한다면, 그 시대 지식인 중에 이 나라가 처참히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역사적 경험 때문에, 우리나라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한 것과 유사합니다. ‘일본인’ 또는 ‘일본사람’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꼭 ‘놈’이라는 접미어를 쓰는 분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들의 만행을 현실에서 체험한 이들에게 일본은 죽으면 죽을 지언정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요나는 딱 그런 마음으로 니느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만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은 어쩌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화끈하게 심판하신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찬 지구를 홍수로 쓸어버리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구원하셨던 기록은, 요나의 선지자 생활이 힘들 때마다 그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이해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한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요나의 인식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비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된 독점적 특권이라 생각한 데 있습니다. 요나의 정신세계에서 앗시리아, 이집트 등 이방 나라들은 언제든 유황불에 태워지는 것이 마땅한 적폐세력이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눈에 비친 이방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멸시받던 동물인 개나 돼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독특한 뇌구조는 아마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요나는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두려워서, 혹은 싫어서 도망하고자 했을까요? 반항하는 자신을 향해 번개불을 창 같이 던지시는 하나님이었을까요? 깊은 밤중에 요나의 침실에 독거미를 보내어 조용히 목숨을 거둬가려 하시는 하나님이었을까요? 그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요나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것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니느웨를 향한 것이었기에 요나는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했습니다.
성경에서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장면은 출애굽기 34장에 처음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며 방탕하게 뛰놀았습니다. 죄를 결단코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 이스라엘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시게 했습니다 (출32:13). 모세는 나아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습니다 (출32:32).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다시 언약을 맺기 위해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을 준비토록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34:6b) 이 말씀은 민수기(14:18a), 시편(86:15, 103:8, 145:8), 나훔(1:3), 느헤미야(9:17b) 등 성경 곳곳에 인용되어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령 시편 103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고, 원망하고, 배반하는 사건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벌 주신다면, 1순위로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려 우리에게 한 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이 새겨진 돌판을 깨뜨린 후 매우 특이한 일 하나를 했습니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입니다(출32:20). 그 물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었습니다(신9:21). 이는 불타고 남은 잿가루처럼 아무 쓸모없는 우상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값을 맛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결단하게 하는 의미를 가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화학자들이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황금 가루를 미세하게 만들어 물에 1대 10만 비율로 희석하여 콜로이드 상태를 만들면 그 빛깔이 장미빛에 가까운 붉은 색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서 황금 송아지를 부순 가루가 섞인 그 시냇물은 십자가 위에서 흘러내린 예수님의 보혈과 같이 장미빛 붉은 색을 띠었을 것이라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때 흘러내린 시냇물의 색깔이 정말 붉은 색이었는지 여부가 성경의 기본 진리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히브리서 말씀처럼(히9:22),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이 용서받을 수 있는 비결은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쏟으신 그 보혈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멈추실 수 있었던 것은, 요나가 오해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그 누군가가 대신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물고기 배 속에서 고백한 회개의 기도를 잊은 채, 왜 니느웨를 용서하느냐고, 그럴 바엔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대드는 요나입니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요나를 한 방에 날려버리지 않으시고 참고 훈련하실 수 있었던 것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한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앗시리아를 비롯한 고대의 정복국가들이 주변 민족들을 압살하고 살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는 등 가장 잔인한 방법들로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그 중 가장 잔인한 방법이 십자가형입니다. 사람을 산 채로 나무 십자가에 못 박아 중동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매달아 두면, 그 사람은 몸에 있는 피를 쏟고, 수천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질식하여 죽는 형벌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피 흘리심으로 포악한 앗시리아의 죄악, 반항하는 요나의 죄악, 정욕적이고, 무정하고, 이기적이고, 게을러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는 커녕 근심만 끼친 저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와 은혜, 긍휼과 용서를 드러낸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상황에 괴로워하더니, 급기야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시도록 간청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탄식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더불어, UN이 지정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의 3대 거짓말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요나가 죽고 싶다고 한 말도 거짓이었을까요? 아무튼 요나가 얼마나 철저히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작권 이론 중에 “표준적삽화(scenes a faire)”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토리의 전개상 어떤 상황에서는 꼭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작품이었다면, 3절에서 반항적인 요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이 귀싸대기를 올려부치신다는 것이 바로 표준적삽화 이론입니다. 참 다행히도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성경은 문학작품을 넘어서 생명의 말씀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나의 반항적인 기도에 귀싸대기를 올리는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끝까지 인내하며 물으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신 일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는 그 동쪽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초막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소망으로 니느웨가 무엇인가 제대로 회개하지는 못하여 40일 후에는 결국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불과 유황으로 타버릴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 장관을 볼 생각을 하니 뭔가 새로운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습니다. 성읍 밖에 안전하게 터를 잡은 그 초막은 불타는 니느웨를 관람하기에 안성마춤인 명당 자리였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요나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뜨거운 햇볕에 괴로워하던 요나를 박넝쿨로 시원하게 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넉넉하게 넓은 잎사귀 그늘 아래서 중동의 뜨거운 태양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초막에 눌러앉은 괴씸한 반항아 요나를 하나님은 이토록 아껴 주셨습니다. 반발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는 그를 위해 구원의 물고기를 예비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한여름 뙤약볕에 탈진하여 쓰러질 그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최근 들어 인생에 기뻐할 일이 없던 요나도 이 박넝쿨만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다음날 새벽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사실 요나를 갉아먹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박넝쿨만 갉아먹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러자 박넝쿨은 당장 시들어버렸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시로코’, csirocco)”이 불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박넝쿨 그늘에 숨지도 못하는 요나의 머리에 햇빛이 내리 쪼였습니다. 시로코는 양이온(+)으로 가득한 중동의 뜨거운 바람으로, 세라토닌의 수치와 뇌 신경 전달 물질에 영향을 미쳐 극심한 피로와 우울증, 환각 증세를 일으킵니다. 몇몇 중동국가는 시로코가 부는 동안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하여 감형까지 할 정도입니다. 요나는 탈진하여 정신이 혼미한 중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며 저항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니느웨 성읍에 머물렀다면 말라버린 박 대신 시원한 달고나 수박을 맛보면서 상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 자신이 현재의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이에 요나는 자신에게 생명의 교훈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친철하게 박넝쿨 사건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박넝쿨이 벌레 먹어 죽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면,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낌(concern)’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를 아끼는 마음입니다. 요나가 박넝쿨에 대해 품은 감정들인 기쁨, 화냄, 실망, 좌절 등등은 그가 박넝쿨을 아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요나처럼 아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대상이 박넝쿨이 아니라 니느웨라는 것이 달랐습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아끼는 것이 옳았다면,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아끼신 것은 더더욱 옳았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을 심지도, 가꾸지도, 재배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고 가꾸고 재배하셨습니다. 더구나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멸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을 피로 압제하면서, 세상의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던 니느웨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지식이란 곧 회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결국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캠퍼스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영혼들이 죄와 멸망에서 벗어날 길을 알려 주는 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애니어그램 성격 유형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부르십니다. 다만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끼시는 마음을 잘 알아야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여 구원으로 이끌 마음 하나는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애니어그램 검사결과를 확인한 후, 저는 주제3강 메신저 선정이 잘못 되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저는 9번 평화주의자라서 요나와는 많은 심리적 거리가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불벼락을 맞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의 직장은 이공계 대학이어서 그런지 주변에 요나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주로 무슨 사건에 대해서든 “이거 누구 책임이야?”하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친철하게 자세히 적어 보낸 이메일을 쓰레기 같아서 안 읽었다는 사람도 있고, 계산이 10원 차이난 이유를 꼭 밝혀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잘못 했을 때는 슬슬 무마하다가 다른 사람의 실수가 발견되면 호되게 공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될 일로 싸우고 왜 싸우는가 생각하면서 충돌을 피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들과도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나 헌신자, 조력자 등 좀 부드러운 유형의 성격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더 쉽게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충만한 성격들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성격이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빨리 공감할 수는 있을 듯하고, 헌신자나 충성가라면 니느웨에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 걸고 따르려고 발버둥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은 성격으로 동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아끼는 이유에 대한 지적, 정서적으로 공감이 있어야 하고, 아끼는 마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 의지적 결단과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격유형에 따라 어떤 이는 공감능력이 좋고, 어떤 이는 의지가 강하고, 어떤 이는 이해가 빠르지만, 각자 반대급부로 취약한 점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적 장점을 극대화하고, 취약점을 보완해야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끼시는 마음을 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중 11절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라는 구절이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아끼는 마음을 매우 쉬운 방법으로 적용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논쟁으로 굴복시키지도 않았고, 눈물로 호소하여 감동적인 회개와 결단을 끌어낸 것도 아닙니다. 트윗 한 줄 날리듯이, 내키지 않는 마음에 마지못해 그야말로 40일 후에 있을 심판 schedule만 통보했습니다. 물론 앗시리아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 “심판하시리라”는 한마디에 리얼하게 베어있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단순하게 전한 메시지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 성이 모두 회개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서는 사실 복음역사상 투자 대비 효율성 극대화의 가장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양과 소도 회개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위해 요나가 한 유일한 일은, 하나님의 심판 스케줄을 통보한 것입니다.
요나서는 어쩌면 간단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하는 매우 좋은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눈물의 수고로 영적 성장을 돕는 제자양성 역사가 있으나, 요나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fact 중심으로 전달하는 복음역사의 또 다른 차원으로 부르십니다.
저는 작년 8월 대만 중부의 창화 기독병원에서 이하선 종양 수술을 받았습니다. 인천, 동교, 중앙 센터 목자님들은 잘 모르실 수 있지만, 2007년 시작된 이 병이 지난 몇 해 심하여져서 제 인생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수술은 위험하고, 여러 병원의 검사결과 안면마비 등 부작용도 우려되는 상태였는데, 미국도 아니고 세계 수준의 유명 대학병원도 아닌 대만 시골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것을 걱정해 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동역자님들의 기도지원 속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치료자라고 확신한 의사 선생님과 그 제자들, 간호사들, 병원의 목사님들이 수술대 주변에 모여 기도하신 후, 4시간 반 정도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병변의 크기와 특이한 신경의 배열 등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경손상이 오지 않고 무사히 수술이 끝났습니다. 특이한 구조 때문에 수술은 2시간 정도 지연되었었고, 담당 선생님은 수술 도중 대기하던 아내를 불러 열려진 저의 얼굴 부위를 보여주며 어려운 상황이 있으니 어찌어찌 하시겠다고 설명을 한 후 계속 진행을 했었습니다. 수술하는 날 새벽에 저를 찾아오신 의사선생님은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수술해 달라고,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취에서 깨었을 때 “Praise Jesus!” 라고 외치시던 이분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찌 하다보니 이 때 경험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역자들에게 소감으로 발표했던 스토리를 직장 상사에게, 동료에게, 직원에게, 학생들에게, 처음 만난 높은 분들에게, 말기 암으로 생명이 스러져 가던 복음을 모르던 외삼촌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 동안 세상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세상적인 투쟁만 너무 많이 했었습니다. 모임에도 못 갈 때가 많아 역사를 섬기는 부담은 동역자들에게 맡기고, 서울대 캠퍼스 대신 직장인 다른 대학 캠퍼스를 복음역사가 아닌 다른 목적들로만 쏘다녔습니다. 양이 와 주면 일대일 성경공부를 겨우 해 주곤 했습니다. 주일은 섬기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힐링캠프처럼 섬김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여름의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이 갈리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정욕과 두려움이 많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선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나마 제 삶에 있었던 중요한 이 사건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의 성격을 부인하고 수다를 많이 떤 것 같습니다. 믿지 않던 분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순식간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진술할 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얼굴 한 편에 난 수술자국을 보여주며 주절주절 떠드는 시간이 평균 40분쯤 되는데 심각한 일이어서인지 대부분 잘 들어주었습니다. 학교 강의실에서 종교적 발언을 하면 안 되지만, 그냥 수술받은 이야기 하는 것이라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 중에 영락교회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중장년부 모임에 와서 간증을 해달라고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때 평소에 알고 지냈지만 복음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다른 대학의 교수님 한 분, 회사 사장님 한 분, 변리사 한 분을 초청해서 한 시간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이든 아저씨들이 눈물로 회개하지 않으신 것이 아쉽지만, 그 일 후에는 종종 성경말씀에 대한 관심으로 대화를 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던 저의 인생사를 생명을 전하는 기회로 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복음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빅데이터가 인터넷과 통신망을 타고 빠르게 유통되는 정보의 홍수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단순한 복음 정보는 큰 의미없는 다른 정보들에 묻히고 있습니다. 협상전략에서 상대에게 가치 없는 수많은 정보를 흘려서 진짜 정보를 감추는 것을 snow job이라고 하는데, 사단은 현재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수많은 뉴스, 음향, 영상, 스포츠, 게임 등의 빅데이터와 함께 제공해서 혼란에 빠뜨리는 이 snow job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눈이 날리듯 진리를 묻어버리는 정보에는 세속적인 것만 있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잘못 가르치는 유튜브 영상들과 사이비이단의 잡설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단순하고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단순하더라도 복음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단순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니느웨가 회개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예비하여 두셨습니다. 그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숭배하던 태양이 빛을 잃는 개기일식이었을 수도 있고, 매일 밤마다 왕을 괴롭혀 온 심판의 악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역사의 기록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복음역사는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반발하는 요나를 끝까지 참아주시며, 차분하게 가르치셔서 그를 앗시리아의 심장부 니느웨를 강타한 메신저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두고두고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니느웨가 구원의 대상이요, 요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나서는 요나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지만, 사실 도전하고 반항하고 성내는 요나를 지속적으로 아끼신 점이 심히 큽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껴 주심을 그리 깊이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돌발 행동을 일삼은 요나 덕분에 영혼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죄로 고통받은 영혼들에게 복음의 정보를 제공하는 작은 수고를 감당할 용기를 낸다면, 오늘도 캠퍼스의 대학생, 우리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캠퍼스와 직장, 사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에 동참하며 복음의 단순한 메시지를 전파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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