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 23강(14:7-35)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페이지 정보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 23 강
말씀 | 누가복음 14:7-35
요절 | 누가복음 14:26,27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상석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과 큰 잔치의 비유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치루어야 할 대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성과 제자 생활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 금요일부터 여름 수양회를 시작하는데 큰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하는 종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수양회에서 가장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제자들입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여름 수양회 큰 잔치를 통해서 풍성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이 시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배우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7-14).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가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당시 식탁은 U 자형으로 되어 있었고 한 가운데가 제일 상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자리가 오른쪽 자리보다 상석이었고, 그 다음이 오른쪽 자리였는데 끝으로 갈수록 말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상석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상석에 앉으려고 했을까요? 상석에 앉아야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상좌에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모기업 임원 회의를 하면 매번 자리가 바뀌는데 가장 매출액이 많은 사장의 순서대로 상석에 앉는다고 합니다.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은 기업의 임원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다투었습니다. 우리도 서로 비교하며 좀 더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것일까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장점을 발견하고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분반 편성을 위해 에니어그램 검사를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각 유형별로 장점과 단점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모든 면에서 다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장점을 보면 그를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겸손히 배우는 사람은 꾸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는 낮출 수 없습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교만이 오뚝이처럼 살아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겸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구속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구유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히 죄인을 섬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할 때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해지면 상석에 앉는가 끝자리에 앉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상석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끝자리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끝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살 때 상석을 탐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만물의 찌끼 같은 삶을 사는 것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고전 4:13).
예수님은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접한다든지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도로 청하여 사랑의 빚을 갚아버리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섬길 때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십니다. 미국 뉴욕에서 한 여인이 결혼식 전날 파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낙망하지 아니하고 노숙자들을 초청하여 그 잔치를 열었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를 버린 그 남자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입니다. 이 아가씨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둘째 큰 잔치의 비유(15-24).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는 자신과 같은 정통 유대인들만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은 결코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근거하여 당연히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큰 잔치 비유’를 통해서 당연히 참석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그 사람들이 스스로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잔치에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마태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이라고 했습니다(마 22:2).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가 있기 일 년 전에 미리 초청장을 보냅니다.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몇 년 동안 여행을 떠난다든지 다른 사유가 있을 때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잔치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하게 인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주인은 일 년 동안 잔치를 준비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을 위하여 맛있는 불고기, 잡채, 궁중보쌈, 식혜, 포도주 등 음식뿐만 아니라 춤과 음악, 영상 등 모든 것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그리고 잔치가 다 준비되면 다시 사람을 보내어 잔치에 오도록 초청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이때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년 동안 준비한 잔치를 멸시하는 죄악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꼭 그 날 하지 않아도 될 일들입니다. 밭을 살 때 보지도 않고 샀을 리 없습니다. 새로 산 소들은 차후에 얼마든지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또 결혼을 했으면 신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합니다(신 24:5). 이들이 잔치 참여를 거절한 이유들이 표면적으로 보면 사업문제, 물질문제, 가정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고 3 1년 동안 때에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고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대학에 들어갔으니 예배에 가도록 했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기다려 주지만 그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로서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천하를 다 얻고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잔치에 초청한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이들은 그 잔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참석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세상살이에 마음을 다 빼앗겨 영적인 세계에 무관심했습니다. 이들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새로 산 밭을 구경하고, 소를 시험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는데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영적인 세계에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과 행동으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종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 집 주인은 분노했습니다. 주인을 우습게 여기는 그들의 교만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준비한 것을 다 버리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정성을 멸시하고, 잔치를 훼방하는 자들에게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자이며, 몸 불편한 자는 결혼할 수 없는 자이며, 맹인은 밭을 보러 갈 수 없는 자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예수님이 초청하라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명을 받은 종들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그러한 자들을 데려 왔습니다. 잔치 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도 자리가 있자 주인은 종에게 명하였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주인은 빈 자리를 그냥 두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종들을 길과 산울타리 가까지 보내어 한 사람이라도 더 강권해서 데려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길과 산울타리 가는 성 밖에 사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까지도 천국 잔치에 적극적으로 초대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특히 주인은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억지로 청한다’는 뜻입니다. 잔치에 응하도록 힘쓰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은 억지로 청해서라도 그들을 데려와 잔치에 참석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천국잔치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거절하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클리닉 이병욱 원장은 “구원의 감격이 내 안에 넘쳐나는데 어떻게 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에게 ‘구원의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은 먹고 자는 일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노력 끝에 전도한 영혼은 75세의 노인부터 조폭까지 직업과 연령 모두 각양각색입니다. 그는 “아무리 일정에 쫓겨 바쁘고 피곤해도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올 때 느끼는 기쁨은 다른 무엇에도 비할 길 없는 명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힘써 초청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비전을 보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도록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제자가 되는 자의 대가(25-35).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서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고자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싸우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랑하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대개 부모들은 자신은 제자로 살면서 고생을 하더라도 자녀들만큼은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자유롭게 키우다가 자녀의 신앙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내까지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되는 목록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목숨은 본성적으로 다 사랑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잘 먹고,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즐거운 일들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예와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자기의 뜻을 꺾지 아니하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자체를 알고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관습과 전통과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유교적인 가치관이나 관습, 전통을 내려놓아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한 사람을 얻고자하는 생각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얻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구체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우리는 탐욕, 식욕, 정욕을 절제하고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나 외에는 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깨어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에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할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릴 것입니다.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 먼저 계산해 보고 예산이 안 잡히면 믿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영적인 전쟁에 임할 때 먼저 계산해 보고 능력이 부족하면 타협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좋은 진주 장사가 매우 값진 진주를 발견했을 때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마13:45,46).
결론적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제자는 제자다워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음식물은 썩고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쓸 데 없어 버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소금은 간을 맞추어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살맛이 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은 이기심과 향락과 물질주의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착한 행실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에 두고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고, 못 올 사람인데 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말씀 | 누가복음 14:7-35
요절 | 누가복음 14:26,27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상석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과 큰 잔치의 비유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치루어야 할 대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성과 제자 생활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 금요일부터 여름 수양회를 시작하는데 큰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하는 종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수양회에서 가장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제자들입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여름 수양회 큰 잔치를 통해서 풍성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이 시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배우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7-14).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가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당시 식탁은 U 자형으로 되어 있었고 한 가운데가 제일 상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자리가 오른쪽 자리보다 상석이었고, 그 다음이 오른쪽 자리였는데 끝으로 갈수록 말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상석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상석에 앉으려고 했을까요? 상석에 앉아야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상좌에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모기업 임원 회의를 하면 매번 자리가 바뀌는데 가장 매출액이 많은 사장의 순서대로 상석에 앉는다고 합니다.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은 기업의 임원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다투었습니다. 우리도 서로 비교하며 좀 더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것일까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장점을 발견하고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분반 편성을 위해 에니어그램 검사를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각 유형별로 장점과 단점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모든 면에서 다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장점을 보면 그를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겸손히 배우는 사람은 꾸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는 낮출 수 없습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교만이 오뚝이처럼 살아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겸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구속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구유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히 죄인을 섬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할 때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해지면 상석에 앉는가 끝자리에 앉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상석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끝자리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끝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살 때 상석을 탐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만물의 찌끼 같은 삶을 사는 것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고전 4:13).
예수님은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접한다든지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도로 청하여 사랑의 빚을 갚아버리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섬길 때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십니다. 미국 뉴욕에서 한 여인이 결혼식 전날 파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낙망하지 아니하고 노숙자들을 초청하여 그 잔치를 열었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를 버린 그 남자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입니다. 이 아가씨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둘째 큰 잔치의 비유(15-24).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는 자신과 같은 정통 유대인들만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은 결코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근거하여 당연히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큰 잔치 비유’를 통해서 당연히 참석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그 사람들이 스스로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잔치에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마태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이라고 했습니다(마 22:2).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가 있기 일 년 전에 미리 초청장을 보냅니다.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몇 년 동안 여행을 떠난다든지 다른 사유가 있을 때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잔치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하게 인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주인은 일 년 동안 잔치를 준비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을 위하여 맛있는 불고기, 잡채, 궁중보쌈, 식혜, 포도주 등 음식뿐만 아니라 춤과 음악, 영상 등 모든 것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그리고 잔치가 다 준비되면 다시 사람을 보내어 잔치에 오도록 초청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이때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년 동안 준비한 잔치를 멸시하는 죄악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꼭 그 날 하지 않아도 될 일들입니다. 밭을 살 때 보지도 않고 샀을 리 없습니다. 새로 산 소들은 차후에 얼마든지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또 결혼을 했으면 신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합니다(신 24:5). 이들이 잔치 참여를 거절한 이유들이 표면적으로 보면 사업문제, 물질문제, 가정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고 3 1년 동안 때에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고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대학에 들어갔으니 예배에 가도록 했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기다려 주지만 그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로서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천하를 다 얻고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잔치에 초청한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이들은 그 잔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참석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세상살이에 마음을 다 빼앗겨 영적인 세계에 무관심했습니다. 이들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새로 산 밭을 구경하고, 소를 시험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는데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영적인 세계에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과 행동으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종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 집 주인은 분노했습니다. 주인을 우습게 여기는 그들의 교만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준비한 것을 다 버리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정성을 멸시하고, 잔치를 훼방하는 자들에게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자이며, 몸 불편한 자는 결혼할 수 없는 자이며, 맹인은 밭을 보러 갈 수 없는 자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예수님이 초청하라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명을 받은 종들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그러한 자들을 데려 왔습니다. 잔치 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도 자리가 있자 주인은 종에게 명하였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주인은 빈 자리를 그냥 두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종들을 길과 산울타리 가까지 보내어 한 사람이라도 더 강권해서 데려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길과 산울타리 가는 성 밖에 사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까지도 천국 잔치에 적극적으로 초대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특히 주인은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억지로 청한다’는 뜻입니다. 잔치에 응하도록 힘쓰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은 억지로 청해서라도 그들을 데려와 잔치에 참석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천국잔치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거절하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클리닉 이병욱 원장은 “구원의 감격이 내 안에 넘쳐나는데 어떻게 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에게 ‘구원의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은 먹고 자는 일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노력 끝에 전도한 영혼은 75세의 노인부터 조폭까지 직업과 연령 모두 각양각색입니다. 그는 “아무리 일정에 쫓겨 바쁘고 피곤해도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올 때 느끼는 기쁨은 다른 무엇에도 비할 길 없는 명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힘써 초청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비전을 보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도록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제자가 되는 자의 대가(25-35).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서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고자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싸우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랑하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대개 부모들은 자신은 제자로 살면서 고생을 하더라도 자녀들만큼은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자유롭게 키우다가 자녀의 신앙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내까지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되는 목록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목숨은 본성적으로 다 사랑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잘 먹고,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즐거운 일들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예와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자기의 뜻을 꺾지 아니하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자체를 알고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관습과 전통과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유교적인 가치관이나 관습, 전통을 내려놓아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한 사람을 얻고자하는 생각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얻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구체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우리는 탐욕, 식욕, 정욕을 절제하고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나 외에는 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깨어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에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할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릴 것입니다.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 먼저 계산해 보고 예산이 안 잡히면 믿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영적인 전쟁에 임할 때 먼저 계산해 보고 능력이 부족하면 타협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좋은 진주 장사가 매우 값진 진주를 발견했을 때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마13:45,46).
결론적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제자는 제자다워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음식물은 썩고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쓸 데 없어 버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소금은 간을 맞추어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살맛이 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은 이기심과 향락과 물질주의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착한 행실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에 두고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고, 못 올 사람인데 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