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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 22강(13:10-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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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8회 작성일 17-07-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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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2 강
말씀 | 누가복음 13:10-35
요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 말씀은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줍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고 성장할 지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복음 진리를 분명히 하고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매임에서 푸는 안식일(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마지막으로 회당에 들어가 사역을 하셨습니다. 회당에 앉아 있는 꼬부라진 여인은 귀신에게 매여 있어 답답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니 맑은 하늘을 마음껏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을 눌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귀신 들려”라는 단어는 약하게 하는 영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으로 인해 그 마음이 꼬부라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명주의, 마음의 상처, 피해의식, 미움 등으로 마음이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꼬부라져 있으면 다른 사람을 삐딱하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자신에게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꿋꿋하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고 개척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단에 매어 마음이 꼬부라져서 기를 펴지 못하고 죄에 종노릇하며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여인을 말씀의 능력으로 풀어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여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듣고 안수를 받자 사탄이 떠나가고 꼬부라진 허리가 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음과 몸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꼬부라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날 때 펴지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시는 분입니다(4:18). 예수님은 꼬부라진 인생을 펴주는 분이십니다. 윤석재 형제님은 열등감으로 인해서 꼬부라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공부하자 마음이 펴지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경찰 공무원을 7전 8기로 합격을 하고 이번에는 시험을 보고 진급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마음도 활짝 펴지고 얼굴도 펴지고 삶이 펴져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꼬부라진 사람들을 펴주는 목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말했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그는 안식일 법에 매여 있었고 마음이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외식함으로 꼬부라져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생각도 꼬부라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 왜 합당한가 말씀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에 짐승을 외양간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열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여인을 하루 더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매인 사람, 실패에 매인 사람, 운명에 매인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매인 것이 풀어지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기를 원하십니다. 도전하고 모험을 하며 개척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비유(18-21).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인을 고쳐주시고 그녀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소망을 보시고 한 비유를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19).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지만 자라면 3.5미터까지 자랍니다.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빠르게 성장합니다. 겨자씨가 간직하고 있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겨자 나무에 깃들이는 새들은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미약하게 시작에서 지구를 덮고 이천년을 지내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속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지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돌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장해서 지구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한 번에 반죽하기 알맞은 양으로서 약 150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의 빵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만민을 먹일 수 있는 분량으로 자라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누룩과 같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은 강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와 약자들을 보호하고 공의를 세우며 인애로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어갑니다. 복음은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가족을 변화시키고 친구들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많은 반대와 아픔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꿈을 잃지 않으셨고 마침내 그 꿈대로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역사도 많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수고에 비해서 얻는 열매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22-30).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망대가 무너져 죽는 사건을 통해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많다 적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율법사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발견하도록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유치원 선생과 같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짜증이 나고 때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넓은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넓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껏 연애도 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즐기면서 다른 짓 다 하면서 들어가도 됩니다. 이 문은 쉽게 보이고 시원해 보이고 화려해 보입니다. 자기의 많은 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무합니다.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삶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길이 넓은 문이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의 어근은 ‘신음하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목표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목표입니다. 좁은 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생명을 얻습니다. 반대로 넓은 문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 들어가기도 쉽지만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우리가 인본주의와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다 가는 길보다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을 찾아서 가다보면 생명을 얻고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힘쓰라는 뜻은 경기에 임한 운동선수처럼 “필사의 노력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라는 영생을 얻는 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다가 스스로 꺼리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하고자 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좁은 길, 외길을 가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좁은 문으로 가기가 어렵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중심을 지키고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좁은 문은 실제적으로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6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에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 자체를 인격적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넓은 문이 좋은 게 아닙니다. 쉽고 편한 신앙생활이 좋은 게 아닙니다. 꼭 이렇게 말씀대로 신앙생활 해야 하나? 그냥 적당히 믿으면 구원받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도 구원은 좁은 문입니다. 너무나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온갖 오락과 향락의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의 쾌락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또 무신론과 다원주의 사상의 도전이 있습니다. 본성대로 사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때 생명력 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25-30절은 닫힌 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그들이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나를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그들은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 입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나중 된 자와 먼저 될 자에 정관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특정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종족과 신분에 구별 없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선민이라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나중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은 나중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 닫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해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9:27). 우리는 오직 겸손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빌2:12).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와서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헤롯의 살해 위협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에도 자신이 갈 길을 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명인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어려움도 있고 위협도 있고 때로는 손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모습은 비장하며 감동을 줍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때로 힘들고 장래도 막막합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 불신 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그날까지 나의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예수님을 본받아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국 무기력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열매도 없고 황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은 풍성한 생명과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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