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7년 눅36강(23:26-56)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페이지 정보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 36 강
말씀 | 누가복음 23:26-56
요절 | 누가복음 23:34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용서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바르게 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값없이 죄사함을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끌고 갈 때에 몸이 지쳐서 쓰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쭉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형을 당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를 깨닫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사도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도 왜 내가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나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서 할 때 손해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감추어진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사도들은 다 도망을 갔는데 여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에 동행했을 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야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울지 말고, 자신들의 죄로 인해 당할 고통과 후손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받을 심판을 인하여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 그들과 그 자녀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시며 더욱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지금 한 해에 교회가 700개가 개척되고, 3000개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의 신자 비율을 보면 15-19세 2%, 20-24세 1.8%, 25-29세 1.7%입니다. 학생과 청년 세대에서는 유럽보다 크리스천 비율이 더 낮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자녀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이들이 복음 진리를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신자들의 비범한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경우에 일어날 일들이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날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에 있을 참혹한 형벌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장차 다가올 최후의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잉태하지 못한 여인과 해산하지 못한 배와 젖을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몸이 무거운 임산부들은 빨리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해산하는 여인과 젖먹이는 산모들은 자식과 함께 죽는 형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 없이 홀로 있는 여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혹독한 심판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산이라도 자기 위에 무너져서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마른나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도 이렇게 잔인하게 행한다면 마른 나무와 같은 죄 많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더 혹독한 심판과 형벌이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형틀에 눕히고 양 손목에 큰 못을 박았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 후에 양 발을 포개어 더 큰 못을 박았습니다. 비명 소리가 골고다 언덕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그의 온 몸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군병들은 십자가에 줄을 연결하고 깊이 파 놓은 구덩이에 세웠습니다. 이때 ‘쿵!’하고 십자가가 구덩이에 떨어지며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쳐지면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 후에 뜨거운 태양을 쬐이며 심한 갈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금방 죽지 않고 이틀씩 사흘씩 까무러치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서서히 죽어갑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참느라 혀가 이틀에 붙었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려 십자가를 적시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온 몸은 채찍에 맞아 피멍이 들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예수님은 물같이 쏟아졌으며, 그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습니다. 그 마음은 초밀 같아서 그 속에서 녹았습니다.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이 되었고, 혀가 이틀에 붙었습니다(시 22:14,19). 골고다 언덕에는 세 명의 죄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고 예수님이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이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은 빌라도, 거짓 고소를 한 종교지도자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백성들, 그리고 예수님이 체포되자 줄행랑을 친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몰랐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미혹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신성모독을 한다고 정죄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을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을 주동한 사람입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싸운 사람이요, 유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한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구원을 실제적인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시며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기력한 구원자로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몰고 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임으로 그 민족이 멸망당하고 유리방황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이 얼마나 처절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무지하여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변호하십니다. 죄의 포로된 자들이기에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죄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탐욕, 이기심, 자기 사랑, 정욕, 미움, 폭력, 편협한 마음, 교만과 불신, 자기 고집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고통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죄로 병든 우리가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1957년 5월 클리블랜드의 한 가게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게 주인이 사망하였고 경찰은 살해 용의자로 당시 17살이었던 리키잭슨과 그의 친구를 한 소년의 증언을 증거로 체포하였습니다. 잭슨과 그의 친구는 한 평생 감옥에서 살아가게 되고,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30여년이 흐른 후 한 남자가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 고백을 합니다. 그 이름은 에디 버넌. 그는 클리블랜드의 총격사건을 증언하였던 소년으로 그 당시 한 증언이 거짓 증언이라고 목사님께 고백합니다. 30여년 이상을 자기가 한 거짓 증언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다가, 이 이야기를 목사님께 하게 되었고, 목사님과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리키 잭슨과 그의 친구는 39년만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리키 잭슨이 에디 버넌을 바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짓 증언으로 잭슨과 친구가 감옥에 간 일에 대해 오랫동안 그를 경멸하였지만, 그를 용서하지 않고는 그의 삶은 계속해서 제자리걸음 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또 에디 버넌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 그를 용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 역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아직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자유함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군병들은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비꼬았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조롱당할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것 하나이다(시 22:6-8).”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방거리,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라는 말은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이런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비방했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인데 어떤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할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이런 비방은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주님을 대적하고 원수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있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라고 변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듣고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강도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임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강도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우리의 행위가 선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행악자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일생 죄만 짓다가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웁니다.
44,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오후 12-3시까지 가장 밝아야 할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태양 빛이 어두워짐으로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예수님에게 임했음을 말해 줍니다. 태양은 자연을 대표합니다. 자연까지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죄 아래 있는 온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어두움으로 가리셨습니다.
이런 현상과 함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성전은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지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휘장을 열고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짐승의 피를 뿌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날을 대속죄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 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전의 그림자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했습니다. 죄인들이 자기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요한계시록 21:22은 말씀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으시고 저주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심치 않고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머무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과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믿고 자기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죄 없는 사람,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죽인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의로우신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건은 장차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공회 의원으로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 있었는데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지금까지 은밀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담대해졌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진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남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순수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여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주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23:26-56
요절 | 누가복음 23:34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용서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바르게 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값없이 죄사함을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끌고 갈 때에 몸이 지쳐서 쓰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쭉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형을 당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를 깨닫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사도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도 왜 내가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나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서 할 때 손해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감추어진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사도들은 다 도망을 갔는데 여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에 동행했을 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야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울지 말고, 자신들의 죄로 인해 당할 고통과 후손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받을 심판을 인하여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 그들과 그 자녀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시며 더욱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지금 한 해에 교회가 700개가 개척되고, 3000개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의 신자 비율을 보면 15-19세 2%, 20-24세 1.8%, 25-29세 1.7%입니다. 학생과 청년 세대에서는 유럽보다 크리스천 비율이 더 낮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자녀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이들이 복음 진리를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신자들의 비범한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경우에 일어날 일들이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날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에 있을 참혹한 형벌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장차 다가올 최후의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잉태하지 못한 여인과 해산하지 못한 배와 젖을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몸이 무거운 임산부들은 빨리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해산하는 여인과 젖먹이는 산모들은 자식과 함께 죽는 형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 없이 홀로 있는 여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혹독한 심판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산이라도 자기 위에 무너져서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마른나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도 이렇게 잔인하게 행한다면 마른 나무와 같은 죄 많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더 혹독한 심판과 형벌이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형틀에 눕히고 양 손목에 큰 못을 박았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 후에 양 발을 포개어 더 큰 못을 박았습니다. 비명 소리가 골고다 언덕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그의 온 몸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군병들은 십자가에 줄을 연결하고 깊이 파 놓은 구덩이에 세웠습니다. 이때 ‘쿵!’하고 십자가가 구덩이에 떨어지며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쳐지면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 후에 뜨거운 태양을 쬐이며 심한 갈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금방 죽지 않고 이틀씩 사흘씩 까무러치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서서히 죽어갑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참느라 혀가 이틀에 붙었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려 십자가를 적시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온 몸은 채찍에 맞아 피멍이 들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예수님은 물같이 쏟아졌으며, 그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습니다. 그 마음은 초밀 같아서 그 속에서 녹았습니다.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이 되었고, 혀가 이틀에 붙었습니다(시 22:14,19). 골고다 언덕에는 세 명의 죄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고 예수님이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이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은 빌라도, 거짓 고소를 한 종교지도자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백성들, 그리고 예수님이 체포되자 줄행랑을 친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몰랐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미혹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신성모독을 한다고 정죄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을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을 주동한 사람입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싸운 사람이요, 유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한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구원을 실제적인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시며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기력한 구원자로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몰고 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임으로 그 민족이 멸망당하고 유리방황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이 얼마나 처절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무지하여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변호하십니다. 죄의 포로된 자들이기에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죄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탐욕, 이기심, 자기 사랑, 정욕, 미움, 폭력, 편협한 마음, 교만과 불신, 자기 고집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고통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죄로 병든 우리가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1957년 5월 클리블랜드의 한 가게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게 주인이 사망하였고 경찰은 살해 용의자로 당시 17살이었던 리키잭슨과 그의 친구를 한 소년의 증언을 증거로 체포하였습니다. 잭슨과 그의 친구는 한 평생 감옥에서 살아가게 되고,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30여년이 흐른 후 한 남자가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 고백을 합니다. 그 이름은 에디 버넌. 그는 클리블랜드의 총격사건을 증언하였던 소년으로 그 당시 한 증언이 거짓 증언이라고 목사님께 고백합니다. 30여년 이상을 자기가 한 거짓 증언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다가, 이 이야기를 목사님께 하게 되었고, 목사님과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리키 잭슨과 그의 친구는 39년만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리키 잭슨이 에디 버넌을 바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짓 증언으로 잭슨과 친구가 감옥에 간 일에 대해 오랫동안 그를 경멸하였지만, 그를 용서하지 않고는 그의 삶은 계속해서 제자리걸음 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또 에디 버넌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 그를 용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 역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아직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자유함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군병들은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비꼬았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조롱당할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것 하나이다(시 22:6-8).”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방거리,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라는 말은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이런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비방했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인데 어떤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할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이런 비방은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주님을 대적하고 원수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있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라고 변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듣고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강도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임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강도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우리의 행위가 선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행악자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일생 죄만 짓다가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웁니다.
44,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오후 12-3시까지 가장 밝아야 할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태양 빛이 어두워짐으로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예수님에게 임했음을 말해 줍니다. 태양은 자연을 대표합니다. 자연까지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죄 아래 있는 온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어두움으로 가리셨습니다.
이런 현상과 함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성전은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지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휘장을 열고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짐승의 피를 뿌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날을 대속죄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 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전의 그림자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했습니다. 죄인들이 자기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요한계시록 21:22은 말씀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으시고 저주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심치 않고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머무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과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믿고 자기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죄 없는 사람,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죽인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의로우신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건은 장차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공회 의원으로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 있었는데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지금까지 은밀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담대해졌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진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남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순수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여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주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