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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 34강(22:24-46) 아버지의 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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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7회 작성일 17-10-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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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34 강
말씀 | 누가복음 22:24-46
요절 | 누가복음 22:42

아버지의 원대로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이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고 먹지 못하면 배고프고 각종 질병에 연약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내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할수록 분명해졌고, 기도할수록 아버지의 뜻을 행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섬기는 자(24-30). 24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또’ 라는 단어를 볼 때 제자들은 이미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고 계속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크냐는 다툼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 하고 더 좋은 특권을 차지하려는 야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서 항상 일어납니다. 그들은 새로운 내각에서 ‘과연 누가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고, 누가 좌우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지상메시야 왕국,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모습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제자들은 세상 임금이나 집권자들과 달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크고자 할수록 젊은 자와 같고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합니다. 특권이 많은 직분일수록 책임도 큰 것입니다. 권력이란 백성을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 앉아서 먹는 자가 있고, 음식을 만들어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섬기는 자는 앉아서 먹는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합니다. 음식을 만들 때는 사랑과 정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앉아서 먹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자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음식으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의 상태에 맞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b).”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을 때에 예수님이 열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배불렀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섬기는 일을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양식은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과 음료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힘을 얻고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시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의 죄와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을 따르도록 격려하시고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7-30).”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동고동락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받고 배척을 받을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전도 여행을 다닐 때 지갑도 가지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좋을 때는 함께 하다가 힘든 시험을 만나면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자기에게 희생이 요구될 때에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칭찬을 받을 때는 좋아 하지만 욕을 먹을 때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시험을 받으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맡기고 다스리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는 모든 약자들이 섬김을 받고 마음껏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며 기쁨으로 일하는 평화롭고 복된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가 섬기려고 하니 모두가 윤택하고 풍성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큰 자입니다.

  둘째,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31-38).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고 섬겨 주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보통 사람은 자기가 죽게 된 판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을 염려하십니다. 특별히 수제자 시몬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의지와 의리를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는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넘어뜨리려고 세차게 흔들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몬을 위해 예수님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잠시 넘어질 것을 아시지만 그가 다시 회복될 것도 아십니다. 베드로에게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에 넘어진 베드로가 잠시 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잘 알고 계셨고 그를 위해서 정확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마음이 상했던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의리는 얼마나 연약한지요? 그는 불과 몇 시간 후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맙니다. 그는 계집 종의 말에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그렇게 믿음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볼 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검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하셨는데 연약하고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가 필요할까요?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자들과 양들과 연약해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셋째,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39-46).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그 보다 친밀한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잔은 저주의 잔이요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고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응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사형법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것입니다. 이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그 자신이 죄인이 되셔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분리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도 크지만 세상의 죄를 위하여 경험해야만 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가 더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버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신 버리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을 영접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감당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십자가도 아무런 고뇌와 고통이 없이 지셨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아시고 고통을 지셨으니 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여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알면서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목숨을 건 자기 부인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내 원대로 되게 아버지의 원을 바꾸어 주시던지 맞추어 달라고 떼를 쓰며 기도합니다. 내게 고난이 오거든 피할 길을 주시고 평탄한 길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없는 복을 주시며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길이 기도입니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꿈을 갖게 되고 열정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비전은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부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서 다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고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려면 내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죄를 이길 힘이 없어서 넘어지기도 합니다. 죄 짓고 나서 ‘잘못 했어요’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죄의 소욕을 부인하는 깊이만큼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기를 죽이는 일에서 적당히 싸웠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싸웠습니다. 그러니 영적 진보가 더뎠습니다. 자기 사랑을 죽이지 못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상처를 줍니다. 죽어야 할 자아가 죽지 못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쾌락에 대한 욕망을 죽이기 못했습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인터넷 뉴스를 탐독하고 하고 싶은 운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열정이 없이 살았습니다. 메시지도 할 만큼만 했습니다. 죽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멈추고 쉬었습니다. 그러나 동역자는 해야 할 일을 몸이 아파도 죽어라고 하여 끝냅니다. 지독합니다. 그러니 열매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투쟁을 배워야 합니다. 섬기는 일도 죽기까지 섬겨야 합니다. 적당히 섬기면 감동이 없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건, 메시지를 쓰건, 무슨 일을 하던지 죽기까지 감당하여 감동을 주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고 불사조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예수님을 도우셨는지 알 수 없지만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힘이 더해졌습니다. 로마서 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도우신다’는 동사는 “함께 짐을 짊어지다”, “함께 연합해서 돕는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짊어지는 “짐”은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 속을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최선의 것이 아닌 것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조차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온전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성령의 사역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연약함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는 포도즙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허리가 끊어지듯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힘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담대하게 앞장서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슬픔이 가득 하면 무기력해지고 잠만 자게 됩니다. 우울증도 그런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우울해지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의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의 잠을 자다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슬픔과 우울함이 몰려 올 때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평소에 기도에 힘씀으로 자기부인을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또 중요한 일을 앞두고 또는 시험을 당할 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시험을 이기게 도우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알게 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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