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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년 눅31강(20:1-18) 모퉁이의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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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17-09-2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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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31 강
말씀 | 누가복음 20:1-18
요절 | 누가복음 20:17
모퉁이의 머릿돌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또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세례요한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포도원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그와 어떻게 바른 관계를 누릴 수 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묵상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모든 권한은 산헤드린과 그 대표인 대제사장이 감당을 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를 깎아 내린다고 생각하며 대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는 누가 준 것입니까?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위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 권위로 공의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약자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 권위도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드려야 하는 것이요, 일정 기간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권불십년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했지만 퇴임한 이후 그들의 삶을 볼 때 권세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조사를 받으면서 곤욕을 치루는 모습들을 보고 있습니다. 권세나 부, 재능도 하나님이 일정 기간 위임해 주신 것임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 반문을 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들은 어디서 많이 듣던 대답을 했습니다. “어디로부터 인지 알지 못하노라.” 재판이나 청문회를 보면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 곤란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눈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이나 단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영적 권위는 조직이나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에 기초한 것입니다. 주의 종은 자기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려면 그 말의 열매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는 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재림 외에 다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선생으로서 권위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듣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탈권위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모두 자기가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찰의 권위, 선생의 권위, 부모의 권위, 대통령의 권위 등 많은 부분에서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대신에 소통과 섬김의 리더십이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권위의 근본은 사랑과 인격과 섬김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셨지만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섬기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탈권위 시대에 진정한 권위에 대해 우리의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정한 권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주인은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물을 잘 줄 수 있도록 저수지를 만들고 망대도 짓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타국에 오래도록 가 있으니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수 때가 되자 극상품 포도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자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종이 소출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자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기들이 땀 흘리며 수고한 것을 주장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신에 주인은 아무 일도 안 하고 포도원 소출을 뺏으러 온 사람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서 소출 얼마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투자를 한 주인이 소출의 얼마를 받고자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농부들도 소출 얼마를 드림으로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관계성을 좋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잘 유지되면 주인은 기쁨으로 더 좋은 것들을 농부들에게 주고 계속 일을 맡길 것입니다. 농부들은 최고의 것으로 주인의 종들을 환대해야 마땅했습니다.

  주인은 첫째 종이 돌아왔을 때 그가 무슨 실수를 했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공손하게 소출 얼마를 받으러 왔다고 사전 교육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두 번째 종이 공손하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처사가 영접이 되지 않았지만 관용하는 마음으로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간 종은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상하도록 두들겨 맡고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탄식을 했습니다. “어찌할까?” 이는 종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의 표시입니다. 농부들의 무지와 교만을 생각할 때 주인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하는가? 매를 얼마나 맞으려고 저럴까? 그러나 주인은 당장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사실 농부들이 이제까지 종들에게 한 행동을 보면 아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아들까지 보내고자 한 것은 주인의 오래 참는 성품과 농부들에 대한 소망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들이 포도원에 도착했습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우리는 여기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에게 왜 이렇게 무례하고 악한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들은 포도원의 세금과 포도원 자체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폭력을 낳았고 능욕과 살인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죄입니다. 그들이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포도원이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욕심으로 인해서 자기를 속였습니다. 아들을 죽이면 자기들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은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이스라엘 땅이고 농부들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장로들입니다.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과 재산, 재능, 자녀들, 직장과 기업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소출 얼마를 내면 포도원을 끝까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투쟁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장로들은 파멸에 이르게 되었고 포도원은 이방인에게 넘겨졌습니다.

  우리는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정되고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키기를 원합니다. 사실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낭비하고 있고, 양심없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원플러스원’의 기회를 이용하겠다는 원시적인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좋은 차와 집과 컴퓨터와 핸드백을 소유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질투심에서 짝퉁이라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장폴 사르트르는 “내가 가진 것이 나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소유를 통해서 자기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소유를 통해서 소속감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싶어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은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의 주된 관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소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소득이 불어날수록 행복이 증가하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소유와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것을 종합해 보면 부를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점차 자신들이 목표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이것은 더 많은 것을 향한 끊임없는 굶주림을 야기합니다. 소유는 더 많은 소유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물질주의자들의 목표야말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안정, 만족,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소출을 드려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며, 가난한 이웃과 형제들을 돌볼 때에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신 부로 가난한 자들이 형제 가운데 없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줄수록 더욱 채워주십니다. 반대로 부를 목표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우상숭배요 망하는 길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 소유한 것 같았지만 결국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다듬고자 했지만 다듬어지지 않는 돌이었습니다. 건축자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다듬어지지 않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버린 돌이십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버린 바된 자들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는 어느 구석에 쳐 박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다가 자기 것을 다 내어주고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버린 돌을 택하여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지을 때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이 돌을 중심으로 벽들이 연결되고 집을 올리는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그를 배척하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립니다. 다니엘서에 ‘손 대지 아니한 돌’이 쇠로 된 신상의 윗부분과 진흙으로 된 발을 쳐부숩니다. 이 돌은 거대한 산이 됩니다. 이 돌은 하나님이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단2:44,45).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보배로운 산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보배로운 산돌이 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를 믿는 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집니다.

  우리도 내 인생의 주인이 결코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농부들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실히 일하고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지라도 내 의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고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어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셨습니다. 때마다 햇빛과 공기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물질, 자녀들, 사역의 열매들은 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것을 갖고 누리기보다 ‘남의 것’으로 살아갑니다. 내 차를 이용하기보다 남의 차 즉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내 집을 갖기 이전에 남의 집에 전세나 월세로 삽니다. 또한 내 사업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대부분 소유주가 다른 사람인 회사나 직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일상 속에서 ‘남의 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보십니다. 누가복음 16:12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에 충성할 때 나의 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인생의 중심이 되어서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크게 맞는 날이 올 것입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분명하게 놓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 영광을 구하는 삶이 가장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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