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3강(1:29-45)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18 마가복음 제 3 강
말씀 | 마가복음 1:29-45
요절 | 마가복음 1:38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보여줍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하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들을 불러 복음을 맡깁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다가오는 세대를 준비시켜야 합니다.
첫째, 많은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29-34).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시몬의 장모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의 장모님은 예수님과 사위의 친구들이 왔는데 누워 있는 것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빨리 일어나서 이들을 섬겨야 하는데 열병으로 인해서 누워 있어야 하니 더욱 열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장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을 강하게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자마자 예수님과 그 일행을 수종들었습니다. 맛있는 씨암탉을 잡아 가버나움 찜닭을 요리하여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병까지 치료해준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는 사위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장모님은 콧노래를 부르며 섬겼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육신의 병이나 마음의 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음을 받고 주님과 양들을 마음껏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각양각색의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났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밤 늦게까지 치료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귀신은 귀신 같이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떠벌리는 것으로 인해서 사역에 훼방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며 조용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자기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진정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5-39).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은 광야입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았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들을 환영하고 섬기기에 바쁩니다. 말씀을 주고 병을 고쳐주고 섬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계속하려면 적절한 휴식과 충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심으로 사역에 필요한 힘을 충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밤에는 늦게까지 일을 했지만 일찍 일어나 성실하게 일하셨습니다.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지 않으셨습니다.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추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새벽은 영감이 잘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새벽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루 하루를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 문제가 크기 때문에 구원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몰라서 방황하는 청년, 두통, 치통, 요통, 위장병으로 고통하는 사람,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해서 사는 것이 힘든 사람,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공의에 굶주려 있는 사람,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각자 인생 문제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만 갔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것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나 바람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찾아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곳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머물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보다 아직 그를 알지 못하는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침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셨고, 그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로 전도하셨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가 호흡이라면 전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잘 먹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계속해서 이 땅에 살도록 하신 목적 중의 하나는 전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진실하게, 간절하게 전도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옥에 온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들 책임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거룩한 부담을 느끼면서 일생 전도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환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조카 마귀가 울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삼촌 마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마귀가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해도 환자들이 우리의 대적인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단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지 마렴.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구원받은 저 환자가 절대로 본질적인 것만큼은 못하도록 해라. 그러면 돼. 찬송 경연대회를 하고. 성경 퀴즈 대회를 하고, 축구 시합을 하고, 바자회도 하도록 해 주어라. 그럴 땐 그냥 놔두어도 돼. 그러나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기도하기 시작하고,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 공부를 하고, 전도를 하려고 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럴 때는 정말 비상사태라고!” 이처럼 마귀는 본질적인 것은 못하도록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전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는 내 말과 내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그러므로 기도를 충분히 한 후에 전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전도의 첫 걸음입니다.
지금은 봄학기 초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여 바이블 까페에 양들을 초청하고, 마가복음 일대일 말씀 역사를 열심을 다해서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전도와 제자 양성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45).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는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가버나움에서 주변지역과 온 갈릴리로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시골로 피해 다니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나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나병은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켜 살을 썩게 합니다. 나병은 주로 덥고 못사는 곳에서 많이 발병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곪고 진물이 나고 신체 부위가 떨어져나가고 추해집니다. 그는 부정해져서 사람들과 격리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외롭고 고독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병을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고도 사람을 만나기 전에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은 나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부정하게 된 몸을 깨끗한 몸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돌과 율법이라는 장벽도 극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원하시면’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겸손과 사람 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한이 배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였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조롱을 받고 가족들에게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마저도 뭉그러질대로 뭉그러졌습니다. 그의 자존감은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그의 삶은 버림을 받았고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순간은 정말 무디어졌던 나병 환자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나은 나병환자에게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맺힌 외로움과 받은 마음의 상처들이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댄 상태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내가 원하노니(I am willing)’ 원어는 대문자로 강조형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치료하셨습니다.
성경은 문둥병을 죄와 관련하여 취급합니다. 문둥병은 죄와 흡사합니다. 문둥병이 살을 문드러지게 하여 지체가 떨어져나가듯이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추하게 하듯이 죄는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격리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킵니다. 문둥병이 들면 신경조직이 죽어 무감각하게 되듯이 죄도 심해지면 죄의식이 없어질 정도로 무디어 집니다. 문둥병의 결국은 죽음이듯이 죄의 종착지도 죽음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아는 이기심, 계절을 타는 음란과 정욕,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 알지 못하며 판단하는 죄, 죄의 온상인 게으름과 안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불신, 사랑이 없는 무정, 무자비, 사람이 넘치는 시기 질투,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 탐욕 등 무수한 죄들을 범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깨끗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고난과 저주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을 나병환자와 같이 더럽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범죄자들은 과거의 전과기록 때문에 얽매여 죄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한 번 얼룩진 자신의 인생은 결코 깨끗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과거에 매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죄로 인해 더러워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깨끗해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추행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처럼 깨끗하게 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 상처가 다 씻겨 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보통 나병이 치료가 되어도 그의 떨어져나간 지체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떨어져 나갔던 지체까지도 다 회복되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깨끗해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상처들이 오래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면 그런 상처들이 원상대로 회복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열광이 예수님의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수록 종교지도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기 속에 담아두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도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속이 불붙는 것 같아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체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하였는데 그 소문은 말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병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전도하신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또한 전도자이십니다. 우리도 받은 바 은혜를 나누며 전도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구원 얻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29-45
요절 | 마가복음 1:38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보여줍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하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들을 불러 복음을 맡깁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다가오는 세대를 준비시켜야 합니다.
첫째, 많은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29-34).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시몬의 장모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의 장모님은 예수님과 사위의 친구들이 왔는데 누워 있는 것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빨리 일어나서 이들을 섬겨야 하는데 열병으로 인해서 누워 있어야 하니 더욱 열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장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을 강하게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자마자 예수님과 그 일행을 수종들었습니다. 맛있는 씨암탉을 잡아 가버나움 찜닭을 요리하여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병까지 치료해준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는 사위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장모님은 콧노래를 부르며 섬겼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육신의 병이나 마음의 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음을 받고 주님과 양들을 마음껏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각양각색의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났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밤 늦게까지 치료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귀신은 귀신 같이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떠벌리는 것으로 인해서 사역에 훼방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며 조용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자기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진정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5-39).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은 광야입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았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들을 환영하고 섬기기에 바쁩니다. 말씀을 주고 병을 고쳐주고 섬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계속하려면 적절한 휴식과 충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심으로 사역에 필요한 힘을 충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밤에는 늦게까지 일을 했지만 일찍 일어나 성실하게 일하셨습니다.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지 않으셨습니다.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추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새벽은 영감이 잘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새벽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루 하루를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 문제가 크기 때문에 구원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몰라서 방황하는 청년, 두통, 치통, 요통, 위장병으로 고통하는 사람,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해서 사는 것이 힘든 사람,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공의에 굶주려 있는 사람,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각자 인생 문제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만 갔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것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나 바람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찾아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곳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머물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보다 아직 그를 알지 못하는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침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셨고, 그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로 전도하셨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가 호흡이라면 전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잘 먹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계속해서 이 땅에 살도록 하신 목적 중의 하나는 전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진실하게, 간절하게 전도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옥에 온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들 책임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거룩한 부담을 느끼면서 일생 전도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환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조카 마귀가 울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삼촌 마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마귀가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해도 환자들이 우리의 대적인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단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지 마렴.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구원받은 저 환자가 절대로 본질적인 것만큼은 못하도록 해라. 그러면 돼. 찬송 경연대회를 하고. 성경 퀴즈 대회를 하고, 축구 시합을 하고, 바자회도 하도록 해 주어라. 그럴 땐 그냥 놔두어도 돼. 그러나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기도하기 시작하고,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 공부를 하고, 전도를 하려고 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럴 때는 정말 비상사태라고!” 이처럼 마귀는 본질적인 것은 못하도록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전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는 내 말과 내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그러므로 기도를 충분히 한 후에 전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전도의 첫 걸음입니다.
지금은 봄학기 초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여 바이블 까페에 양들을 초청하고, 마가복음 일대일 말씀 역사를 열심을 다해서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전도와 제자 양성역사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45).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는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가버나움에서 주변지역과 온 갈릴리로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시골로 피해 다니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나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나병은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켜 살을 썩게 합니다. 나병은 주로 덥고 못사는 곳에서 많이 발병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곪고 진물이 나고 신체 부위가 떨어져나가고 추해집니다. 그는 부정해져서 사람들과 격리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외롭고 고독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병을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고도 사람을 만나기 전에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은 나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부정하게 된 몸을 깨끗한 몸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돌과 율법이라는 장벽도 극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원하시면’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겸손과 사람 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한이 배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였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조롱을 받고 가족들에게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마저도 뭉그러질대로 뭉그러졌습니다. 그의 자존감은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그의 삶은 버림을 받았고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순간은 정말 무디어졌던 나병 환자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나은 나병환자에게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맺힌 외로움과 받은 마음의 상처들이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댄 상태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내가 원하노니(I am willing)’ 원어는 대문자로 강조형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치료하셨습니다.
성경은 문둥병을 죄와 관련하여 취급합니다. 문둥병은 죄와 흡사합니다. 문둥병이 살을 문드러지게 하여 지체가 떨어져나가듯이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추하게 하듯이 죄는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격리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킵니다. 문둥병이 들면 신경조직이 죽어 무감각하게 되듯이 죄도 심해지면 죄의식이 없어질 정도로 무디어 집니다. 문둥병의 결국은 죽음이듯이 죄의 종착지도 죽음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아는 이기심, 계절을 타는 음란과 정욕,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 알지 못하며 판단하는 죄, 죄의 온상인 게으름과 안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불신, 사랑이 없는 무정, 무자비, 사람이 넘치는 시기 질투,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 탐욕 등 무수한 죄들을 범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깨끗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고난과 저주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을 나병환자와 같이 더럽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범죄자들은 과거의 전과기록 때문에 얽매여 죄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한 번 얼룩진 자신의 인생은 결코 깨끗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과거에 매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죄로 인해 더러워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깨끗해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추행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처럼 깨끗하게 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 상처가 다 씻겨 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보통 나병이 치료가 되어도 그의 떨어져나간 지체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떨어져 나갔던 지체까지도 다 회복되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깨끗해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상처들이 오래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면 그런 상처들이 원상대로 회복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열광이 예수님의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수록 종교지도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기 속에 담아두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도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속이 불붙는 것 같아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체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하였는데 그 소문은 말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병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전도하신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또한 전도자이십니다. 우리도 받은 바 은혜를 나누며 전도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구원 얻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