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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8 막 19강(10:1-31) 부자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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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2회 작성일 18-07-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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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9 강
말씀 | 마가복음 10:1-31
요절 | 마가복음 10:21

부자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자 결혼의 진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다른 세계를 배우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결혼은 남녀간 연합의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결혼에 비유하였습니다. 신부된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신비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에게 영생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이 시간 결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는 가운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결혼의 진리(1-12).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습니다. 무리가 다시 모여 들자 예수님은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당시 문서들을 보면 이혼 문서가 매우 많습니다. 문헌을 보면 랍비 중에는 밥하는 자기 아내의 뒷모습이 좋지 않아서 이혼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혼에 대한 문제를 꺼낸 것을 보아도 이혼이 당시 사회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이 그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취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또 이혼을 하라고 하면 예수님이 사랑이 없다고 공격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묘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예수님은 정면 돌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어떻게 대답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이혼문제에 대해서 율법을 정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이혼에 대한 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여성의 인권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구수를 계산할 때 아이들과 여인들을 숫자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남성 중심 사회여서 여인들은 남편들의 감정에 따라서 쉽게 이혼을 당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은 재혼할 수도 없었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여자가 밥을 태워도 이혼 사유가 될 정도였습니다. 모세는 당시 생활 능력이 없던 여성들이 이혼을 당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이혼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혼을 하는데 장애물을 만들어 함부로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대개 이혼 사유를 보면 성격이 달라서가 일위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여 다른 세계를 배우며 조화를 이루도록 결혼 제도를 창설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장 배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생각이 매우 다릅니다. 선물을 하는 것, 설거지를 하는 것,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 교육에 대한 태도 등등 모든 면에서 남편과 아내가 같을 수 없습니다. 사사건건 두 사람이 싸울 수도 있고 항상 다른 세계를 배우며 자기를 부인하며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인생, 성격 맞추고 감당하느라 고생하고 살기에는 억울하다, 난 절대 이 결혼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스타일, 취미, 문화 차이를 고집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먼저 바뀌면 조화를 이루기가 쉽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그 완악함을 발견하며 회개하고 가정을 지키며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기를 소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어떤 뜻으로 제정하셨는지 가르치십니다. 6-9절을 보십시오.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입니다. 동성 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실 때 세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살 때 부모로부터 경제적, 물질적 지원을 받고, 애정적 지원을 받았는데 거기서 자립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부모로부터 사랑과 존중과 인정을 공급받고, 삶의 가치와 목적, 신앙 등 영적인 것들을 공급받았습니다. 이제 부모로부터 떠남으로 해서 부모로부터 받아오던 것들을 부부공동체에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그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24에서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합한다는 말은 아교나 강력한 접합제로 둘을 하나로 붙이듯이 견고하게 접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로 붙여놓은 것을 나뉘려고 한다면 찢어져서 둘 다 못쓰게 됩니다. 셋째,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연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인격의 결합, 마음의 결합까지를 포함합니다. 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희망과 근심, 사명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좋아서, 물질적,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결혼할 대상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결혼관의 문제입니다. 결혼을 서로 좋아하면 함께 살기 위해 자기들이 결정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아직 결혼을 해야 할 분들은 이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이미 결혼을 했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나고 결혼했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해야 하며 절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결혼 생활에 따르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이혼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결혼생활이 멋있어집니다.
 
  오늘 날 결혼은 서로 좋아해서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지면 헤어집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이혼합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으면 이혼을 막기가 힘들고 억지로 함께 산다고 해도 힘듭니다. 결혼은 자신들의 유익과 쾌락만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 결혼을 이루신 것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보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고자 하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창 2:20).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똑 같은 사명을 깨달은 사람과 결혼하여 한 평생을 함께 살면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결혼의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자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입니다. 한 번 결혼한 그리스도인 부부는 죽음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지 않고서는 헤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결혼을 할 때 그 가정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큰 축복을 누립니다. 마태복음 19:9 ‘음행한 이유 외에‘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결혼서약을 깨뜨린 경우에 한 해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을 달아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아내가 용납할 수 없을 때입니다. 

  둘째, 어린아이들과 예수님(12-16).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여럿이 모이다 보니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또 여기저기 어질러 놓았습니다. 제자들은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토론하는데 어린아이들이 와서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애들은 저리 가! 빨리 가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 예수님께서 이를 보고 노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것을 보니 점점 바리새인들을 닮아 권위적이고 교만해지고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 속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연약하고 섬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지 못하고 무시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또 이미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셨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신분상승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배우고자 합니다. 또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지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어린아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을 기뻐하고 그 품에 안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깊이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존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셋째, 부자와 하나님 나라(17-31).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이 한 사람은 부자요 청년이요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젊은 나이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힘으로 성공을 해왔듯이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종교적인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구도자적인 사치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즉 일반적인 것보다 특별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거나 소홀히 여기고 멀리서만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단이나 순종은 하지 않고 끝없이 찾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 영생의 주님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마음, 좀 더 선한 길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찾아다녔는가, 자신이 잘 했다는 것만을 주장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율법을 준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속한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가 정말 계명을 잘 지켰을까요? 그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것을 팔아서 이웃에게 준적은 없지 않을까요? 그는 소극적으로 계명을 지켰습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았지만 자기 것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정직하기는 했지만 남을 용서하거나 어려움을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기는 했지만 자기 편에서 판단한 것이지 부모님 편에서 본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잘 하지만 주는 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사랑하사 도우셨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 재물에 대한 탐심이 영생을 얻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회개해야 할 회개 제목입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졌고 그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재물을 팔아서 하나님을 얻도록 도우셨습니다. 내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고 기쁨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재물을 다 판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를 구원자로 믿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배와 그물 심지어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각자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무엇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얻는다면 사실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까? 판단하는 마음, 경쟁하는 마음, 무관심 등등. 예수님은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곁에 있는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를 위해서 내가 희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자로서 양을 칩니다. 양들은 내게 있어 가난한 자입니다. 양에게 나의 모든 것을 팔아서 주는 삶을 살 때 마음에 참된 영생의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 있을 때, 땅의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으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행위적인 측면으로 생각합니다. 열심히 선을 행함으로서 선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의가 강해집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받지 않고 여유가 있으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선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 발견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슬프고 걱정이 많고 억울합니다. 
 
  영생은 하늘의 보화입니다. 영생은 세상에서 또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른 것은 얻지 못하더라도, 다른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이것만은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보화요 영생의 길이 되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기에 앞서 거듭나고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영생은 자신이 애착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좁은 길입니다. 그 외에도 영생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체면, 자존심, 안일, 잔재미, 자기 이상, 남자 또는 여자 친구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은 보충함으로서가 아니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많이 가졌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찾기보다 너무 많아서 버려야 할 것을 찾아서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도 부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부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습니다(욥1:10; 42:10; 시128:1,2; 사3:10). 그러나 예수님은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로 보셨습니다. 재물 뒤에는 맘몬 신이 있습니다. 재물은 각 사람의 주인으로서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물질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영접할 때 물질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때 재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게 되면 천국에 저축이 되고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공급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놀라는 제자들을 보시며 이르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마태는 돈을 위해 동족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세리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어깨를 으시대면서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물질이나 인간관계나 귀한 것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에 빠져서 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음란과 탐심을 버리고 거룩함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 나라가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과 가정과 이 땅에 임하며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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