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막18강(9:30-50) 첫째가 되고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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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8 강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서로 누가 크냐 다투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자신들이 내각을 구성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자리를 정해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되고 섬김을 받고 싶었습니다. 권세를 휘두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방향을 제자들의 소원과는 달리 겸손과 섬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한 위대성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필요한 진리는 반드시,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려 하십니다.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으로 도전하는 것과 순결, 순종, 심판, 예수님의 재림 등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것을 알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모르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뒤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논쟁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지상 메시아의 영광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발하다가 크게 책망을 들었기 때문에 또 물으면 반발하는 것으로 비쳐 또 책망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서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러나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한 것으로 민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영광을 얻고 지상 메시아 왕국을 이루리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쪽으로만 생각을 몰아갔습니다. 세상에 대한 그들의 미련은 그렇게 끈질겼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 상에 올라가신 사건이 그들 간의 경쟁심을 더욱 유발시켰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들은 누가 크냐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였습니다. 모두 다 큰 자,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으며,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서열을 매겼을까요? 누가 먼저 부름을 받았는가? 누가 예수님과 더욱 가까운 친척인가? 예수님이 누구의 이름을 많이 부르시고, 누구를 특별하게 대우하셨는가? 누가 회계 장부를 맡고 있는가? 등 큰 자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랐습니다. 높고 낮음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누가 높고 누가 낮으냐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드리느냐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제 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잠잠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지 못한 속생각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잠잠함으로써 감추려 했습니다. 잘못한 것을 알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을 감추려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을 요구합니다. 이런 것에 시달리는 사람들 중에는 쉽고 편안하게, 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다른 관심은 하나님을 믿고 안정과 기쁨을 얻기를 원할 뿐입니다. 나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실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적인 안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모든 안정과 기쁨은 바른 길을 걸어갈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열매여야 하지 우리가 그러한 것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과 부패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은 더 이상 지적받고 권면 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적인 휴식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깨어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옆구리를 찔러야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누구나 첫째가 되려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아주 강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자가 큰 자입니까?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욕구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대성이란 그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뭇 사람의 끝에 서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섬기는 마음보다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섬김 받고자 하면 할수록 의존적이 되고 무기력해집니다. 불평이 많아집니다.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뭇 사람을 섬기려면 뭇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어딜 가나 섬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갔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섬기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생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섬기고 돌보는 자입니다. 일대일하는 양들을 마음을 다해 섬길 때, 양들이 살아나고,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된다는 의미를 재해석 해 주십니다. 사람의 진정한 위대성은 섬기는 데 있습니다. 리더와 보스는 다릅니다. 보스는 패거리를 만들고 지배하는 자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자기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데 있기 때문에 패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더는 섬기는 자입니다. 그의 목적이 남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파선되었을 때 아이들, 여자들, 노인들, 병사들, 장교들 순으로 탈출하고, 맨 끝에 선장이 탈출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겨서 안전하게 하고, 자신은 맨 끝에 탈출합니다. 세월호 선장과 같이 하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벌을 받게 됩니다. 종은 주인이 잘 되게 하고, 주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다음에, 그때 봐서 가능하다면 자기 것을 취합니다. 주인을 잘 되게 하고 나서 자기 몫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기다려야합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때 그는 진정으로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상급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지도자나 위대한 사람은 좋은 것은 맨 나중에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제일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전북 김제에 110년 된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마을의 최고 부자인 조덕삼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조덕삼에게는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이자익은 고아였는데 조덕삼이 인심 좋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들어와서 조덕삼의 마부일을 하면서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조덕삼이 이자익보다 15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테이트(L.B. Tate) 선교사를 만나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꾸준히 성장하여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선거를 했는데 주인 조덕삼보다 머슴 이자익이 더 많은 표를 얻게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교회를 설립한 유지이고, 신앙적으로도 훌륭했지만 당시 교인들이 여인들과 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슴인 이자익에게 표를 많이 준 것입니다. 당시 장로는 교회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설교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밑에서 교회를 섬기고, 머슴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당장에 일어서서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이 선거는 무효요. 이 교회를 누가 세웠는데~~” 그런데 조덕삼은 일어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여러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 냈습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훨씬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 후 조덕삼은 이자익을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깊이 영접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목사가 되게 하고, 그가 목사 안수를 받자, 다시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맞아 들여서 깍듯이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계속해서 장로로서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 중에 한 분이 국회의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씨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서로를 낮아져서 섬길 때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셨습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어린아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어른들하고는 경쟁하고, 아이들은 아예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를 영접하기보다 경쟁의 상대로 생각했고 배척하고 다투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세상에서 배워 온 사고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영접’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영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볼 때 남을 까고, 배척, 미워하고 짓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접의 대상으로 볼 때는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장점을 살려주고, 그가 잘 되도록 섬깁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아예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까? 영접하기 힘든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거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섬겨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귀찮고 힘듭니다. 섬겨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전혀 감사가 없습니다. 섬겨준다고 해도 당장에 이익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섬긴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섬기기 힘든 데 비해서 섬겨도 별로 유익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어린아이는 비천한 자, 신분이 낮아서 무시 받는 자, 연약해서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 바보 취급을 받는 자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위대한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장점은 인정하지 않고 약점만 보고 무시합니다. 오케스트라를 보면 금관악기는 금관악기대로, 현악기는 현악기대로 특색이 있습니다. 그 특색을 잘 인정해야 합니다. 심벌즈는 연주하는 동안 한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심벌즈가 있어야 음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는 역사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위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도와주는 위대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자를 왜 금하였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 것에 대해서 독점욕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는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통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을 내쫓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화가 났습니다. 사실 자기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내쫓지 못 했는데, 그가 내쫓았기 때문에 경쟁심도 생기고 위기감도 생겼을 것입니다. 어떤 자를 금한 것으로 인해 자기 딴에는 잘 했다고 자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제자들은 모두를 대결 구도에서 생각했고, 경쟁 대상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원수들로 보았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소수파였고 비난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이런 사고 구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자기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오해를 세 번만 생각하면 이해가 생기고(5-3=2), 이해를 두 번만 생각하면 사랑이 생긴다고 합니다(2+2=4). 예수님은 각종 사람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다양한 생각,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동역하며 살 수 있습니다. 좁은 마음은 많은 원수를 만들고 동역의 역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좁은 마음은 사람을 못난이로 만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큰 자가 되려면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그들 모임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대결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줘도 상 받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면 기뻐 받으시고 상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알아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2).” 제자들의 사고 구조로는 사람을 실족시킬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귀신 내쫓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못하게 하는 것을 볼 때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실족시킬 염려도 많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어린양의 입장에서 섬세히 돌보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이유로 실족케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믿음이 어린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1절과 13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사도 바울은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술도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눈이 범죄케 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43-47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범죄하면 결정적으로 작은 자들을 실족시킵니다. 제자들은 여기에 대한 경각심과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손과 발과 눈은 가장 소중한 신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죄를 짓게 한다면 찍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를 알고 죄를 짓게 만들 가능성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죄 짓는 것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문화 현상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양심이 되살아나서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오히려 둔감해지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처음에는 거룩하게 살고자 영적인 투쟁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죄 짓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은혜요 믿음이 성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더욱 섬기는데 민첩하고 죄에 민감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또한 죄를 짓게 되면 현재적으로 우리 영혼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지옥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과 같이 녹아야 합니다. 즉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포용하고 은밀하게 맛을 내야 합니다. 바닷물이 짜지만 그 염분의 비율은 0.4%라고 합니다. 다 소금일 필요가 없습니다. 몇 사람이 소금이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참 맛이 나려면 겸손과 희생과 섬김의 소금을 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두가 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희생한다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믿음이 살아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큰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배웠습니다. 그것은 낮아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섬길 때 평화가 있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 무시받기 쉬운 사람들이 존중을 받고 사람 살 만한 곳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섬기고 낮아지는 곳에 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서로 누가 크냐 다투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자신들이 내각을 구성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자리를 정해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되고 섬김을 받고 싶었습니다. 권세를 휘두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방향을 제자들의 소원과는 달리 겸손과 섬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한 위대성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필요한 진리는 반드시,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려 하십니다.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으로 도전하는 것과 순결, 순종, 심판, 예수님의 재림 등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것을 알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모르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뒤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논쟁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지상 메시아의 영광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발하다가 크게 책망을 들었기 때문에 또 물으면 반발하는 것으로 비쳐 또 책망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서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러나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한 것으로 민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영광을 얻고 지상 메시아 왕국을 이루리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쪽으로만 생각을 몰아갔습니다. 세상에 대한 그들의 미련은 그렇게 끈질겼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 상에 올라가신 사건이 그들 간의 경쟁심을 더욱 유발시켰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들은 누가 크냐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였습니다. 모두 다 큰 자,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으며,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서열을 매겼을까요? 누가 먼저 부름을 받았는가? 누가 예수님과 더욱 가까운 친척인가? 예수님이 누구의 이름을 많이 부르시고, 누구를 특별하게 대우하셨는가? 누가 회계 장부를 맡고 있는가? 등 큰 자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랐습니다. 높고 낮음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누가 높고 누가 낮으냐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드리느냐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제 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잠잠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지 못한 속생각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잠잠함으로써 감추려 했습니다. 잘못한 것을 알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을 감추려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을 요구합니다. 이런 것에 시달리는 사람들 중에는 쉽고 편안하게, 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다른 관심은 하나님을 믿고 안정과 기쁨을 얻기를 원할 뿐입니다. 나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실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적인 안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모든 안정과 기쁨은 바른 길을 걸어갈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열매여야 하지 우리가 그러한 것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과 부패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은 더 이상 지적받고 권면 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적인 휴식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깨어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옆구리를 찔러야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누구나 첫째가 되려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아주 강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자가 큰 자입니까?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욕구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대성이란 그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려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뭇 사람의 끝에 서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섬기는 마음보다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섬김 받고자 하면 할수록 의존적이 되고 무기력해집니다. 불평이 많아집니다.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뭇 사람을 섬기려면 뭇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어딜 가나 섬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갔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섬기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생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섬기고 돌보는 자입니다. 일대일하는 양들을 마음을 다해 섬길 때, 양들이 살아나고,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된다는 의미를 재해석 해 주십니다. 사람의 진정한 위대성은 섬기는 데 있습니다. 리더와 보스는 다릅니다. 보스는 패거리를 만들고 지배하는 자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자기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데 있기 때문에 패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더는 섬기는 자입니다. 그의 목적이 남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파선되었을 때 아이들, 여자들, 노인들, 병사들, 장교들 순으로 탈출하고, 맨 끝에 선장이 탈출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겨서 안전하게 하고, 자신은 맨 끝에 탈출합니다. 세월호 선장과 같이 하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벌을 받게 됩니다. 종은 주인이 잘 되게 하고, 주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다음에, 그때 봐서 가능하다면 자기 것을 취합니다. 주인을 잘 되게 하고 나서 자기 몫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기다려야합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때 그는 진정으로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상급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지도자나 위대한 사람은 좋은 것은 맨 나중에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제일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전북 김제에 110년 된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마을의 최고 부자인 조덕삼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조덕삼에게는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이자익은 고아였는데 조덕삼이 인심 좋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들어와서 조덕삼의 마부일을 하면서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조덕삼이 이자익보다 15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테이트(L.B. Tate) 선교사를 만나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꾸준히 성장하여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선거를 했는데 주인 조덕삼보다 머슴 이자익이 더 많은 표를 얻게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교회를 설립한 유지이고, 신앙적으로도 훌륭했지만 당시 교인들이 여인들과 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슴인 이자익에게 표를 많이 준 것입니다. 당시 장로는 교회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설교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밑에서 교회를 섬기고, 머슴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당장에 일어서서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이 선거는 무효요. 이 교회를 누가 세웠는데~~” 그런데 조덕삼은 일어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여러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 냈습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훨씬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 후 조덕삼은 이자익을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깊이 영접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목사가 되게 하고, 그가 목사 안수를 받자, 다시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맞아 들여서 깍듯이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계속해서 장로로서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 중에 한 분이 국회의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씨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서로를 낮아져서 섬길 때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셨습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어린아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어른들하고는 경쟁하고, 아이들은 아예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를 영접하기보다 경쟁의 상대로 생각했고 배척하고 다투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세상에서 배워 온 사고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영접’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영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볼 때 남을 까고, 배척, 미워하고 짓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접의 대상으로 볼 때는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장점을 살려주고, 그가 잘 되도록 섬깁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아예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까? 영접하기 힘든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거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섬겨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귀찮고 힘듭니다. 섬겨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전혀 감사가 없습니다. 섬겨준다고 해도 당장에 이익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섬긴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섬기기 힘든 데 비해서 섬겨도 별로 유익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어린아이는 비천한 자, 신분이 낮아서 무시 받는 자, 연약해서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 바보 취급을 받는 자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위대한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장점은 인정하지 않고 약점만 보고 무시합니다. 오케스트라를 보면 금관악기는 금관악기대로, 현악기는 현악기대로 특색이 있습니다. 그 특색을 잘 인정해야 합니다. 심벌즈는 연주하는 동안 한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심벌즈가 있어야 음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는 역사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위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도와주는 위대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자를 왜 금하였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 것에 대해서 독점욕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는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통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을 내쫓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화가 났습니다. 사실 자기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내쫓지 못 했는데, 그가 내쫓았기 때문에 경쟁심도 생기고 위기감도 생겼을 것입니다. 어떤 자를 금한 것으로 인해 자기 딴에는 잘 했다고 자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제자들은 모두를 대결 구도에서 생각했고, 경쟁 대상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원수들로 보았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소수파였고 비난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이런 사고 구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자기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오해를 세 번만 생각하면 이해가 생기고(5-3=2), 이해를 두 번만 생각하면 사랑이 생긴다고 합니다(2+2=4). 예수님은 각종 사람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다양한 생각,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동역하며 살 수 있습니다. 좁은 마음은 많은 원수를 만들고 동역의 역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좁은 마음은 사람을 못난이로 만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큰 자가 되려면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그들 모임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대결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줘도 상 받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면 기뻐 받으시고 상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알아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2).” 제자들의 사고 구조로는 사람을 실족시킬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귀신 내쫓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못하게 하는 것을 볼 때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실족시킬 염려도 많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어린양의 입장에서 섬세히 돌보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이유로 실족케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믿음이 어린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1절과 13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사도 바울은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술도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눈이 범죄케 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43-47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범죄하면 결정적으로 작은 자들을 실족시킵니다. 제자들은 여기에 대한 경각심과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손과 발과 눈은 가장 소중한 신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죄를 짓게 한다면 찍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를 알고 죄를 짓게 만들 가능성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죄 짓는 것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문화 현상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양심이 되살아나서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오히려 둔감해지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처음에는 거룩하게 살고자 영적인 투쟁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죄 짓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은혜요 믿음이 성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더욱 섬기는데 민첩하고 죄에 민감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또한 죄를 짓게 되면 현재적으로 우리 영혼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지옥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과 같이 녹아야 합니다. 즉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포용하고 은밀하게 맛을 내야 합니다. 바닷물이 짜지만 그 염분의 비율은 0.4%라고 합니다. 다 소금일 필요가 없습니다. 몇 사람이 소금이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참 맛이 나려면 겸손과 희생과 섬김의 소금을 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두가 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희생한다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믿음이 살아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큰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배웠습니다. 그것은 낮아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섬길 때 평화가 있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 무시받기 쉬운 사람들이 존중을 받고 사람 살 만한 곳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섬기고 낮아지는 곳에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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