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16강(8:27-3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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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마가복음 8:27-38
요절 | 마가복음 8:2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오늘 말씀은 갈릴리 사역에 대한 결산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말시험 격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이 후로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반복해서 가르치십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은 이후로 무리보다는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제자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 신앙 고백의 의미가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지나가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헬몬산 남쪽으로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에게 수여한 땅입니다. 요단강 물 근원 중 하나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전에 샘물이 솟아나던 동굴 근처 암벽에는 헬라 시대의 “판” 신을 위한 벽감들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전 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주전 20년 헤롯은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 장엄한 흰 대리석으로 아구스도의 신전을 짓고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헤롯의 아들 빌립이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산에 신전을 세우고 숭배하는 것은 세계 어디나 공통인 것 같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를 신으로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길’(The way)에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런 중요한 질문은 집 안에서 조용히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길에서 물으셨습니다. 길은 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침상 채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제자들이 광풍을 만났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그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체험하고 아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제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해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암흑기에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자기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의 신발끈을 묶을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요한으로 본다면 그들은 예수님 뒤에 오시는 분이 있고, 그 분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말했고 사람들이 바알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엘리야로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말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단면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예수님을 찾아왔고 자기들의 필요가 채워지면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를 인격적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하면 진정으로 그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그를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항상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머리와 몸과 같이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없으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의 대답은 짧지만 분명했습니다.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곧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보증하시고 보내신 왕이시오 대제사장이시오 선지자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가 결정하고 우리는 그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따라야 충성스러운 신하가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에게 충성할 때 칭찬을 받고 상급도 받습니다. 또 그는 선지자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기도를 들으십니다. 무엇보다 마가는 1: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경에 약속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가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자란 늪에 빠진 사람을 구출해 내는 사람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늪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나오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죄와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게 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요3:16).
캘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이시며, 경배할 왕으로 영접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꼭 고백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맺어집니다. 부부 사이에도 애정 고백을 자주 해야지 애정 전선에 이상이 없습니다. 또한 고백을 통해 불투명한 믿음이 분명해집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됩니다. 초대 성도들은 이 고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죄를 이겨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세계만 들여다보면 어느새 자기 중심적인 병적인 교인이 됩니다. 그러면 힘있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구속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과 가족과 양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천박함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과 반복된 사랑의 고백 속에서 올바른 제자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시고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은 정치적인 자유, 물질적인 풍요,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 세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그리스도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아론의 금송아지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상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를 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절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다니엘서에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단 7:13). 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왜 이런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죄는 그 자체로도 비참한 것이지만 그 대가로 반드시 죽음을 요구합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히9:22).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고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올 구원자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의 대가를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4-6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로 멸망할 우리들을 사랑하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고자 하십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을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고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과 그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32).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꿈이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까지 그를 믿고 따라왔는데 죽어버리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됩니다. 베드로는 패닉 상태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는데 사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베드로의 항변에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매우 강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구속 역사를 이루시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사탄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만민 구속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자신의 안정과 꿈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죄와 죽음의 해결보다 떡 문제 해결, 독립, 복지, 통일, 환경에 매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드라큐라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일에 매진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무엇이든 쌓아두지 마십시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을 쏟고 항상 가난하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때문에 소심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다 쏟아 붓는 것이 승리하는 궁핍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인격이나 개성을 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이익에 이끌려 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때 방해되는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길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남을 위해 죽는데 있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일하는데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데 있습니다. 죄가 나를 다스리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반대로 내 안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면 내 안의 죄가 죽게 됩니다. 이 외에 다른 궁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소중하고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5-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자기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의 재물, 명예,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다 강합니다. 어찌하든지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안 죽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는 결국 영적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주와 복음을 위해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죄가 많아서 십자가의 길을 용납하지 않고 조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장차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면 끝장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지혜롭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며 따르기를 힘씁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묻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구원 역사를 섬기며 제자로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8:27-38
요절 | 마가복음 8:2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오늘 말씀은 갈릴리 사역에 대한 결산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말시험 격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이 후로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반복해서 가르치십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은 이후로 무리보다는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제자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 신앙 고백의 의미가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지나가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헬몬산 남쪽으로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에게 수여한 땅입니다. 요단강 물 근원 중 하나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전에 샘물이 솟아나던 동굴 근처 암벽에는 헬라 시대의 “판” 신을 위한 벽감들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전 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주전 20년 헤롯은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 장엄한 흰 대리석으로 아구스도의 신전을 짓고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헤롯의 아들 빌립이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산에 신전을 세우고 숭배하는 것은 세계 어디나 공통인 것 같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를 신으로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길’(The way)에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런 중요한 질문은 집 안에서 조용히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길에서 물으셨습니다. 길은 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침상 채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제자들이 광풍을 만났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그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체험하고 아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제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해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암흑기에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자기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의 신발끈을 묶을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요한으로 본다면 그들은 예수님 뒤에 오시는 분이 있고, 그 분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말했고 사람들이 바알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엘리야로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말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단면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예수님을 찾아왔고 자기들의 필요가 채워지면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를 인격적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하면 진정으로 그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그를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항상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머리와 몸과 같이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없으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의 대답은 짧지만 분명했습니다.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곧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보증하시고 보내신 왕이시오 대제사장이시오 선지자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가 결정하고 우리는 그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따라야 충성스러운 신하가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에게 충성할 때 칭찬을 받고 상급도 받습니다. 또 그는 선지자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기도를 들으십니다. 무엇보다 마가는 1: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경에 약속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가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자란 늪에 빠진 사람을 구출해 내는 사람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늪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나오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죄와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게 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요3:16).
캘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이시며, 경배할 왕으로 영접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꼭 고백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맺어집니다. 부부 사이에도 애정 고백을 자주 해야지 애정 전선에 이상이 없습니다. 또한 고백을 통해 불투명한 믿음이 분명해집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됩니다. 초대 성도들은 이 고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죄를 이겨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세계만 들여다보면 어느새 자기 중심적인 병적인 교인이 됩니다. 그러면 힘있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구속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과 가족과 양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천박함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과 반복된 사랑의 고백 속에서 올바른 제자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시고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은 정치적인 자유, 물질적인 풍요,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 세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그리스도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아론의 금송아지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상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를 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절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다니엘서에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단 7:13). 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왜 이런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죄는 그 자체로도 비참한 것이지만 그 대가로 반드시 죽음을 요구합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히9:22).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고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올 구원자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의 대가를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4-6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로 멸망할 우리들을 사랑하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고자 하십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을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고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과 그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32).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꿈이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까지 그를 믿고 따라왔는데 죽어버리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됩니다. 베드로는 패닉 상태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는데 사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베드로의 항변에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매우 강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구속 역사를 이루시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사탄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만민 구속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자신의 안정과 꿈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죄와 죽음의 해결보다 떡 문제 해결, 독립, 복지, 통일, 환경에 매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드라큐라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일에 매진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무엇이든 쌓아두지 마십시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을 쏟고 항상 가난하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때문에 소심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다 쏟아 붓는 것이 승리하는 궁핍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인격이나 개성을 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이익에 이끌려 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때 방해되는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길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남을 위해 죽는데 있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일하는데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데 있습니다. 죄가 나를 다스리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반대로 내 안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면 내 안의 죄가 죽게 됩니다. 이 외에 다른 궁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소중하고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5-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자기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의 재물, 명예,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다 강합니다. 어찌하든지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안 죽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는 결국 영적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주와 복음을 위해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죄가 많아서 십자가의 길을 용납하지 않고 조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장차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면 끝장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지혜롭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며 따르기를 힘씁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묻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구원 역사를 섬기며 제자로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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