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15강(8:1-26)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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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5 강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칠병이어 사건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자들을 반복해서 교육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먹는 문제에 매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쳐주심으로 이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 지났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잠깐만 가르치고자 한 것이 어느 새 사흘이 지났습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감동과 은혜로 인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밤 낮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니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들이 배고픈 것을 알아채셨습니다. 만일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무리가 불쌍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목자가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공감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회는 무자비하고 황폐하게 됩니다. 약육강식만으로 돌아가는 사회는 결국 다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겠지만 동료들에 대해서 또는 타인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공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찾아 주님께 드리며 이들을 먹이시도록 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은 어쩌다 한 번 있는 것이지 계속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그런 것이 또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돕고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벌써 잊어먹은 듯합니다. 지금 여기 모인 무리들이 대부분 이방인이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아직까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기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사건 때보다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책임감이 조금 자랐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데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먹여야 할 4천명을 생각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지레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일곱이니이다”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역을 하십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를 명하여 앉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떡 일곱 개를 받으사 축사하셨습니다. 이는 감사기도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우리가 기도함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도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데 그것을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복 광주리는 이방 민족을 상징하고 일곱 광주리에 가득한 빵은 이방에 복음이 충만히 퍼져나갈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덧셈 뺄셈도 또 나오면 틀리는 수준입니다. 가르쳐 주어도 잊어버리고 또 가르쳐 주기를 반복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제자들은 많은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다시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볼 때 매우 답답하셨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도 배운 말씀을 그대로 다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반복해서 배우고 실천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목자로서 믿음과 책임감,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많은 이적을 보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친 사건,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사건, 칠병이어로 4000명을 먹이신 사건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출애굽 후에 하늘에서 만나를 40년 동안 내려 먹인 것처럼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윗 왕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처럼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며 영광을 보여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물질적인 풍요, 성공, 성취, 세상의 영광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것들을 얻고자 노력할수록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실망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믿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믿고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성장이나 거룩함, 자기 성취에 매달리는 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7:34에서도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 주실 때 탄식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바리새인들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이 영적인 깨달음을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볼 때 답답하여 속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영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제까지 보여준 표적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는 더 이상 사역하지 않겠다고 방향을 잡으시고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마16:1-4에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지금 배에는 안드레가 배꼽 안쪽 주머니에 감추어 온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앉으나 서나 떡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떡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바돌로매에게 왜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바돌로매는 베드로 목자가 나에게 떡을 챙기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바돌로매 편을 들면서 베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몰아 세웠습니다. 사람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늘 생각하는 것이 돈을 어떻게 더 벌 수 있을까, 어떻게 좀 더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차원적인 문제에 매이게 되면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관심이 썩을 양식에 가 있기에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17-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가 자신들과 함께 함을 인식하고 앞으로도 먹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간적으로 염려와 장래 안정 문제로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일생 잊어버릴 수 없는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물질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120개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요한이 열두 바구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물으셨습니다. 마태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대답했습니다. 일곱 바구니입니다. 그리고 한 개가 배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사복음서에 오병이어 사건이 다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복 교육을 통해서 일생 그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떡 다섯 개를 나누어 오천 명을 먹이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면 지금 남아 있는 떡 한 개로 천 명도 먹이고 만 명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해 보여도 믿음으로 드릴 때 주님은 이를 받으시고 그 백성을 풍족히 먹이십니다. 이번 여름수양회도 이름 난 외부 강사를 초청하는 것보다 우리 가운데 세우신 강사님들이 자신을 드릴 때 수양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풍족하게 먹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가진 은사를 떼어 나눌 때 주님께서 여름 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7).
당시에는 바리새인 6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목자 노릇을 하지 못하니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외식하고 음란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지내고 불의와 타협을 하고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탐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종교적 습관을 가졌지만 내용이 없었습니다. 위선적인 신앙, 이중성으로 인해 예수님에게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이들을 비판하면서 닮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책망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명철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눈으로 보는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귀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깨닫고 행하는 자들이 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보고 참여해야 합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 안 됩니다. 내가 직접 참여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가운데 헌신할 때 영적인 깨달음이 있고 성장이 있고 쓰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예를 다시 반복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손 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 인과 같습니다. 그들은 맹인을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맹인은 월드컵 축구도 볼 수 없고, 아름다운 하늘과 사계절의 변화와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도볼 수 없었습니다.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한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습니다. 그가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단계적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단계적으로 눈을 뜨면서 성장할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인내와 사랑과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깨달음은 항상 자주 오지 않습니다. 배움이 쌓여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지식을 실천하고 다시 배우고 실천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리고 깨달아집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인 도약을 하게 됩니다.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고 생명을 누리고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엡 1:17,18).
제자들은 보려고 하는데 아직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눈은 떴으나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고집 센 완악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둔감하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스승을 보면서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밝히 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서서히 뜨게 됩니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영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자신과 목자님의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겸손하게 배우고 그 안에 거함으로 하나 하나 깨달아가는 즐거움, 만물을 새롭게 보는 기쁨,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칠병이어 사건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자들을 반복해서 교육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먹는 문제에 매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쳐주심으로 이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 지났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잠깐만 가르치고자 한 것이 어느 새 사흘이 지났습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감동과 은혜로 인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밤 낮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니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들이 배고픈 것을 알아채셨습니다. 만일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무리가 불쌍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목자가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공감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회는 무자비하고 황폐하게 됩니다. 약육강식만으로 돌아가는 사회는 결국 다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겠지만 동료들에 대해서 또는 타인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공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찾아 주님께 드리며 이들을 먹이시도록 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은 어쩌다 한 번 있는 것이지 계속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그런 것이 또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돕고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벌써 잊어먹은 듯합니다. 지금 여기 모인 무리들이 대부분 이방인이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아직까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기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사건 때보다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책임감이 조금 자랐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데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먹여야 할 4천명을 생각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지레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일곱이니이다”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역을 하십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를 명하여 앉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떡 일곱 개를 받으사 축사하셨습니다. 이는 감사기도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우리가 기도함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도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데 그것을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복 광주리는 이방 민족을 상징하고 일곱 광주리에 가득한 빵은 이방에 복음이 충만히 퍼져나갈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덧셈 뺄셈도 또 나오면 틀리는 수준입니다. 가르쳐 주어도 잊어버리고 또 가르쳐 주기를 반복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제자들은 많은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다시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볼 때 매우 답답하셨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도 배운 말씀을 그대로 다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반복해서 배우고 실천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목자로서 믿음과 책임감,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많은 이적을 보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친 사건,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사건, 칠병이어로 4000명을 먹이신 사건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출애굽 후에 하늘에서 만나를 40년 동안 내려 먹인 것처럼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윗 왕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처럼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며 영광을 보여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물질적인 풍요, 성공, 성취, 세상의 영광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것들을 얻고자 노력할수록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실망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믿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믿고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성장이나 거룩함, 자기 성취에 매달리는 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7:34에서도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 주실 때 탄식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바리새인들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이 영적인 깨달음을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볼 때 답답하여 속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영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제까지 보여준 표적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는 더 이상 사역하지 않겠다고 방향을 잡으시고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마16:1-4에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지금 배에는 안드레가 배꼽 안쪽 주머니에 감추어 온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앉으나 서나 떡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떡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바돌로매에게 왜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바돌로매는 베드로 목자가 나에게 떡을 챙기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바돌로매 편을 들면서 베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몰아 세웠습니다. 사람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늘 생각하는 것이 돈을 어떻게 더 벌 수 있을까, 어떻게 좀 더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차원적인 문제에 매이게 되면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관심이 썩을 양식에 가 있기에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17-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가 자신들과 함께 함을 인식하고 앞으로도 먹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간적으로 염려와 장래 안정 문제로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일생 잊어버릴 수 없는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물질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120개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요한이 열두 바구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물으셨습니다. 마태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대답했습니다. 일곱 바구니입니다. 그리고 한 개가 배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사복음서에 오병이어 사건이 다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복 교육을 통해서 일생 그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떡 다섯 개를 나누어 오천 명을 먹이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면 지금 남아 있는 떡 한 개로 천 명도 먹이고 만 명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해 보여도 믿음으로 드릴 때 주님은 이를 받으시고 그 백성을 풍족히 먹이십니다. 이번 여름수양회도 이름 난 외부 강사를 초청하는 것보다 우리 가운데 세우신 강사님들이 자신을 드릴 때 수양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풍족하게 먹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가진 은사를 떼어 나눌 때 주님께서 여름 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7).
당시에는 바리새인 6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목자 노릇을 하지 못하니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외식하고 음란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지내고 불의와 타협을 하고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탐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종교적 습관을 가졌지만 내용이 없었습니다. 위선적인 신앙, 이중성으로 인해 예수님에게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이들을 비판하면서 닮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책망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명철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눈으로 보는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귀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깨닫고 행하는 자들이 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보고 참여해야 합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 안 됩니다. 내가 직접 참여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가운데 헌신할 때 영적인 깨달음이 있고 성장이 있고 쓰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예를 다시 반복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손 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 인과 같습니다. 그들은 맹인을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맹인은 월드컵 축구도 볼 수 없고, 아름다운 하늘과 사계절의 변화와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도볼 수 없었습니다.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한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습니다. 그가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단계적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단계적으로 눈을 뜨면서 성장할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인내와 사랑과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깨달음은 항상 자주 오지 않습니다. 배움이 쌓여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지식을 실천하고 다시 배우고 실천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리고 깨달아집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인 도약을 하게 됩니다.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고 생명을 누리고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엡 1:17,18).
제자들은 보려고 하는데 아직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눈은 떴으나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고집 센 완악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둔감하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스승을 보면서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밝히 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서서히 뜨게 됩니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영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자신과 목자님의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겸손하게 배우고 그 안에 거함으로 하나 하나 깨달아가는 즐거움, 만물을 새롭게 보는 기쁨,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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