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14강(7:24-37) 이 말을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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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4 강
말씀 | 마가복음 7:24-37
요절 |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지난 주 우리는 먹기 전에 손을 씻고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의식을 통해서 부정한 것을 제하고자 한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할 때 비로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죄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죄의 소원이 죽고 사명을 감당함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겉은 깨끗하지만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대조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이었지만 마음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녀의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더러운 귀신들린 데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시간 말에 담긴 여인의 믿음과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은 게네사렛 지방에서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수도로써 무역으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베니게는 알파벳을 처음 사용한 족속입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의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교육하고 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가르쳐 주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이 두로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가 유대로 가기는 어려웠지만 예수님이 두로로 오셨으니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이란 문명화된 사람이요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헬라는 철학, 의학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과 의학으로도 더러운 귀신들려 고통하는 딸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로써 딸을 아름답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섬뜩한 짓을 하며 늘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과 물에도 뛰어 들어가고 함부로 배설을 하고 욕도 거칠게 하였습니다. 의사들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딸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아무 소용이 없자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다 끝났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소용 없어.” 이런 절망을 그녀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녀의 소식통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들어오셨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실패의식이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믿고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은 딸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딸을 회복시켜 아름답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딸로 인해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어머니로서 포기치 않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는 분이시오 자기와 같은 이방인도 사랑하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갖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도움을 구하러 나온 여인에게는 충격적인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데 이렇게 말씀하시다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이고 개는 이 여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냉정한 거절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이 말씀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로서 먹을 것이 있으면 자녀를 먼저 먹이고 그 다음에 개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세계를 먹이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일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에 이방인에게 나아갔습니다. 자기 백성을 축복해서 언덕 위의 도시로 만들고 이들을 통해서 세상 만민을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둘째는 여인에게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적이 없는데 믿음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있는지 시험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을 위해서 그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부요한 두로 시민으로서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하여 나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못 들은 체 했지만 너무나 간절히 부르짖어서 제자들이 민망히 여길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지 알고자 하셨습니다. 또 거절을 받으면 자신이 정말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더욱 확실히 알게 됩니다. 주님께 은혜를 받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와우! 여자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여자는 참으로 지혜롭게 대답을 잘 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개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는 개라고 말했습니다. 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웁니다. 개는 주인의 밥상에 오르지 않습니다. 상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긍휼을 기다립니다. 주인의 숟가락이 오가는 대로 개의 머리도 흔들립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을 때 기쁨으로 먹고 꼬리를 흔듭니다. 여인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은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로도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시인이요 찬양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시를 받으면 어떤 자세를 갖게 됩니까? 반발심이 생기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은 남자들보다 자존심에 더 민감합니다.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자긍심이 있었는데 개처럼 무시당했을 때 반발하고 공격하기 쉬웠습니다. 개 맛 좀 보라며 달려들어 물어뜯기 쉽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았으면 험한 말로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개 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무시하시는 듯한 말씀에 감정이 상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여인의 성숙한 내면과 마음의 여유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이 세상의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겸손할 때 주권신앙이 생깁니다. 주권신앙이 있을 때 좋은 일이든,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권신앙이 있을 때 문제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닥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여 옳소이다.” 우리는 주권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더 크게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그가 시험을 통과했을 때 더 큰 축복을 주셨듯이, 이 여인도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므로 믿음의 모델로 세우고, 영육간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고난 앞에 서게 하실 때,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기도와 믿음의 투쟁을 끝까지 감당해야겠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궁중을 빠져나와 바후림에 이르자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그는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이런 저주를 퍼붓는데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여짜왔습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5-12).”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이라는 보자기에 싸여져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높이시고 상 주실 때가 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선언하셨습니다. 여자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그 집으로 가지 않고 말씀만 주셨습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여인의 이 말은 어떤 말입니까? 여인의 말은 겸손한 말이요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 속에는 그의 인격과 삶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이야기 속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혼과 생명이 담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요 생명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말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말에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인정하는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 칭찬의 말,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여인이 어떻게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딸에 대한 사랑이 이런 말을 하게 했습니다. 어찌하든지 딸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 그녀를 겸손하게 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그녀는 많은 훈련을 받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딸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딸에 대한 의무가 모든 고난을 견디게 했고 그녀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녀를 지혜롭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권리는 없지만 겸손히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고자 합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란 특권 의식 때문에 교만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헛된 자부심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완악하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믿음도 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이방 세계가 하나님께 돌아올 희망을 보게 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도 아직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인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말은 예수님을 몹시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든 시기이고, 장차 십자가를 져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믿음의 말을 들으시고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둘째, 열리라.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북쪽 지방을 순회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기본인데 이것이 되지 않으니 그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사람들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부담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친구를 사귈 수 없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이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헛소리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쑤시며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에게 예수님의 의도를 잘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그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공감은 머리로 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체험한 인생에 공감하는 것이지 삶에 대한 지식에 공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 먹고 못 듣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탄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탄식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말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문맥으로 볼 때 이방인 선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이방 세계를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하는 역사에 관해서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35:5-6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을 고쳐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언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역사가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막힌 귀를 여시고 어눌한 혀를 권능 있는 혀로 바꾸십니다.
헛소리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못 알아듣는 양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자기 고집, 자기 생각, 자기 사랑이 강한 사람들은 말씀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같은 한국 말을 하는데 영적으로 막힌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때로는 상처가 됩니다. 마음은 말로 전달이 되는 것인데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합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탄식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전하는 말이 분명해 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뜻이 정해지지 않아도 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람을 섬기는 가운데 말씀이 임할 때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그 영혼을 사랑할 때 나의 마음을 열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면 나의 말도 전할 수 있습니다. 신뢰가 생기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고 눈만 봐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으로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말, 믿음의 말, 예수님의 주권을 믿는 말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딸이 고침을 받고 그녀의 믿음이 성경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소망을 주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7:24-37
요절 |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지난 주 우리는 먹기 전에 손을 씻고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의식을 통해서 부정한 것을 제하고자 한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할 때 비로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죄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죄의 소원이 죽고 사명을 감당함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겉은 깨끗하지만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대조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이었지만 마음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녀의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더러운 귀신들린 데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시간 말에 담긴 여인의 믿음과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은 게네사렛 지방에서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수도로써 무역으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베니게는 알파벳을 처음 사용한 족속입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의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교육하고 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가르쳐 주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이 두로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가 유대로 가기는 어려웠지만 예수님이 두로로 오셨으니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이란 문명화된 사람이요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헬라는 철학, 의학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과 의학으로도 더러운 귀신들려 고통하는 딸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로써 딸을 아름답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섬뜩한 짓을 하며 늘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과 물에도 뛰어 들어가고 함부로 배설을 하고 욕도 거칠게 하였습니다. 의사들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딸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아무 소용이 없자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다 끝났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소용 없어.” 이런 절망을 그녀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녀의 소식통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들어오셨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실패의식이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믿고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은 딸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딸을 회복시켜 아름답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딸로 인해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어머니로서 포기치 않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는 분이시오 자기와 같은 이방인도 사랑하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갖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도움을 구하러 나온 여인에게는 충격적인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데 이렇게 말씀하시다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이고 개는 이 여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냉정한 거절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이 말씀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로서 먹을 것이 있으면 자녀를 먼저 먹이고 그 다음에 개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세계를 먹이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일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에 이방인에게 나아갔습니다. 자기 백성을 축복해서 언덕 위의 도시로 만들고 이들을 통해서 세상 만민을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둘째는 여인에게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적이 없는데 믿음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있는지 시험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을 위해서 그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부요한 두로 시민으로서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하여 나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못 들은 체 했지만 너무나 간절히 부르짖어서 제자들이 민망히 여길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지 알고자 하셨습니다. 또 거절을 받으면 자신이 정말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더욱 확실히 알게 됩니다. 주님께 은혜를 받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와우! 여자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여자는 참으로 지혜롭게 대답을 잘 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개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는 개라고 말했습니다. 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웁니다. 개는 주인의 밥상에 오르지 않습니다. 상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긍휼을 기다립니다. 주인의 숟가락이 오가는 대로 개의 머리도 흔들립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을 때 기쁨으로 먹고 꼬리를 흔듭니다. 여인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은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로도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시인이요 찬양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시를 받으면 어떤 자세를 갖게 됩니까? 반발심이 생기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은 남자들보다 자존심에 더 민감합니다.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자긍심이 있었는데 개처럼 무시당했을 때 반발하고 공격하기 쉬웠습니다. 개 맛 좀 보라며 달려들어 물어뜯기 쉽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았으면 험한 말로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개 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무시하시는 듯한 말씀에 감정이 상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여인의 성숙한 내면과 마음의 여유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이 세상의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겸손할 때 주권신앙이 생깁니다. 주권신앙이 있을 때 좋은 일이든,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권신앙이 있을 때 문제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닥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여 옳소이다.” 우리는 주권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더 크게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그가 시험을 통과했을 때 더 큰 축복을 주셨듯이, 이 여인도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므로 믿음의 모델로 세우고, 영육간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고난 앞에 서게 하실 때,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기도와 믿음의 투쟁을 끝까지 감당해야겠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궁중을 빠져나와 바후림에 이르자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그는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이런 저주를 퍼붓는데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여짜왔습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5-12).”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이라는 보자기에 싸여져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높이시고 상 주실 때가 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선언하셨습니다. 여자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그 집으로 가지 않고 말씀만 주셨습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여인의 이 말은 어떤 말입니까? 여인의 말은 겸손한 말이요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 속에는 그의 인격과 삶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이야기 속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혼과 생명이 담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요 생명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말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말에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인정하는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 칭찬의 말,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여인이 어떻게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딸에 대한 사랑이 이런 말을 하게 했습니다. 어찌하든지 딸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 그녀를 겸손하게 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그녀는 많은 훈련을 받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딸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딸에 대한 의무가 모든 고난을 견디게 했고 그녀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녀를 지혜롭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권리는 없지만 겸손히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고자 합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란 특권 의식 때문에 교만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헛된 자부심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완악하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믿음도 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이방 세계가 하나님께 돌아올 희망을 보게 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도 아직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인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말은 예수님을 몹시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든 시기이고, 장차 십자가를 져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믿음의 말을 들으시고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둘째, 열리라.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북쪽 지방을 순회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기본인데 이것이 되지 않으니 그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사람들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부담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친구를 사귈 수 없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이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헛소리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쑤시며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에게 예수님의 의도를 잘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그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공감은 머리로 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체험한 인생에 공감하는 것이지 삶에 대한 지식에 공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 먹고 못 듣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탄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탄식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말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문맥으로 볼 때 이방인 선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이방 세계를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하는 역사에 관해서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35:5-6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을 고쳐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언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역사가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막힌 귀를 여시고 어눌한 혀를 권능 있는 혀로 바꾸십니다.
헛소리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못 알아듣는 양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자기 고집, 자기 생각, 자기 사랑이 강한 사람들은 말씀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같은 한국 말을 하는데 영적으로 막힌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때로는 상처가 됩니다. 마음은 말로 전달이 되는 것인데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합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탄식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전하는 말이 분명해 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뜻이 정해지지 않아도 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람을 섬기는 가운데 말씀이 임할 때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그 영혼을 사랑할 때 나의 마음을 열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면 나의 말도 전할 수 있습니다. 신뢰가 생기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고 눈만 봐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으로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말, 믿음의 말, 예수님의 주권을 믿는 말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딸이 고침을 받고 그녀의 믿음이 성경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소망을 주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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