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13강(7:1-23)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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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3 강
말씀 | 마가복음 7:1-23
요절 | 마가복음 7: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주님께 드릴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전국 학사 목자 수양회에 참석하고 오신 목자님들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찬 수양회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수양회 참석 후에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고 로마서 말씀을 암송하고자 결단하신 목자님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님들 안에 이루신 은혜로운 역사를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정결과 부정에 대한 말씀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죄를 짓고 오염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게 되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와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경찰로서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가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고 성전과 회당의 자리는 텅텅 비어갔습니다. 성전에서 여러 의식을 진행하던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느꼈고 예수님이 안식일과 율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선지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풍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문화와 젖과 꿀과 같은 것만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어 전세계를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이것은 정말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망과는 달리 가나안의 문화에 빠져들었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혀 쓸모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어 70년 동안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배우며 나누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그들이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을 세우고 제사장 겸 학자 에스라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는 수양회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회개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 자기의 죄를 다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세워지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그 전통을 지킬 때 그들은 신앙을 회복하고 강성해졌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전통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전통 속에 배어 있던 스피릿과 심정은 사라지고 피상적인 모습만 남게 되었습니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이를 일반화시켜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했습니다. 율법을 보면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문둥병자, 혈루증 앓는 자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장로들은 실제 생활에서 부지중에 이런 사람들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손을 씻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지만 정결예법과 같이 율법에 어긋난 것은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로 인해 형식과 규례의 무거운 짐을 벗고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통과 의식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유대 전통을 만들었지만 이것이 나중에는 사람을 구속하는 올가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에 기초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은 종교적인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이후의 구전을 성문 율법과 같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장로들의 가르침은 전통이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위치에 둠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그 예가 바로 고르반 법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그들이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때로는 부모님의 생신을 잘 챙겨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명절 때도 찾아뵙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미리 드리고 나중에라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가족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회개하고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사람 앞에서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면 상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경외심이 없이 생활하며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는 귀중한 전통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일대이로도 성경을 공부하지 못하게 시켰습니다. 이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상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삶에 개입하시고 인격적으로 그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우셨습니다. 일대일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보다는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 자체를 크게 여기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것이 됩니다. 제가 양들과의 일대일은 어찌하든지 하면서도 집에 있는 자녀 한 사람의 일대일을 소홀히 한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성경에서 부정하다고 정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입으로 들어가서 위와 장을 통해 뒤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에 율법으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해 놓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먹는 생활에서도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음식이 아닌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때에 정한 음식을 구별하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 규정이 이방인들이 믿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신앙을 정결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음식이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3,4은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죄가 나와서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도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음식 자체는 선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20-23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악한 생각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성적인 죄로 음란, 간음, 음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성 문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더럽혀지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탐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제어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릅니다. ‘우매함’은 선악의 분별력이 없이 감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방도 다 죄입니다. 이런 더러운 악들은 손을 씻지 않는 의식적 불결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불결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이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들이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기 때문에 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 보면 죄악투성이입니다. 파노라마처럼 나의 죄악들이 지나갑니다.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마음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1: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은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사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목욕을 하면 시원함을 느끼듯이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이 상쾌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순결하고 따뜻했습니다. 의와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일생 동안 선한 일에 힘을 쓰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고자 힘을 씁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서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살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서 먼지가 묻으면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물로 손을 씻듯이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 깨끗한 삶을 살도록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 때 우리가 날마다 변화를 받으며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면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또 계절마다 수양회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 정리를 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우리를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지키는 가운데 성결한 삶을 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7:1-23
요절 | 마가복음 7: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주님께 드릴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전국 학사 목자 수양회에 참석하고 오신 목자님들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찬 수양회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수양회 참석 후에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고 로마서 말씀을 암송하고자 결단하신 목자님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님들 안에 이루신 은혜로운 역사를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정결과 부정에 대한 말씀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죄를 짓고 오염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게 되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와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경찰로서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가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고 성전과 회당의 자리는 텅텅 비어갔습니다. 성전에서 여러 의식을 진행하던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느꼈고 예수님이 안식일과 율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선지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풍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문화와 젖과 꿀과 같은 것만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어 전세계를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이것은 정말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망과는 달리 가나안의 문화에 빠져들었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혀 쓸모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어 70년 동안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배우며 나누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그들이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을 세우고 제사장 겸 학자 에스라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는 수양회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회개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 자기의 죄를 다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세워지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그 전통을 지킬 때 그들은 신앙을 회복하고 강성해졌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전통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전통 속에 배어 있던 스피릿과 심정은 사라지고 피상적인 모습만 남게 되었습니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이를 일반화시켜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했습니다. 율법을 보면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문둥병자, 혈루증 앓는 자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장로들은 실제 생활에서 부지중에 이런 사람들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손을 씻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지만 정결예법과 같이 율법에 어긋난 것은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로 인해 형식과 규례의 무거운 짐을 벗고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통과 의식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유대 전통을 만들었지만 이것이 나중에는 사람을 구속하는 올가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에 기초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은 종교적인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이후의 구전을 성문 율법과 같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장로들의 가르침은 전통이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위치에 둠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그 예가 바로 고르반 법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그들이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때로는 부모님의 생신을 잘 챙겨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명절 때도 찾아뵙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미리 드리고 나중에라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가족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회개하고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사람 앞에서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면 상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경외심이 없이 생활하며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는 귀중한 전통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일대이로도 성경을 공부하지 못하게 시켰습니다. 이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상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삶에 개입하시고 인격적으로 그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우셨습니다. 일대일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보다는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 자체를 크게 여기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것이 됩니다. 제가 양들과의 일대일은 어찌하든지 하면서도 집에 있는 자녀 한 사람의 일대일을 소홀히 한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성경에서 부정하다고 정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입으로 들어가서 위와 장을 통해 뒤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에 율법으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해 놓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먹는 생활에서도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음식이 아닌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때에 정한 음식을 구별하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 규정이 이방인들이 믿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신앙을 정결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음식이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3,4은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죄가 나와서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도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음식 자체는 선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20-23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악한 생각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성적인 죄로 음란, 간음, 음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성 문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더럽혀지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탐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제어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릅니다. ‘우매함’은 선악의 분별력이 없이 감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방도 다 죄입니다. 이런 더러운 악들은 손을 씻지 않는 의식적 불결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불결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이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들이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기 때문에 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 보면 죄악투성이입니다. 파노라마처럼 나의 죄악들이 지나갑니다.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마음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1: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은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사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목욕을 하면 시원함을 느끼듯이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이 상쾌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순결하고 따뜻했습니다. 의와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일생 동안 선한 일에 힘을 쓰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고자 힘을 씁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서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살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서 먼지가 묻으면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물로 손을 씻듯이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 깨끗한 삶을 살도록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 때 우리가 날마다 변화를 받으며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면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또 계절마다 수양회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 정리를 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우리를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지키는 가운데 성결한 삶을 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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