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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8 막 12강(6:30-56)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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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18-06-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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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2 강                                             
말씀 | 마가복음 6:30-56
요절 | 마가복음 6:38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먹이신 내용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것을 찾아보고 주님께 가져오라고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무리들은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에 차게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는 우리를 도우사 목자노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제자들은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역사를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로 “주님, 제가 귀신들린 사람은 만났는데 소매를 걷고 그를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명했더니 귀신이 발작을 하고 나가더라고요” 침을 튀기며 말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제가 병든 사람을 보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그에게 안수하여 주었더니 병이 나았어요”라며 보고를 했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보고가 끝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쉬지 못하고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한 것으로 인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떠나서 따로 한적한 곳에 거하며 쉼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고할 때는 신이 나서 피곤한 줄을 몰랐는데 보고가 끝나고 쉬러 가는데 몹시도 배가 고프고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면서 대부분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여유롭게 가고 있는데 비해서 호수 주변으로는 급히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목자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그들을 볼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찰거머리 같이 자신들에게 달라붙어서 밥을 먹고 쉴 틈도 주지 않고 도움을 구하는 그들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자들이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식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가 가장 커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에워싸 밀며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짜증을 내는 대신에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해서 끝없이 동정하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을 다르게 만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면 자기 아내와 이혼할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불쌍한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대개 돈이 없을 때, 집이 없는 때 불쌍하다가 말합니다. 병들어 있을 때도 불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양에게 목자는 아이에게 어머니와 같습니다. 양은 눈이 나쁘고 다리도 짧고 공격용 무기도 없습니다. 먹어야 할 풀인지 독초인지 구별을 잘 못하고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가 어렵고 늑대나 여우에게 공격을 받으면 방어할 무기가 없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할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어깨에 율법의 짐을 올려 놓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을 미끼로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헤롯은 자신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의인 요한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목이 없는 요한이 나타나는 꿈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보호 받지 못하고 방황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병들고 배고파 우는 자녀와 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3:16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리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피곤했고 배가 고팠고 예수님을 따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제자가 되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그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목자는 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원수보다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스승보다 명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노인보다 명철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인생 문제들을 해결해나갑니다. 또 양과 목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제합니다. 목자는 양을 앞서 인도합니다(요 10:3). 양은 목자가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때가 저물어 가도 피곤한 줄 모르고 무리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합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여짜왔습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5,36).” 제자들은 자기들이 배가 고프다고 무리들을 놔두고 자기들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내고자 합니다. 더치 페이를 하자는 생각입니다. 제자들의 제안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성적이었습니다. 이성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이성적인 제안은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으로부터 회피할 구실을 찾게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매우 이성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에 부딪치면 이성을 회피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배고픈 제자들에게 5천명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온 무리들을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심으로 목자로서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책임감을 갖게 될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크게 만듭니다. 책임감이 있을 때 자기 한계를 뛰어 넘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목자로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먹이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미래의 지도자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스탭목자를 책임목자라고 부릅니다. 센터의 모든 일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저는 책임감 때문에 하루도 깨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책임감으로 인해 매일 새벽을 깨워 기도하게 됩니다. 일이 생기면 섬기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도 배고픈 상황인데 오천 명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는 너무 부당하게 보입니다. 제자들이 오천 명의 무리에게 따라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을 낳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과 제자들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을 양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리들을 먹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제자들도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제자들은 그의 지체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그의 일을 함께 해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그들은 4천원짜리 김밥을 오천 명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즉시 이천만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계산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어디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올 것인가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돌아가니 결과는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큰 돈을 어디서 구하며 어디서 그 많은 떡을 사올 것인가 생각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부담감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없는 것만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에게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있는지 가서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작은 가능성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찾아보니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아서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가서 보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문제를 당할 때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으면 아무 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서 찾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해야 할 큰 일을 생각하다가 그 무게에 눌려 아무 것도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이것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길 때 그를 통해서 큰 역사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한 팀의 일대일을 귀하게 여기고 섬길 때 한 사람이 영생을 얻고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한 팀의 일대일에 충실할 때 한 요회가 이루어지고 한 요회가 자라서 한 센터가 되고 한 센터가 세계를 먹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39, 4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오십씩 또는 백 명씩 앉힘으로 먹을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일하지 않고 제자들과 동역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일을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는 일을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줍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불평하는 소비자가 자기의 권리를 찾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감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셨습니다. 예수님 손에서 계속해서 떡이 나오고 물고기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손을 거치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면 줄 수 있는 것이 다 있습니다. 꽃동네의 창시자 최기동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빌어먹을 수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지로서 사람들에게 빌어다가 9명의 꽃동네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꽃동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먹이고자 하는 책임감과 목자의 심정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함을 봅니다. 죠지 뮬러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십만 명 이상의 고아들을 오직 믿음으로 먹이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줄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는 사람은 친구들을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서로 간에 있는 것을 모으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서 보고”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원수들은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명하신 “가서 보라”는 말씀에 순종하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서 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세계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오병이어를 드려서 여름 수양회를 섬기고 홍대 만 명의 학생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계 캠퍼스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자신은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을 재촉하여 보내셨습니다. 또한 무리들이 그를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제자들이 헛생각을 하지 않도록 몰아내듯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일을 치루고 나서 산으로 가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게 된 것을 인하여 감사기도 하셨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은 홀로 뭍에 계셨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제자들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으로 고통 할 때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감당할 수 없을 때 함께 져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셨으면 바로 배 위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는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깨어 그를 붙잡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돕기 위해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령이 자신들을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줄 알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내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로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고 그들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혼자서 헛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생하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격려하시며 도우십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쉼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고 잠잠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신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둔하여졌다는 말은 마음이 딱딱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했을 때 마음이 딱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셔도 그가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둔한 제자들을 인내하시며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도록 끝까지 도우십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데나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따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가서 보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선한 일을 감당하는 지혜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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