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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8 막10강(5:21-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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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3회 작성일 18-05-2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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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10 강
말씀 | 마가복음 5:21-43
요절 | 마가복음 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헬라어에서 두려움의 어원은 ‘도망치다, 떨다’입니다. 존재의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사탄의 종노릇을 합니다. 두려움에는 크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믿음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결실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두려움을 다루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이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회당에는 열 명의 관리가 있고 회당장은 세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건물과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고 예배를 관장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재판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열 두 살 먹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딸 바보였습니다. 딸이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100% 들어주었습니다. 딸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봄비를 맞고 독감에 걸리더니 열이 뜨겁게 올라갔습니다. 갑자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아이의 호흡이 가빠지면서 생명이 위독해졌습니다. 고통하는 딸을 보면서 자기가 대신 아파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의사들의 처방을 받고 이 약 저 약을 써보다가 약발이 듣지 않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게 달려나갔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는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바리새인들과 깊은 유대관계가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여호와가 깨닫게 하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야이로가 딸 문제를 들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그를 사람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고 경배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위신과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알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요구대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이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들었습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이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습니다. 여자는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많은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창백한 여자의 얼굴에 화장을 해도 잘 받지가 않았습니다. 여자는 빈혈에 걸려서 자주 쓰러졌습니다. 혈루증은 부정한 병입니다.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부정했고 그녀와 접촉한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그녀가 만졌던 물건도 부정해지고 앉았던 자리도 부정해집니다(레15:23-33). 그래서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의 꿈도 가질 수 없었고 가족들은 그녀를 더 이상 돌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통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도 깨끗하게 낫게 했고 세리를 제자로 삼고 죄사함도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도 예수님께 나아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28절에서 “생각함일러라”는 단어는 미완료형으로서 반복해서 마음에 다짐하며 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반복해서 자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때로 그녀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이 생길 때 그녀는 “의심과 불신을 심는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치며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뇌이며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왔습니다. 깡마르고 핏기 없는 모습 그대로 공중 앞으로 나왔습니다.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절망감을 극복하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싼 사람의 벽을 뚫는 것도 뼈만 남은 여인으로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때 즉시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이 여인이 접촉하면 모든 것이 더러워지는데 반대로 예수님께 접촉하자 여인의 부정이 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며 가는 중에도 믿음의 역사를 민감하게 감지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의 옷에 손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여자에게로 나갔고 그녀는 치료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민감한 반응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31).”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하는 와중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예민하게 반응하시니 제자들은 이상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깨를 밀고 등에 손을 대기도 하면서 밀고 당기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으로 자기 옷에 손을 댄 사람을 둘러보며 찾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이 여인은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떨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책망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이 남자의 옷을 만진 것은 그를 부정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을 그의 허락도 없이 도둑질 한 것 같습니다. 여자는 믿음으로 병에서 나았지만 율법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를 정죄했고 마음의 불안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생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그녀의 한 마디는 ‘저스트 원 터치(Just one touch!)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소감 발표를 다 들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딸아!” 이 한 마디에 여인의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요일 4:18a). 예수님의 사랑이 그녀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또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능력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그 믿음을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게 했다는 율법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병’이란 헬라어 단어가 ‘채찍’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인은 혈루병에 걸렸을 때 자신을 부정한 여자라며 마음에 채찍질을 가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부정한 여자라는 채찍을 휘둘러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멍들게 했으며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병에서 놓여 건강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치유와 자유함과 하늘의 평안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존감을 높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도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자기를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도 가끔가다 넘어지는 죄로 인해서 자기를 정죄하고 마음을 채찍질합니다. 나의 연약함과 죄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정죄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휘두르는 판단의 채찍질을 당하고 쓰라린 마음을 갖습니다. 전공 공부나 제자 양성에 실패하면 자기 불의와 내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생각하며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내가 해봤자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매일 새벽을 깨워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힘이 생기면 내가 하고자 계획했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행동으로 옮길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통로입니다. 여인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율법적인 생각, 자기 학대, 더럽다는 정죄의 채찍질에서 자유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여자와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비보를 전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들은 딸이 죽었으니 끝났습니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 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불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딸이 죽은 이상 예수님도 어쩔 수 없으니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무엇을 할 수 있지만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쓰러지려고 하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요?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하고 믿는 것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닌가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회장당으로서 장례식도 많이 인도하고 죽음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수시로 찾아와 우리를 절망케 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의사는 의료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사업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고 대부분은 알 수 없는 장래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열심히 목자 생활을 하다가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일할 의욕이 생기지 않고 얼굴이 굳어집니다. 무엇보다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큽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동안에 비행기 사고, 교통사고, 암으로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제자 한 명 세우지 못하고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두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별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범죄하기 전 아담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을 때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요일4:18b).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려움 뒤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르게 맺어져 있을 때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할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기 때문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능력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절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듣다는 말은 원어로 ‘파라코우사’인데 ‘우연히 듣다’라는 뜻과 함께 ‘듣기를 거부한다, 무시한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심는 말을 무시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심는 말, 두려움을 심는 말, 불신의 말,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걸러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심는 악한 말을 들으시고 이 말과 싸우도록 야이로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믿으라는 뜻입니다. 병이 나음 받기를 구하던 데서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실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세력과 싸우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그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혈루증에서 나음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결국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애매하게 혈루증 여인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원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계속 믿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에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음까지도 이기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철학자들의 말, 진화론자들의 말, 돈이 최고라는 말, 등등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과 반대되는 말들을 듣습니다. 그런 말들은 내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두려움을 심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찾다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구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처음 가진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학과 공부를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합니다. 그런데 성적이 더 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학과 공부를 두려워하면서 잠만 자야 합니까? 아닙니다. 믿음으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을 잘 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합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도하고 난 다음에 양이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양치는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전도인의 사명을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불신하고 절망하는 것은 믿음의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밀어닥친 상황이 오더라도 변치않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현실이 얼마나 어렵건 상황이 어떠하든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목자님은 운전면허 시험에 11번을 실패하여 필기 시험부터 다시 봐야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자기 실력과 깡을 믿고 도전했는데 이제는 두려움이 생겨 오금이 저려오고 운전대가 마귀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부활신앙으로 12번째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운전석에 앉아서도 '딴 길로 가지 맙시다'는 찬송가를 부르며 핸들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자동차가 딴 길로 가지 않아 그는 12번째 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용된 사람들로서 아이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야이로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들며 통곡하던 자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통곡하는 자들과 비웃는 자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낳고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앞에서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아니하셨습니다(6:5,6).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역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적인 분위기, 말씀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요? 믿음의 말을 하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불평, 불신, 원망의 말을 억제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기를 힘씀으로 사랑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이 중심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활발히 일어납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은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오 부활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야이로의 딸이 환영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두려움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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