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9강(4:35-5:20) 그가 누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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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9 강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거라사 광인을 제어하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알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4:35-41).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해변에 있는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봄 소풍을 가듯이 기쁜 마음으로 배에 올라 평소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저녁노을을 보면서 뱃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노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만경창파에 몸을 실리어 갈매기로 벗을 삼고 싸워만 가누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창해만리 먼 바다에 외로운 등불만 깜빡거린다.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예수님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배 뒤편에 있는 고물에 베개를 하고 누우시더니 어느새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바다는 북쪽의 헬몬산의 찬 바람과 남쪽의 따뜻한 바람이 만나면 회전을 합니다. 여기에 지중해에서 오는 바람이 만나서 광풍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람이 헬몬산에서 갈릴리 바다로 내려올 때 깔때기와 같이 되어 있는 구조로 인해서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로 인해 6미터의 높이까지 파도가 친다고 합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파도가 높이 일어나 물이 배를 산더미처럼 덮쳤습니다. 갑자기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고 나머지는 배에 들어온 물을 퍼냈습니다. 제자들의 항해술도 광풍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을 퍼내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제 배는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도 평화롭게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였습니다. 대조적으로 새파랗게 질린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소리쳤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여기서 물에 빠져 죽으면 자신들의 꿈도 날아가 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예수님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저녁에 예수님이 항해를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주무시기만 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자신들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에게 버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자기들만 고생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편히 누워 잠이나 자고 자기들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에 있던 모든 죄악 된 본성들이 다 올라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쓴뿌리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외톨이가 됩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물이 들어와서 두려움의 종이 된 것같이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학점과 취업과 인간관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인생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합니다. 감당해야 할 과제가 많아 밤을 새며 노력을 하지만 결과가 생각한 것만큼 잘 나오지 않습니다. 몸은 지쳐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꼼짝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헌신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종노릇하게 되면 무기력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되고 무정해집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구원 역사에 헌신하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실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전대 없이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쓸 것을 채워주심을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도록 목자의 심정과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도록 담력훈련도 시키셨습니다.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심으로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권세는 광풍을 꾸짖어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즉시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아주 잔잔하여짐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명을 먼저 살려 놓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없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 현 상황을 아뢰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니면 갑판에 둘러 앉아 합심기도라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문제 앞에서 믿음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곁에 두고도 이렇게 믿음이 없이 행동하는 제자들로 인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입니다(민14:11). 그들은 많은 이적을 보았지만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성난 파도와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병을 고치시는 주님,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귀신도 쫓아내시는 권세자이십니다. 이제 성난 파도와 바람 앞에서 그의 한계를 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풍까지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광풍 중에서도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평온할 때 우리와 함께 걸으며 격려해 주시고 광풍 중에 지치고 쓰러지려 할 때는 우리를 업고 가십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마음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마다 채워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도 필요하고 자격증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를 인생의 광풍에서 구해 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광풍도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광풍 중에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광풍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연단을 받아 순수하고 강하고 귀하게 됩니다. 우리가 광풍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구원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들처럼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자연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연과 귀신과 질병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권능자이십니다. 제자들은 앞에서는 폭풍으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였다면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능력을 목격한 뒤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갖게 되는 경외심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에서 겪는 광풍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광풍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부딪치는 광풍을 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을 갖고 승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거라사 광인을 회복시키신 예수님(5:1-20).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광풍 속에서 시달리다보니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이제 좀 쉬면서 배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배를 대고 발을 딛는데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상처 난 동물의 부르짖음 같았습니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고 눈에서는 반짝이는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과 고랑이 달려 있어서 강한 쇳소리가 났습니다. 그는 거의 벗은 몸을 하고 있었는데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였습니다. 그는 왜 무덤 사이에 거했을까요? 그는 죽음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그도 본래는 순수하고 멋있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술을 먹고 어울려 춤을 추고 정신없이 놀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침대에 여자가 함께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이를 잊고자 더욱 허랑방탕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학사경고를 받고 학업을 따라갈 수 없어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더욱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면서 죄는 더욱 교묘하고 강력해졌습니다. 이때 귀신이 그에게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이를 허용했습니다. 그의 죄가 심해질수록 더욱 많은 악령이 그를 강력하게 지배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사회의 각종 규제들에 반발했습니다. 일부러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고 자기를 얽어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가 사회의 규례들을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사회는 그를 더욱 졸라매었습니다. 결국 그는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그의 죄가 과격해질수록 더러운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와서 조종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의 종노릇하며 사는 그는 분노와 혈기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을 아주 쉽게 뛰어다녔습니다. 그의 힘은 괴물처럼 강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두고자 쇠사슬로도 매어보고, 여러 번 고랑에도 채워보았지만 귀신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귀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치던 그 날 밤이 지나고 나서 한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알 수 없는 그 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는 알고 싶었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해변으로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그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절을 하였지만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귀신은 주님을 알지만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만한 천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입니다. 귀신들은 사탄을 추종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불신을 심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그에게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심오한 질문입니다. 이름은 그의 인격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 그 위대성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의 위대성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거짓된 자아 즉 귀신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자아를 구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귀신에게 속아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친 놈, 더러운 놈, 무서운 녀석으로 불리웠습니다. 귀신들린 모습이 그의 본래 인격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만하고 음란에 붙잡혀 있고, 탐욕과 시기심과, 증오심, 열등감, 허무, 안일, 무기력한 것이 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게임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의롭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존귀한 존재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그의 생명을 바쳐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존재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론과 인식론이 철학의 큰 주제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런 주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자동차 등 삶의 편리와 작은 즐거움에 매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어떻게 돈을 더 벌 수 있는가 고민을 합니다. 로봇 산업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가치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소외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가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이름이 군대라는 말은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를 드러냅니다. 또한 개인에게 물었는데 “우리는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얼마나 많은지 6000마리나 되는 귀신이 그 속에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인격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귀신 6000마리가 분명한 체계와 조직을 가지고 그 안에 거하면서 그를 지배하고 그를 통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의 세력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사랑의 노예가 되도록 문화를 조장하였습니다. 공동체는 깨어지고 불법이 강력하게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돕기 위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을 귀신과 구별하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귀신은 속이는 영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탄로가 나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점령하고 있는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령을 하여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귀신의 요청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이 허락했습니다. 당시 거라사 지방은 양돈 산업이 번창하였습니다. 돼지고기를 로마 군단에 납품을 하고 지역의 경제를 살리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돼지 한 마리는 귀신들린 한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가치관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양돈 산업기지에서 작은 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본래 돼지는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먹고 자고 뒹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돼지들은 비록 돼지이지만 귀신들이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는 10억원쯤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뛰어들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찰에 고소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에 압도되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고자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시고 빈 자리에 이 사람을 남겨두심으로 그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열 개 도시를 담당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난 파도에 묻혀 죽어간다고 소리치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심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권세자이십니다. 또한 군대 귀신들린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참된 자아를 찾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켜 주시며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거라사 광인을 제어하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알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4:35-41).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해변에 있는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봄 소풍을 가듯이 기쁜 마음으로 배에 올라 평소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저녁노을을 보면서 뱃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노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만경창파에 몸을 실리어 갈매기로 벗을 삼고 싸워만 가누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창해만리 먼 바다에 외로운 등불만 깜빡거린다. 어기야 디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예수님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배 뒤편에 있는 고물에 베개를 하고 누우시더니 어느새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바다는 북쪽의 헬몬산의 찬 바람과 남쪽의 따뜻한 바람이 만나면 회전을 합니다. 여기에 지중해에서 오는 바람이 만나서 광풍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람이 헬몬산에서 갈릴리 바다로 내려올 때 깔때기와 같이 되어 있는 구조로 인해서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로 인해 6미터의 높이까지 파도가 친다고 합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파도가 높이 일어나 물이 배를 산더미처럼 덮쳤습니다. 갑자기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고 나머지는 배에 들어온 물을 퍼냈습니다. 제자들의 항해술도 광풍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을 퍼내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제 배는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도 평화롭게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였습니다. 대조적으로 새파랗게 질린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소리쳤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여기서 물에 빠져 죽으면 자신들의 꿈도 날아가 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예수님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저녁에 예수님이 항해를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주무시기만 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자신들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에게 버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자기들만 고생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편히 누워 잠이나 자고 자기들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에 있던 모든 죄악 된 본성들이 다 올라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쓴뿌리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외톨이가 됩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물이 들어와서 두려움의 종이 된 것같이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학점과 취업과 인간관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인생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합니다. 감당해야 할 과제가 많아 밤을 새며 노력을 하지만 결과가 생각한 것만큼 잘 나오지 않습니다. 몸은 지쳐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꼼짝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헌신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종노릇하게 되면 무기력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되고 무정해집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구원 역사에 헌신하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실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전대 없이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쓸 것을 채워주심을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도록 목자의 심정과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도록 담력훈련도 시키셨습니다.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심으로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권세는 광풍을 꾸짖어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즉시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아주 잔잔하여짐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명을 먼저 살려 놓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없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 현 상황을 아뢰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니면 갑판에 둘러 앉아 합심기도라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문제 앞에서 믿음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곁에 두고도 이렇게 믿음이 없이 행동하는 제자들로 인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입니다(민14:11). 그들은 많은 이적을 보았지만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성난 파도와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병을 고치시는 주님,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귀신도 쫓아내시는 권세자이십니다. 이제 성난 파도와 바람 앞에서 그의 한계를 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풍까지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광풍 중에서도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평온할 때 우리와 함께 걸으며 격려해 주시고 광풍 중에 지치고 쓰러지려 할 때는 우리를 업고 가십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마음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마다 채워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도 필요하고 자격증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를 인생의 광풍에서 구해 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광풍도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광풍 중에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광풍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연단을 받아 순수하고 강하고 귀하게 됩니다. 우리가 광풍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구원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들처럼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자연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연과 귀신과 질병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권능자이십니다. 제자들은 앞에서는 폭풍으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였다면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능력을 목격한 뒤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갖게 되는 경외심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에서 겪는 광풍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광풍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부딪치는 광풍을 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을 갖고 승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거라사 광인을 회복시키신 예수님(5:1-20).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광풍 속에서 시달리다보니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이제 좀 쉬면서 배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배를 대고 발을 딛는데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상처 난 동물의 부르짖음 같았습니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고 눈에서는 반짝이는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과 고랑이 달려 있어서 강한 쇳소리가 났습니다. 그는 거의 벗은 몸을 하고 있었는데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였습니다. 그는 왜 무덤 사이에 거했을까요? 그는 죽음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그도 본래는 순수하고 멋있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술을 먹고 어울려 춤을 추고 정신없이 놀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침대에 여자가 함께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이를 잊고자 더욱 허랑방탕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학사경고를 받고 학업을 따라갈 수 없어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더욱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면서 죄는 더욱 교묘하고 강력해졌습니다. 이때 귀신이 그에게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이를 허용했습니다. 그의 죄가 심해질수록 더욱 많은 악령이 그를 강력하게 지배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사회의 각종 규제들에 반발했습니다. 일부러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고 자기를 얽어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가 사회의 규례들을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사회는 그를 더욱 졸라매었습니다. 결국 그는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그의 죄가 과격해질수록 더러운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와서 조종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의 종노릇하며 사는 그는 분노와 혈기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을 아주 쉽게 뛰어다녔습니다. 그의 힘은 괴물처럼 강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두고자 쇠사슬로도 매어보고, 여러 번 고랑에도 채워보았지만 귀신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귀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치던 그 날 밤이 지나고 나서 한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알 수 없는 그 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는 알고 싶었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해변으로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그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절을 하였지만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귀신은 주님을 알지만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만한 천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입니다. 귀신들은 사탄을 추종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불신을 심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그에게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심오한 질문입니다. 이름은 그의 인격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 그 위대성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의 위대성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거짓된 자아 즉 귀신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자아를 구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귀신에게 속아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친 놈, 더러운 놈, 무서운 녀석으로 불리웠습니다. 귀신들린 모습이 그의 본래 인격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만하고 음란에 붙잡혀 있고, 탐욕과 시기심과, 증오심, 열등감, 허무, 안일, 무기력한 것이 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게임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의롭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존귀한 존재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그의 생명을 바쳐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존재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론과 인식론이 철학의 큰 주제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런 주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자동차 등 삶의 편리와 작은 즐거움에 매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어떻게 돈을 더 벌 수 있는가 고민을 합니다. 로봇 산업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가치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소외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가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이름이 군대라는 말은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를 드러냅니다. 또한 개인에게 물었는데 “우리는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얼마나 많은지 6000마리나 되는 귀신이 그 속에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인격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귀신 6000마리가 분명한 체계와 조직을 가지고 그 안에 거하면서 그를 지배하고 그를 통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의 세력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사랑의 노예가 되도록 문화를 조장하였습니다. 공동체는 깨어지고 불법이 강력하게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돕기 위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을 귀신과 구별하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귀신은 속이는 영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탄로가 나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점령하고 있는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령을 하여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귀신의 요청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이 허락했습니다. 당시 거라사 지방은 양돈 산업이 번창하였습니다. 돼지고기를 로마 군단에 납품을 하고 지역의 경제를 살리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돼지 한 마리는 귀신들린 한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가치관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양돈 산업기지에서 작은 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본래 돼지는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먹고 자고 뒹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돼지들은 비록 돼지이지만 귀신들이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는 10억원쯤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뛰어들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찰에 고소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에 압도되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고자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시고 빈 자리에 이 사람을 남겨두심으로 그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열 개 도시를 담당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난 파도에 묻혀 죽어간다고 소리치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심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권세자이십니다. 또한 군대 귀신들린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참된 자아를 찾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켜 주시며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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