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8강(4:21-34) 씨가나서 자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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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8 강
말씀 | 마가복음 4:21-34
요절 | 마가복음 4:27
씨가 나서 자라되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지난 주에는 네 가지 마음 밭의 비유를 통해서 밭의 속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씨의 속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습니다. 씨는 씨껍질과 배젖과 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는 식물체로 자라고 배젖은 배가 싹틀 때 필요한 양분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세포분열을 통해서 씨에서 싹이 나오고 이것이 자라면서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가 됩니다. 주님이 겨자씨 비유를 하셨는데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이지만 매우 크게 자라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등불 비유(21-25). 예수님은 등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오늘날은 스위치만 누르면 대낮같이 환하게 되기에 등불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등불을 켜는 것은 친숙한 일상이었습니다. 낮에는 보호하기 위해서 등잔을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지만 밤이 되면 벽에 설치한 등경 위에 등잔을 올려놓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으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출입문을 찾거나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을 환하게 켜 놓으면 사물의 모습이 밝히 드러납니다.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9:105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아서 인생의 도리를 알게 해 줍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등과 빛은 신자가 길을 벗어나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데 필요합니다. 등불이 필요한 것은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길로 계속 갈 때 넘어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직업, 배우자, 거주지, 휴가 계획과 같은 삶의 크고 작은 선택이나 결정과 관련해 일일이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단지 신자가 가져야 할 성품과 삶의 우선순위를 알려줄 뿐입니다. 빛은 낮에 필요하고 등은 밤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이 어두울 때뿐만 아니라 밝을 때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우리가 보물찾기를 할 때 찾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한 지혜와 지식을 찾도록 하나님은 감추십니다. 귀한 것은 감추고 보배는 잘 보존하기 위해서 숨깁니다. 하나님은 보배와 같은 말씀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숨겨진 말씀을 깨닫고 찾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추어진 것이 있을 때 찾고자 하는 의욕과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감추시는 것은 열심히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하신 말씀을 공부할 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세밀하게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을 때 주님이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질문을 던질 때 더 깊이 들을 수 있습니다. 잠언 2:4,5에는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광물 탐사자들이 광맥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맥을 찾아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은 것이며 더 받으리니”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을 듣는가 분별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살피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때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말씀 앞에 떠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헤아림’은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자나 용기를 가리킵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재다, 측정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입니다. 큰 그릇으로 재면 크게 받지만 작은 그릇으로 재면 작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그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담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이 달라집니다. 헤아림이 넉넉하고 풍성하면 풍성하게 보상 받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주의 깊게 듣는가에 따라서 나중에 보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측량하는가에 따라서 얻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쓸 수 있는 잣대는 무엇입니까? 듣는 것, 쓰는 것, 암송하는 것, 집단으로 공부하는 것, 가르치는 것, 행하는 것 등입니다.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5%밖에 남지 않지만 내가 가르치고 행할 때 90%이상 배운 것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은 큰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믿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깊고 예리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해서 듣는 사람에게 더 많은 깨달음과 복을 주십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삶이 변화되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진 것까지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고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점차 영적인 소원도 잃어버리고 믿음도 잃어버립니다. 근육이 운동을 하면 점점 강해지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점점 약해지고 축 늘어집니다. 근육은 점점 강해지지 않으면 점점 약해집니다. 똑 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주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알던 말씀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이렇게 묵상하도록 함이었습니다. 묵상하면서 말씀 속에 담긴 보화들을 발견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마음이 밝아지고, 얼굴도 빛이 나고, 삶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2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문자나 사상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히 4:12).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운행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를 세우고 번영하게 합니다. 한 나라가 세워지려면 사상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자라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씨 자체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환경이 조성되면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마음에 심겨져서 싹이 나고 자라납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와 같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씨가 나서 자라되 변화의 과정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느립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성장 속도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는 씨가 밭에 떨어지면 지키어 결실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8, 29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씨가 땅에 묻히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처음에는 싹, 그 다음에는 이삭,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싹에서 바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단계가 있습니다. 싹을 티우고 자라는 과정이 점진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각 사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한 것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난관이 있어도 분명하게 자라납니다. 우리가 콩나물을 키워보면 알지만 물을 주면 다 밑으로 빠집니다. 매일 매일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콩에서 싹이 나고 나물로 자라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 일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전3:6)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각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씨를 뿌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때로는 아무리 뿌려도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때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뿌려도 자라지 않고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니 헛수고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뿌려진 말씀은 사람 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25년 동안 키우셨고, 모세 한 사람을 80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그들이 자란 후에 믿음의 조상으로 열매를 맺었고 한 민족의 구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한 사람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과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사과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뿌려진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애플 씨’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셋째, 겨자씨의 비유(30-34).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0-32).” 망고 씨는 손바닥만 한 데 겨자씨 한 알은 볼펜으로 점을 찍은 것만큼 작습니다. 겨자씨는 팔레스틴 지방의 들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되는 1년생 식물입니다. 4-6월 즈음에 노란 꽃을 피우며 다 자라면 보통 3-4미터, 큰 것은 7미터까지 크게 자랍니다. 열매는 양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름을 짜는 데도 쓰입니다. 심지어 겨자 폭탄까지 있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서 그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고 쉼을 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집니다. 이사야66: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도 미약해보이지만 한국 300개 캠퍼스와 세계 98개국에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때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이 변화되어 놀라운 부흥 역사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겨자씨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제자들을 겨자씨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현재 그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돌밭과 같아서 말씀을 가르쳐 주어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그들이 과연 무슨 역사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들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생겨나고 30년 만에 로마제국 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가복음을 듣는 로마에 있던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무리들이었고, 로마 제국이나 로마의 권력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했습니다. 로마 세력에 압도당해서 무력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밤낮으로 일하기 때문에 작은 겨자씨 같은 역사가 나중에는 온 세상을 덮을 만큼 크게 성장했습니다. 디엘 무디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그가 설교를 하면 문법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미국과 영국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단은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원산에서 사역하던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인 하디가 선교사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과거 3년 동안 강원도 일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으로 자신의 신앙적인 허물, 백인으로서 우월감과 자만심, 권위주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디의 고백은 기도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었고, 하디 자신에게도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디의 고백 이후에도 기도회가 계속되었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셨습니다. 주님이 해석하시는 것을 듣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교제하면서 말씀을 묵상할 때 말씀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우리 각자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겨자씨 몇 알이 모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성장하게 되면 수많은 영혼들이 와서 쉼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다고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현재 우리의 믿음이 작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큰 희망을 보셨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큰 희망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힘써 전해야 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4:21-34
요절 | 마가복음 4:27
씨가 나서 자라되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지난 주에는 네 가지 마음 밭의 비유를 통해서 밭의 속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씨의 속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습니다. 씨는 씨껍질과 배젖과 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는 식물체로 자라고 배젖은 배가 싹틀 때 필요한 양분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세포분열을 통해서 씨에서 싹이 나오고 이것이 자라면서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가 됩니다. 주님이 겨자씨 비유를 하셨는데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이지만 매우 크게 자라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등불 비유(21-25). 예수님은 등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오늘날은 스위치만 누르면 대낮같이 환하게 되기에 등불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등불을 켜는 것은 친숙한 일상이었습니다. 낮에는 보호하기 위해서 등잔을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지만 밤이 되면 벽에 설치한 등경 위에 등잔을 올려놓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으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출입문을 찾거나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을 환하게 켜 놓으면 사물의 모습이 밝히 드러납니다.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9:105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아서 인생의 도리를 알게 해 줍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등과 빛은 신자가 길을 벗어나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데 필요합니다. 등불이 필요한 것은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길로 계속 갈 때 넘어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직업, 배우자, 거주지, 휴가 계획과 같은 삶의 크고 작은 선택이나 결정과 관련해 일일이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단지 신자가 가져야 할 성품과 삶의 우선순위를 알려줄 뿐입니다. 빛은 낮에 필요하고 등은 밤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이 어두울 때뿐만 아니라 밝을 때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우리가 보물찾기를 할 때 찾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한 지혜와 지식을 찾도록 하나님은 감추십니다. 귀한 것은 감추고 보배는 잘 보존하기 위해서 숨깁니다. 하나님은 보배와 같은 말씀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숨겨진 말씀을 깨닫고 찾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추어진 것이 있을 때 찾고자 하는 의욕과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감추시는 것은 열심히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하신 말씀을 공부할 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세밀하게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을 때 주님이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질문을 던질 때 더 깊이 들을 수 있습니다. 잠언 2:4,5에는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광물 탐사자들이 광맥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맥을 찾아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은 것이며 더 받으리니”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을 듣는가 분별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살피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때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말씀 앞에 떠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헤아림’은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자나 용기를 가리킵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재다, 측정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입니다. 큰 그릇으로 재면 크게 받지만 작은 그릇으로 재면 작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그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담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이 달라집니다. 헤아림이 넉넉하고 풍성하면 풍성하게 보상 받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주의 깊게 듣는가에 따라서 나중에 보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측량하는가에 따라서 얻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쓸 수 있는 잣대는 무엇입니까? 듣는 것, 쓰는 것, 암송하는 것, 집단으로 공부하는 것, 가르치는 것, 행하는 것 등입니다.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5%밖에 남지 않지만 내가 가르치고 행할 때 90%이상 배운 것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은 큰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믿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깊고 예리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해서 듣는 사람에게 더 많은 깨달음과 복을 주십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삶이 변화되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진 것까지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고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점차 영적인 소원도 잃어버리고 믿음도 잃어버립니다. 근육이 운동을 하면 점점 강해지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점점 약해지고 축 늘어집니다. 근육은 점점 강해지지 않으면 점점 약해집니다. 똑 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주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알던 말씀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이렇게 묵상하도록 함이었습니다. 묵상하면서 말씀 속에 담긴 보화들을 발견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마음이 밝아지고, 얼굴도 빛이 나고, 삶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2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문자나 사상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히 4:12).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운행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를 세우고 번영하게 합니다. 한 나라가 세워지려면 사상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자라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씨 자체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환경이 조성되면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마음에 심겨져서 싹이 나고 자라납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와 같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씨가 나서 자라되 변화의 과정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느립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성장 속도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는 씨가 밭에 떨어지면 지키어 결실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8, 29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씨가 땅에 묻히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처음에는 싹, 그 다음에는 이삭,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싹에서 바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단계가 있습니다. 싹을 티우고 자라는 과정이 점진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각 사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한 것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난관이 있어도 분명하게 자라납니다. 우리가 콩나물을 키워보면 알지만 물을 주면 다 밑으로 빠집니다. 매일 매일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콩에서 싹이 나고 나물로 자라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 일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전3:6)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각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씨를 뿌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때로는 아무리 뿌려도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때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뿌려도 자라지 않고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니 헛수고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뿌려진 말씀은 사람 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25년 동안 키우셨고, 모세 한 사람을 80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그들이 자란 후에 믿음의 조상으로 열매를 맺었고 한 민족의 구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한 사람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과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사과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뿌려진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애플 씨’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셋째, 겨자씨의 비유(30-34).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0-32).” 망고 씨는 손바닥만 한 데 겨자씨 한 알은 볼펜으로 점을 찍은 것만큼 작습니다. 겨자씨는 팔레스틴 지방의 들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되는 1년생 식물입니다. 4-6월 즈음에 노란 꽃을 피우며 다 자라면 보통 3-4미터, 큰 것은 7미터까지 크게 자랍니다. 열매는 양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름을 짜는 데도 쓰입니다. 심지어 겨자 폭탄까지 있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서 그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고 쉼을 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집니다. 이사야66: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도 미약해보이지만 한국 300개 캠퍼스와 세계 98개국에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때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이 변화되어 놀라운 부흥 역사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겨자씨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제자들을 겨자씨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현재 그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돌밭과 같아서 말씀을 가르쳐 주어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그들이 과연 무슨 역사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들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생겨나고 30년 만에 로마제국 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가복음을 듣는 로마에 있던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무리들이었고, 로마 제국이나 로마의 권력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했습니다. 로마 세력에 압도당해서 무력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밤낮으로 일하기 때문에 작은 겨자씨 같은 역사가 나중에는 온 세상을 덮을 만큼 크게 성장했습니다. 디엘 무디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그가 설교를 하면 문법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미국과 영국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단은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원산에서 사역하던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인 하디가 선교사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과거 3년 동안 강원도 일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으로 자신의 신앙적인 허물, 백인으로서 우월감과 자만심, 권위주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디의 고백은 기도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었고, 하디 자신에게도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디의 고백 이후에도 기도회가 계속되었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셨습니다. 주님이 해석하시는 것을 듣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교제하면서 말씀을 묵상할 때 말씀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우리 각자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겨자씨 몇 알이 모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성장하게 되면 수많은 영혼들이 와서 쉼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다고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현재 우리의 믿음이 작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큰 희망을 보셨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큰 희망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힘써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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