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7강(4:1-20)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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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7 강
말씀 | 마가복음 4:1-20
요절 | 마가복음 4:20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 인애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에게 풍성한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상대적으로 듣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흘려버립니다. 반면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듣고 받아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잘 듣고 받아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탁 트인 바닷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말씀을 들으니 마음도 탁 트이고 집중이 잘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무리들이 잘 듣도록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이크도 없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은 성스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가르침의 1/3이 비유입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입니다. 비유는 추상적인 진리를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쉽고 오래 기억되어 묵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유는 그를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리고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3-9).” 먼저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들으라고 요청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생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삼상 15:22).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네 건질 것이 없네 하며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변에 앉아서 풀만 뜯다가 무리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람 한 번 잘 쏘이고 간다 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 아는 비유인데 그들은 비유의 참 뜻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질문을 할 때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겸손하게 배우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더 확실하게 알고자 하기 때문에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죄사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고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혼란스럽던 마음을 정리해줍니다. 어두운 가운데 헤매던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그 빛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이 깨우치신 네 가지 밭의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첫째, 길 가. ‘길 가’는 밭과 밭 사이의 길입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기 때문에 흙이 딱딱해서 씨가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들이 와서 날름 먹어버립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사탄은 뿌려진 말씀을 즉시 와서 빼앗습니다. 사탄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말씀을 빼앗을까요? 무엇보다 회의를 심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이 여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런 방식으로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가 되는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한 고정관념과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 편견으로 그가 하는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도 진화론에 기초한 사회과학이론 등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진화론에 기초한 설명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빼앗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빼앗기면 잠을 자지 못하면서 돈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탄에게 빼앗겨도 원통한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빼앗고자 하는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깨어서 말씀을 받고 붙잡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성경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돌밭. 16,17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에 뿌려진 씨는 금방 싹이 나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뿌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돌밭은 겉은 부드럽지만 속에는 돌들이 박혀 있어서 씨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여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태양 볕으로 말라죽었습니다. 뿌리는 식물이 바로 서도록 돕고, 땅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잘 자라는 나무나 식물의 뿌리를 보면 어떻습니까? 뿌리가 깊이 내리고 옆으로도 쫙 퍼져있습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쳐있어서 물을 빨아올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세계관이 잘 정립이 되면 기초가 튼튼한 집과 같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와 같이 여러 모양의 환난이나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는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은 식물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광합성 작용을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게 되면 더욱 주님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환난과 박해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과일들이나 열매는 맛이 있고 튼튼합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라야 재목으로 귀히 쓰임 받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때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4:3에서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밭을 갈아엎어서 돌을 골라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돌과 같은 교만한 생각, 반항하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말씀이라도 마음에 뿌리를 내리도록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1,2 말씀을 통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도 25년 동안 이 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며 믿고 순종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에서 오는 죄책감으로 심히 괴로워하다가 이신칭의 진리를 발견하고 심령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31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려 은혜와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다양한 사건 속에서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지혜와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소감을 쓰면서 마음에 박힌 돌을 캐내고 뿌리를 내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소감 쓰면서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은 바 은혜를 나누면서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밭.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가시떨기 밭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땅 속에 가시나무의 잔뿌리가 남아 있는 땅입니다. 가시떨기의 밭은 좋은 땅이지만 가시가 같이 자랍니다. 가시떨기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곡식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잡초가 영양분을 빼앗고 가시떨기의 줄기와 잎이 좋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그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이 자라서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다가 쭉정이만 맺게 됩니다. 좋은 영양분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다른 것에 기운을 빼앗기면 성장하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게 됩니다.
세상 염려는 정말 잡초와 같이 자라납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잘 자랍니다. 우리는 365일 염려합니다. 잘 먹고 사는데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합니다. 자녀들에 대한 염려도 많습니다. 이 아이가 제대로 학교를 마칠 수 있는가, 결혼을 잘 할 수 있을까, 직장은 잘 잡아 자립을 할 수 있을까 등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염려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하는 염려의 95%는 일어나지 않을 염려들이라고 합니다. 염려의 가시를 뽑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시는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그대로 놔두면 정원이 망가지게 됩니다. 가시는 자생력이 강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뽑아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또한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가시와 같이 우리 마음을 찌릅니다. 재물은 어느 정도 있으면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모으면 모을수록 거기에 모든 힘과 정성을 쏟도록 유혹하고 결국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해서 스승도 팔아버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천국 문의 문고리를 만지다가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욕구가 채워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 행복을 주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점차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싫어하고 나중에는 미워하게 됩니다. 돈이 웬수입니다. 돈돈돈 하다가 돌아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기 위해서 나누어 주는 기쁨을 배워야 합니다. 나눌수록 마음이 부요해 집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 나라에 쌓아야 안전하고 선한 사업에 부해야 합니다.
기타 욕심에는 인정과 칭찬과 쾌락과 권력욕 등이 있습니다. 이런 욕심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합니다. 욕심은 죄의 근원이 되므로 즉시 뽑아야 버려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청년의 정욕에 찔리기 쉽습니다. 정욕으로 인해서 내면이 황폐하게 되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넷째, 좋은 땅. 20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양분을 받아 많은 결실을 맺습니다. 농사를 하는 사람은 씨를 좋은 것으로 사용합니다. 문제는 밭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수확이 달라집니다. 농부는 퇴비를 많이 주어 지력을 회복시킵니다. 산성화되면 석회를 뿌려서 중성화시킵니다. 좋은 밭은 돌과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갈아주고 거름을 줄 때 만들어집니다. 오랜 기간 가꾸어도 열매가 없을 때는 밭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선천적으로 좋은 밭은 없습니다. 누구나 돌덩어리도 있고, 가시도 있고 딱딱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밭은 잘 가꾸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서 결실하는 자입니다. ‘듣고 받는다’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계속적 용법입니다.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힘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는 내립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자라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누가 보나 안 보나 일용할 양식을 먹고 은혜를 받으니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겼습니다.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그런 힘이 매일 깊이 먹는 일용할 양식에서 나옵니다. 또 말씀을 듣고 받는다는 것은 ‘깨닫는다(마13:23)’ 것이요, ‘지키어 인내로’(눅8:15) 결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생활, 인내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적, 외적인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 맺는 비결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할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좋은 밭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밭도 열매 맺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말씀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다릅니다. 30배의 수확은 확실히 좋은 수확입니다. 60배의 수확도 큰 것입니다. 그런데 100배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수확입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6:12에는 기근의 때에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킬 때 내면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외적으로는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낳게 되고, 또 그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또 다른 사람을 낳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면 교회가 성장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많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결실은 씨가 뿌려진 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서 오직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결실하였습니다.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말씀을 지키고자 고통을 감내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냥 놔두면 딱딱해집니다. 굳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땅이 되도록 마음을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즉 회개하고 좋은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뿌리,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깊이 넓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듣고 깨달아서 은혜와 힘과 지혜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지속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보는 지금, 지금 주시는 말씀을 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어 신앙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게 자라고 겉으로 나타나는 환난과 박해를 잘 견디고 때가 되어 열매가 풍성한 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4:1-20
요절 | 마가복음 4:20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 인애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에게 풍성한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상대적으로 듣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흘려버립니다. 반면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듣고 받아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잘 듣고 받아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탁 트인 바닷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말씀을 들으니 마음도 탁 트이고 집중이 잘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무리들이 잘 듣도록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이크도 없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은 성스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가르침의 1/3이 비유입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입니다. 비유는 추상적인 진리를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쉽고 오래 기억되어 묵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유는 그를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리고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3-9).” 먼저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들으라고 요청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생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삼상 15:22).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네 건질 것이 없네 하며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변에 앉아서 풀만 뜯다가 무리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람 한 번 잘 쏘이고 간다 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 아는 비유인데 그들은 비유의 참 뜻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질문을 할 때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겸손하게 배우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더 확실하게 알고자 하기 때문에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죄사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고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혼란스럽던 마음을 정리해줍니다. 어두운 가운데 헤매던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그 빛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이 깨우치신 네 가지 밭의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첫째, 길 가. ‘길 가’는 밭과 밭 사이의 길입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기 때문에 흙이 딱딱해서 씨가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들이 와서 날름 먹어버립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사탄은 뿌려진 말씀을 즉시 와서 빼앗습니다. 사탄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말씀을 빼앗을까요? 무엇보다 회의를 심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이 여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런 방식으로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가 되는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한 고정관념과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 편견으로 그가 하는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도 진화론에 기초한 사회과학이론 등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진화론에 기초한 설명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빼앗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빼앗기면 잠을 자지 못하면서 돈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탄에게 빼앗겨도 원통한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빼앗고자 하는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깨어서 말씀을 받고 붙잡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성경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돌밭. 16,17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에 뿌려진 씨는 금방 싹이 나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뿌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돌밭은 겉은 부드럽지만 속에는 돌들이 박혀 있어서 씨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여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태양 볕으로 말라죽었습니다. 뿌리는 식물이 바로 서도록 돕고, 땅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잘 자라는 나무나 식물의 뿌리를 보면 어떻습니까? 뿌리가 깊이 내리고 옆으로도 쫙 퍼져있습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쳐있어서 물을 빨아올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세계관이 잘 정립이 되면 기초가 튼튼한 집과 같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와 같이 여러 모양의 환난이나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는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은 식물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광합성 작용을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게 되면 더욱 주님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환난과 박해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과일들이나 열매는 맛이 있고 튼튼합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라야 재목으로 귀히 쓰임 받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때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4:3에서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밭을 갈아엎어서 돌을 골라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돌과 같은 교만한 생각, 반항하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말씀이라도 마음에 뿌리를 내리도록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1,2 말씀을 통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도 25년 동안 이 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며 믿고 순종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에서 오는 죄책감으로 심히 괴로워하다가 이신칭의 진리를 발견하고 심령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31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려 은혜와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다양한 사건 속에서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지혜와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소감을 쓰면서 마음에 박힌 돌을 캐내고 뿌리를 내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소감 쓰면서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은 바 은혜를 나누면서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밭.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가시떨기 밭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땅 속에 가시나무의 잔뿌리가 남아 있는 땅입니다. 가시떨기의 밭은 좋은 땅이지만 가시가 같이 자랍니다. 가시떨기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곡식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잡초가 영양분을 빼앗고 가시떨기의 줄기와 잎이 좋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그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이 자라서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다가 쭉정이만 맺게 됩니다. 좋은 영양분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다른 것에 기운을 빼앗기면 성장하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게 됩니다.
세상 염려는 정말 잡초와 같이 자라납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잘 자랍니다. 우리는 365일 염려합니다. 잘 먹고 사는데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합니다. 자녀들에 대한 염려도 많습니다. 이 아이가 제대로 학교를 마칠 수 있는가, 결혼을 잘 할 수 있을까, 직장은 잘 잡아 자립을 할 수 있을까 등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염려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하는 염려의 95%는 일어나지 않을 염려들이라고 합니다. 염려의 가시를 뽑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시는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그대로 놔두면 정원이 망가지게 됩니다. 가시는 자생력이 강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뽑아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또한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가시와 같이 우리 마음을 찌릅니다. 재물은 어느 정도 있으면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모으면 모을수록 거기에 모든 힘과 정성을 쏟도록 유혹하고 결국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해서 스승도 팔아버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천국 문의 문고리를 만지다가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욕구가 채워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 행복을 주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점차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싫어하고 나중에는 미워하게 됩니다. 돈이 웬수입니다. 돈돈돈 하다가 돌아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기 위해서 나누어 주는 기쁨을 배워야 합니다. 나눌수록 마음이 부요해 집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 나라에 쌓아야 안전하고 선한 사업에 부해야 합니다.
기타 욕심에는 인정과 칭찬과 쾌락과 권력욕 등이 있습니다. 이런 욕심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합니다. 욕심은 죄의 근원이 되므로 즉시 뽑아야 버려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청년의 정욕에 찔리기 쉽습니다. 정욕으로 인해서 내면이 황폐하게 되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넷째, 좋은 땅. 20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양분을 받아 많은 결실을 맺습니다. 농사를 하는 사람은 씨를 좋은 것으로 사용합니다. 문제는 밭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수확이 달라집니다. 농부는 퇴비를 많이 주어 지력을 회복시킵니다. 산성화되면 석회를 뿌려서 중성화시킵니다. 좋은 밭은 돌과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갈아주고 거름을 줄 때 만들어집니다. 오랜 기간 가꾸어도 열매가 없을 때는 밭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선천적으로 좋은 밭은 없습니다. 누구나 돌덩어리도 있고, 가시도 있고 딱딱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밭은 잘 가꾸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서 결실하는 자입니다. ‘듣고 받는다’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계속적 용법입니다.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힘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는 내립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자라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누가 보나 안 보나 일용할 양식을 먹고 은혜를 받으니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겼습니다.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그런 힘이 매일 깊이 먹는 일용할 양식에서 나옵니다. 또 말씀을 듣고 받는다는 것은 ‘깨닫는다(마13:23)’ 것이요, ‘지키어 인내로’(눅8:15) 결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생활, 인내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적, 외적인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 맺는 비결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할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좋은 밭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밭도 열매 맺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말씀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다릅니다. 30배의 수확은 확실히 좋은 수확입니다. 60배의 수확도 큰 것입니다. 그런데 100배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수확입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6:12에는 기근의 때에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킬 때 내면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외적으로는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낳게 되고, 또 그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또 다른 사람을 낳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면 교회가 성장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많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결실은 씨가 뿌려진 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서 오직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결실하였습니다.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말씀을 지키고자 고통을 감내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냥 놔두면 딱딱해집니다. 굳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땅이 되도록 마음을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즉 회개하고 좋은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뿌리,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깊이 넓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듣고 깨달아서 은혜와 힘과 지혜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지속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보는 지금, 지금 주시는 말씀을 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어 신앙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게 자라고 겉으로 나타나는 환난과 박해를 잘 견디고 때가 되어 열매가 풍성한 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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