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5강(2:18-3:6) 어느 것이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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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5 강
말씀 | 마가복음 2:18-3:6
요절 | 마가복음 3:4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내용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에 이어 금식 문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다가 굳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율법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해 지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을 살리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금식에 대한 논쟁(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느라 엄숙하고 초췌했습니다. 금식은 본래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하였습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죄를 깨닫고 돌이키고자 금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즉 일 년에 104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의 얼굴은 늘 금식으로 인해 어둡고 심각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활기가 넘치고 때로 잔치라도 할라치면 기쁘고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이 두 공동체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9,20).” 예수님은 신랑이고 회개한 죄인들은 신부입니다. 혼인집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아들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고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게 된 그는 무거운 죄에서 풀려 자유롭게 되었으니 고삐 풀린 송아지와 같이 기뻐 뜁니다. 문둥병으로 외롭고 비참한 삶을 살던 사람도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받고 나병에서 나음을 받자 기쁨으로 인해서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네방네 다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나누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게 되면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 형을 받아 죽게 되는 날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 그들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없으면 형식화되고 굳어버리기 쉽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예수님과의 교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감동이고 헌신하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죄를 끊어야 합니다. 이사야 58:6,7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할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18).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와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논쟁을 하다가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새 것이 낡은 것을 당기어 쉽게 찢어집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와 함께 낡은 가죽부대가 수축을 하지 못해서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주와 부대를 둘 다 버리게 됩니다. 보통 가죽부대는 염소가죽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고 낡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합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율법과 낡은 장로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좋은 전통은 보존해야 합니다. 그 전통이 지금도 잘 통한다면 굳이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좋은 전통을 3천년 이상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들과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새롭게 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겸손하게 배우면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도울 때는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 삭개오를 도울 때는 그가 뽕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우러러 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형편에 맞게 말씀하시며 공감하시고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도 다 다릅니다. 자녀들도 다 다릅니다.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수준에 맞게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자기 몸에 배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됩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기본기를 꾸준히 연습할 때 신기에 가까운 동작들이 시합을 할 때 나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기본기가 약하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실력이 늘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공동체든 튼튼하고 건강하고 오래 가려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공동체나 개인은 기본이 튼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배우며 가르치는 일에 힘을 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기본정신인 동시에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젊고 순수하여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부대와 같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고 그들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세계 만민을 제자 삼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늘 새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23-28).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심방을 하시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섬기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알곡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바리새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39개의 규례를 만들어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안식일에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차를 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거울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거울을 보면 새치를 뽑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눈에 제자들은 지금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한 것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장로들이 만든 안식일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안식일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대가 전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카비 전쟁 때에 이런 전통을 깨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앰블런스나 119 구급차는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달릴 때가 있습니다.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법에서도 예외조항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법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면 형식에서 자유롭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알 때 힘이 있고 권위가 생깁니다.
27, 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쉼을 가짐으로 다음 한 주를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사람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세우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최종적 해석의 권한을 가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이루고, 이로 인해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신앙생활에는 형식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무질서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삶의 참된 회복을 위해서 그날을 다른 날과 구별해야 합니다. 이 날에 참된 쉼과 회복을 경험할 때 나머지 6일을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날은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다른 사람을 예배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죄의 얽매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참 쉼과 생명을 회복하는 역사가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느 것이 옳으냐(3:1-6). 예수님께서 다른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한 손이 마른 사람은 이로 인해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쪽 손으로 일을 해야 하니 타자를 쳐도 한 손으로 쳐야 했습니다. 그는 오른 손이 말랐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악수를 하는 것도 매우 어색했습니다. 그는 여름에도 손에 장갑을 끼고 살았습니다. 아니면 주머니에 늘 한 손을 넣고 다녔습니다. 그의 마음도 많이 병들었습니다. 열등감, 자학, 강박관념으로 내면이 마르고 감정도 마르고 삶의 의욕도 말라버렸습니다. 그는 힘든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자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를 아시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날 그를 고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문제를 공론화시켰습니다. 이를 통해서 한 손 마른 사람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사실 이는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쉬운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여 죽일까 의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원수처럼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위해서는 연합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한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일을 하루 미룬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되거나 죽이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를 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어떤 치료 행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말씀만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권위를 보고 순종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 양성의 방향을 정하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지만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과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옳은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의 행동은 안식일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 안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이 회복됨으로 그가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기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압력도 예수님의 옳은 행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은 운명적인 생각과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행동과 인생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마음껏 일을 양 손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질에 충실할 때 생명이 풍성하게 되고 생명이 오래 갑니다. 또 그런 모임이나 공동체는 견고해 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궁극적인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병들고 상처 받은 사람을 치료하고 온전히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할 때 이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른 손이 있습니까? 사랑의 손이 마르고, 희생의 손이 마르고, 섬김의 손이 말라 버리지 않았습니까? 죄의식으로 인해 내면이 말라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어 놓을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서로 고백하는 것은 죄 사함과 함께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나만 이런 문제로 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 속에서 무엇이 옳은가 생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자존심을 비우고 옳은 것, 적절한 것, 가능한 것을 찾아 행하는 가운데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2:18-3:6
요절 | 마가복음 3:4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내용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에 이어 금식 문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다가 굳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율법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해 지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을 살리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금식에 대한 논쟁(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느라 엄숙하고 초췌했습니다. 금식은 본래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하였습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죄를 깨닫고 돌이키고자 금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즉 일 년에 104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의 얼굴은 늘 금식으로 인해 어둡고 심각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활기가 넘치고 때로 잔치라도 할라치면 기쁘고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이 두 공동체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9,20).” 예수님은 신랑이고 회개한 죄인들은 신부입니다. 혼인집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아들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고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게 된 그는 무거운 죄에서 풀려 자유롭게 되었으니 고삐 풀린 송아지와 같이 기뻐 뜁니다. 문둥병으로 외롭고 비참한 삶을 살던 사람도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받고 나병에서 나음을 받자 기쁨으로 인해서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네방네 다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나누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게 되면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 형을 받아 죽게 되는 날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 그들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없으면 형식화되고 굳어버리기 쉽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예수님과의 교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감동이고 헌신하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죄를 끊어야 합니다. 이사야 58:6,7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할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18).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와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논쟁을 하다가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새 것이 낡은 것을 당기어 쉽게 찢어집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와 함께 낡은 가죽부대가 수축을 하지 못해서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주와 부대를 둘 다 버리게 됩니다. 보통 가죽부대는 염소가죽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고 낡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합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율법과 낡은 장로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좋은 전통은 보존해야 합니다. 그 전통이 지금도 잘 통한다면 굳이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좋은 전통을 3천년 이상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들과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새롭게 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겸손하게 배우면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도울 때는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 삭개오를 도울 때는 그가 뽕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우러러 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형편에 맞게 말씀하시며 공감하시고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도 다 다릅니다. 자녀들도 다 다릅니다.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수준에 맞게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자기 몸에 배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됩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기본기를 꾸준히 연습할 때 신기에 가까운 동작들이 시합을 할 때 나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기본기가 약하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실력이 늘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공동체든 튼튼하고 건강하고 오래 가려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공동체나 개인은 기본이 튼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배우며 가르치는 일에 힘을 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기본정신인 동시에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젊고 순수하여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부대와 같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고 그들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세계 만민을 제자 삼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늘 새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23-28).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심방을 하시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섬기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알곡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바리새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39개의 규례를 만들어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안식일에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차를 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거울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거울을 보면 새치를 뽑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눈에 제자들은 지금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한 것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장로들이 만든 안식일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안식일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대가 전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카비 전쟁 때에 이런 전통을 깨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앰블런스나 119 구급차는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달릴 때가 있습니다.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법에서도 예외조항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법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면 형식에서 자유롭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알 때 힘이 있고 권위가 생깁니다.
27, 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쉼을 가짐으로 다음 한 주를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사람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세우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최종적 해석의 권한을 가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이루고, 이로 인해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신앙생활에는 형식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무질서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삶의 참된 회복을 위해서 그날을 다른 날과 구별해야 합니다. 이 날에 참된 쉼과 회복을 경험할 때 나머지 6일을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날은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다른 사람을 예배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죄의 얽매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참 쉼과 생명을 회복하는 역사가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느 것이 옳으냐(3:1-6). 예수님께서 다른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한 손이 마른 사람은 이로 인해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쪽 손으로 일을 해야 하니 타자를 쳐도 한 손으로 쳐야 했습니다. 그는 오른 손이 말랐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악수를 하는 것도 매우 어색했습니다. 그는 여름에도 손에 장갑을 끼고 살았습니다. 아니면 주머니에 늘 한 손을 넣고 다녔습니다. 그의 마음도 많이 병들었습니다. 열등감, 자학, 강박관념으로 내면이 마르고 감정도 마르고 삶의 의욕도 말라버렸습니다. 그는 힘든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자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를 아시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날 그를 고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문제를 공론화시켰습니다. 이를 통해서 한 손 마른 사람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사실 이는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쉬운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여 죽일까 의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원수처럼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위해서는 연합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한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일을 하루 미룬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되거나 죽이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권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를 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어떤 치료 행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말씀만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권위를 보고 순종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 양성의 방향을 정하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지만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과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옳은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의 행동은 안식일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 안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이 회복됨으로 그가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기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압력도 예수님의 옳은 행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은 운명적인 생각과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행동과 인생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마음껏 일을 양 손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질에 충실할 때 생명이 풍성하게 되고 생명이 오래 갑니다. 또 그런 모임이나 공동체는 견고해 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궁극적인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병들고 상처 받은 사람을 치료하고 온전히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할 때 이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른 손이 있습니까? 사랑의 손이 마르고, 희생의 손이 마르고, 섬김의 손이 말라 버리지 않았습니까? 죄의식으로 인해 내면이 말라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어 놓을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서로 고백하는 것은 죄 사함과 함께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나만 이런 문제로 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 속에서 무엇이 옳은가 생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자존심을 비우고 옳은 것, 적절한 것, 가능한 것을 찾아 행하는 가운데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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