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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8 막4강(2: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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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2회 작성일 18-04-14 10:14

본문

201 마가복음 제 4 강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부활절 말씀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지난 번에 이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비참해지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함을 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죄를 어떻게 사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선한 말씀과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멀리까지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한적한 곳에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아왔습니다. 한적한 곳이건 동네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로 인해서 조용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 고침도 받고 각자의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을 이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는 사람이 가야 할 길,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리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에서 해방되어 부요해지고, 질병에서 나음을 받아 건강해지고,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도를 듣고 있을 때에 그곳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먹고 만족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달았고 살맛이 났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더욱 파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중풍병은 대개 뇌의 혈관이 막혀서 전신이 마비되거나 부분적인 마비로 고생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먹고 입고 용변을 보는 기본적인 일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이 중풍병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에게만 간다면 중풍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고자 했지만 무리들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장애가 생기면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날이 있다 하면서 뒤로 미루기를 잘합니다. 중풍병자들은 대개 사람들이 많아서 할 수 없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습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는 극복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창조적인 파괴를 했습니다. 율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개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고 갇혀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틀을 깨고 기발하게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일반 가정집은 1층 평지붕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지붕은 바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대개 지붕은 작업장이나 취침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조가 상당히 견고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어내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낸다는 것은 손해를 끼치는 일이기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집 주인이 이런 행동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우 소란스러웠고 지붕에서 흙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곡괭이와 해머와 톱을 사용해서 지붕을 뚫었습니다. 침상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셨습니다. 드디어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볼 때 기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판단을 할 때에는 여러 기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기초해서 판단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축복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면의 믿음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믿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가다가 수장이 되었습니다. 양들을 섬기는 일, 복음 역사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역사를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믿음과 기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5:34,36; 9:23,24; 10:52)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을 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6:5,6).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믿음은 ‘그들’ 곧 그의 네 친구들의 믿음과 중풍병자의 믿음,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믿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믿음이 한 사람의 죄 사함 또는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9:17-27)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NIV 영어 성경에서는 “Son, your sins are forgiven.”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작은 자, 아들은 사랑스런 존재입니다. 자녀를 도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지붕을 뚫고 말씀을 전하는 분위기를 어지럽혀서 정죄의식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르심으로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죄는 그를 무기력한 중풍병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죄의 짐이 그를 눌러 육신까지도 병들게 만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을 병들게 하고 마음이 병들면 말과 행동까지도 온전하지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부담을 줍니다. 물론 이 사람의 문제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모든 병자가 다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사탄의 시험 때문에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의인도 병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아온 그에게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죄가 병보다 더 중하다고 보십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중한 병부터 치료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킵니다. 죄로 인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도 갈라놓습니다.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고 떳떳하지가 않습니다. 죄는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 관계성의 파괴, 자기 합리화, 도피 심리, 정죄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유발합니다. 죄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이를 감추고 무덤에 까지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 고통이 심할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배반입니다. 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과녁을 벗어났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뜻을 가진 원어 하마르티아인데 동기보다 나타난 행위가 문제가 되는 범죄입니다. 불의가 있는데 이는 동기와 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뜻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서 죄를 지은 내용이 나옵니다. 인간의 죄는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근본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마음과 몸이 가벼워집니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죄의 용서는 곧 병의 치유를 수반하게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죄 사함 없이 육체적인 질병만 치료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병이 나음을 받고 더욱 죄를 짓고 이전보다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탐욕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로또에 당첨이 되고 나서 대부분이 비참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근본 문제가 죄임을 아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자신이 신적인 권위를 가졌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신성모독은 사형을 당할 만한 범죄입니다(레24:10-16).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는 구원의 반석이 될 수 있고, 심판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입 밖으로 비난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는 분이십니다(히4:13). 우리는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알고 삼가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행동과 습관을 바꾸기 전에 생각이 먼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생각을 곧 중심에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실 둘 다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죄 문제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졌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본다면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가 떠나간다, 용서 받는다, 부채, 처벌을 면제해 준다는 뜻입니다. 죄사함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구원의 행동에 기초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용서는 종말론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되고 전체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이 땅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확신있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헌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죄책감 때문에 자학을 많이 했습니다. 죄악 된 생각을 해도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을 때마다 스승인 쉬타우피치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했습니다. 작은 죄 문제로 괴로워해서 계속해서 와서 토로를 하자 나중에는 쉬타우피치가 차라리 가서 큰 죄를 짓고 와서 괴로움을 토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왜 항상 심판의 하나님만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이시다. 진정한 회개란 징벌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시작된다.”라고 권면해주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1: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할 때 그는 자신의 피로 세운 언약대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대속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지은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중풍병자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죄 사함을 받고 일어나서 개척하고 도전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분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예를 세리 레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가난과 로마의 압제 아래 꿈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리고시를 치루고 대학 재학 중에 합격하였습니다. 그가 세무 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일했을 때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승진과 함께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럽지 않은 집을 사고 마차를 굴리고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그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공인된 죄인이요, 로마의 개요, 매국노라는 말을 들을 때 내가 이렇게 살려고 세리가 되었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물질적인 성취를 한 다음에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 자기와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인가, 또 자식들도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 갈 것을 생각하니 장래의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우리가 도무지 보지 못한 일을 행하시고 들어보지 못한 선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의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영지와 빌립의 영지 사이의 국경 마을로서 큰 세관이 있었고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큰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지나가시다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까지도 보고 계셨습니다. 허무하고 사는 게 지루하고 불안하고 목마름을 채우고자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 찌든 죄의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은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자학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흑암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두운 면도 보셨지만 가능성도 보셨습니다. 그의 냉철한 사고와 조직력을 보셨습니다. 진리와 의에 대한 목마름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돈을 쫓던 데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초청입니다. 따르라는 말씀이 원어에는 대문자로 되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가운데 성 마태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돈 냄새를 맡고 따르던 삶에서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즉시 따른 것을 볼 때 그의 결단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감사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세리 친구들과 각종 죄인들을 초청하여 송별회 겸 제자 입소식을 하였습니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잔치에 두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내용있게 치루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방지하고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죄인들과 교제를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습니다. 병든 자도 치료만 받으면 건강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도 그 죄만 깨끗이 사함을 받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죄인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죄인에게서 죄악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러나 죄인이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면 그에게서 의롭고 선한 행동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각종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픈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품고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각종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리 레위는 죄 사함을 받고 성마태가 되어 마태복음을 저술하였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도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무기력한 죄인이라면 세리는 활동적인 죄인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걸으며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며 죄 사함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만이 아는 죄, 무덤 까지 가지고 가려던 죄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죄 사함을 받아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전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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