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17강(9:1-29)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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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17 강 (여름수양회 강의)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 마가복음 9:1-29
요절: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입니다. 다함께 요절 말씀인 9장 23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말씀에서는 심각한 아들 문제 앞에서 믿음이 약해진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반신반의하는 아이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르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야, 이 세상에 안되는 것이 어딨어? 지지고 볶고 하면 다 돼!’ 어떤 사람이든 불가능을 모르는 인생, 무엇이든지 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와 내가 가지고 있는 절실하고 심각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시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히 하지 못할일이 없으신 예수님을 배우고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시고자 하십니다. 8장에서 말씀하신 충격적인 메시야의 길과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이야기는 제자들의 부푼 기대를 한풀 꺾이게 하였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기적으로는 세 제자들이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게 될 사건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풀이 죽어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그들이 맛보게 될 승리와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절, 3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제껏 제자들은 예수님의 허름하고 초라한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이제는 영광을 좀 받으시려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이야기 하시니 도저히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눈앞에 펼쳐진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어떻게 다가왔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심으로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길 원하셨습니다.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기를 원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된 이들의 대화 내용은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의 등장은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대를 섬긴 모세와 엘리야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십자가에서 고초를 당하실 예수님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예수님 옆에 고난의 종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에게도 큰 소망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지라도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 제자들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뜬 나머지 황당한 제안을 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하나’ 속으로 속삭였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문제가 없고, 고민이 없고, 영광과 평안이 있는곳 그냥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베드로는 십자가 고난 없는 영광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이때 마침 정신 차리라는 듯이 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위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리스도관, 십자가 고난 후에 부활 영광에 이르실 메시야의 길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목자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학생 목자님들은 어떠신가요? 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나의 그리스도 관은 어떠한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고 싶지만 참 삶이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같은 연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때 지긋지긋한 세상을 등지고 베드로처럼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초막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 영광에 대해 여러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 제대로된 그리스도관이 자리 잡지 못할 때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성경선생들이었던 서기관들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싹빼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관한 구절들만 뽑아서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축복과 은혜의 말씀은 반복해서 듣고 또 듣지만, 고난과 희생의 말씀은 넘겨버립니다. 은혜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영광에 불과합니다. 초막은 세상의 일시적인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없을 때, 나의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문제 앞에 설 때, ‘도대체 나에게 뭘해주셨어요?, 계시기는 하는거예요?’ 소리쳐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다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 복음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들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시간 내가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고난 후에 올 부활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의 길, 목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보니 다른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린 아들을 데려왔는데 부탁을 받은 제자들이 능히 고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전도여행에서 귀신을 내쫓은 경험이 있는 제자들은 ‘훗’ 자신만만하게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냐?’ 한 영화의 제목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네 마네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논란을 뒤로 하고 아들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8절, 22절을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사로잡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아들은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귀신이 그를 붙잡으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집어 던졌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괴성을 지르고 고꾸라지고 파괴적인 귀신에 의해 물불에 몸을 던질 때, “얘야 왜그러니?” 무엇으로도 아들을 도울 수 없는 무력감에 피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제자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돕지도 못하고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은 “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한탄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지식만 내세웠습니다. 제자들도 과거의 경험만 의지했지, 현재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들린 아들의 고통에 큰 슬픔에 빠졌고 운명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또 어떻습니까? 시대 상황을 바라보고 깊은 좌절과 불신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믿음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를 보고, 아이로 하여금 더 큰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땅에 엎드려져 구르며 거품을 질질 흘렸습니다. 이 광경에 사람들은 ‘어머어머 죽은거 아냐?’ 수군대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절히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22절을 후반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혹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고쳐 주시고 능력이 없으면 하는 수 없죠”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리는 반신반의의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제자들도 실패하였는데 예수님이라고 별 수 있겠나”하는 체념과 불신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씀 하십니까? 2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 반신반의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먼저 “할 수 있거든이 그게 무슨 말이냐?”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자신이 능히 할 수 없다면, 그의 문제를 도울 수 없다면, 누가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는 책망을 통해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이 아버지로부터 알게 하십니다. 다음에 믿음을 갖도록 확신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홍해 바다를 가를 때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실때나, 폭풍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때나 죽은자를 살아나게 하실때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시고 오늘날 나의 삶 가운데도 그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음이 없습니다. 그 능력을 제한시키고 슬프시게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현재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최면 자기합리화하며 ‘그래 이건 이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어’ 자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은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로 아는데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경험하고도 4000명을 먹이실 때 어떠했습니까? 어디서 이들을 먹일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전과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도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하실 수 있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한계적인 눈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믿음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과 형편이 달라지면 마치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달라지는 것처럼 여기고, 믿음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가난하면 부자가 되야하고 병이 있으면 나아야 합니까?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아이 아버지를 도우실 때 귀신을 먼저 쫒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세상성공과 성취, 문제 해결에 focus를 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 자체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하심으로 자신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로 표현한 괴로운 지병을 앓으면서도 이 문제로 하여금 자신이 겸손하여 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통로가 되게 하셨음을 기뻐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돌맞아 죽게 된 순간에도 그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때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감옥 앞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을뻔한 곳으로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어떤 불가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세계의 중심인 로마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닫기 까지는 때로는 많은 인내와 고통을 수반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떻게 얻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까지 응답을 받기까지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로소 100세때 아들을 얻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된 그때에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아내의 물리적인 나이가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이 힘든 고난 가운데 거할지라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4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능력을 제한했던 불신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내가 믿나이다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불신과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과 믿음이 없음을 도와달라는 진실된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사랑스럽게 정상인이 된 아들을 본 아버지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깜짝 놀라 조용히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이 기도 하지 않았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에게 기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하는 마음속 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능히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기도로부터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역사하시도록 길을 터주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끝임없는 염려와 불평 불만으로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게 합니다. 될 수 있으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력은 기도가 아니면 능히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학업이 바쁘고 자기일로 바쁘고 먹고 사는일이 바쁘고 가정이 바쁘고 자녀교육에 바쁘고 얼마나 바쁘십니까?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랍니다. 바쁘게 이것저것 하다보면 정작 기도는 어쩌다 생각날 때 하는 일이 되버릴 때가 많습니다. 겨우 겨우 자신의 갈급한 문제, 가족들 위해서만 ‘도와주세요, 은혜주세요’ 외칩니다. 어느새 캠퍼스 영혼들을 위한 기도, 교회 동역자들에 대한 기도도 사라지고 관심도 사라집니다. 바쁜일상에 찌들어 딱딱한 얼굴을 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더 이상 한 영혼을 돕고 살리는 것이 나의 삶의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병들었습니다. 시청에서는 퀴어 축제를 하고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을 화두로 서로 비난하고 여혐, 남혐 문제가 심각합니다. 순간을 즐기고자 하는 쾌락주의가 만연합니다. 이 시대도 희망이 없고 나도 힘들어서 도저히 캠퍼스 영혼들을 도울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세상물정 모르고 영혼 구원만 외치는 순진한 삶을 살것이 아니라 정신 바싹 차리고 챙길 것은 챙겨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양한 재테크 방법과 주식얘기, 죽었다가 다시 상종가를 치고 있는 비트코인 얘기가 들립니다. 어떻게 하면 노른자땅 건물주가 되어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수군수군합니다. 이때 내가 뭐하는 짓인가? 회의합니다. 어떤 분들은 고질적인 운명주의 인생문제로 기도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긴 하는가 나에게 과연 믿음이 있는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물질문제, 건강문제를 바라볼 때 ‘이 문제는 기도해도 안되나 보다’ ‘이건 기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야’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을 지라도 아이 아버지와 같이 울부짖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온전치 않은 자신의 믿음을 있는그대로 인정하고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구해야합니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 없음을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갈급한 문제, 양들과 동역자들의 간절한 문제, 캠퍼스 역사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지난날을 돌아볼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죽을뻔 하다가 살아났습니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신장 하나를 잃었습니다. 머리 깨지고 팔뿌러지고 쇄골이 뿌러지고 젊은 나이에 노숙자만 걸린다는 간농양으로 입원도 하였습니다. 뼈밖에 없었던 저를 살리시고 이제는 배가 불룩 나왔지만 온전히 회복되어 ubf 목자로 살게 하신것은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정교회를 이루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얼마전까지 기도하지 않으면 피가 말리는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데 복잡했던 상황이 정리가 되고 아름다운 동역자와 아이까지 허락해 주시니 기도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고 하실 수 있나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빈깡통이 되었습니다. 삶에 도전과 비젼이 없고 그냥 흘러가는데로 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휴일없이 밤낮 일하시는 교수님의 패턴을 쫓아 열심히 충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있어서도 이건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계적으로 생각하기를 잘하였습니다. 몇 번을 해도 분명한 과학적인 이유에 의해 재현이 되어야 하고 한번 성공했다고 되는게 아니잖아 하였습니다. 이런류는 기도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체념하였습니다. 동역은 참 쉽지가 않고 나의 영적인 상태는 바닥이었습니다. 매일 밤늦게까지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것이 고달팠습니다. 두어깨는 무겁고 삶은 메마르고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나목자의 자궁경부에 근종이 있어 자연분만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혈액검사 결과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서 암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최근에는 초음파검사를 통해 아이에게 심방과 심실 사이에 구멍이 있는 심실중격결손이라는 심장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본문의 아이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제출했던 nature 자매지에서 거절 통보가 왔습니다. 꿇어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마침 신기하게도 준비해야할 수양회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이 애통한 회개의 심정을 주셨습니다. “하실 수 있으시면 하시고 하실 수 없으시면 어쩔 수 없죠 뭐” “세상사는 것이 어디 기도로만 되나요?” 기도하면서도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불신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외쳤습니다. 이때 거짓말처럼 한주한주 지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한나목자와 아이의 심장 문제가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게 하셨습니다. 태아보험도 가입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태아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절받은 논문도 3가지 방법의 각각 다른 실험을 통해 지적받았던 문제들에 대한 백업 데이터들을 다 얻었습니다. 하나같이 어려운 실험이었는데 결과가 너무 잘 나왔습니다. 현재 다시 심사하는 과정에 있는데 논문의 내용이 너무 빵빵해져서 떨어져도 더 좋은 논문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할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임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목자님들 한분 한분 귀한가 알게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현실 가운데서 엄청난 고군분투를 하고 계신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모습이 아름답고 모임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배웠습니다. 할수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일이 없느니라 하신 능력의 말씀을 깊이 마음판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장래 문제 뿐만 아니라 홍대 복음 역사 가운데도 언제나 일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을 믿고 간절히 기도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결론적으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삶가운데서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 마가복음 9:1-29
요절: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입니다. 다함께 요절 말씀인 9장 23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말씀에서는 심각한 아들 문제 앞에서 믿음이 약해진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반신반의하는 아이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르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야, 이 세상에 안되는 것이 어딨어? 지지고 볶고 하면 다 돼!’ 어떤 사람이든 불가능을 모르는 인생, 무엇이든지 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와 내가 가지고 있는 절실하고 심각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시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히 하지 못할일이 없으신 예수님을 배우고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시고자 하십니다. 8장에서 말씀하신 충격적인 메시야의 길과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이야기는 제자들의 부푼 기대를 한풀 꺾이게 하였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기적으로는 세 제자들이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게 될 사건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풀이 죽어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그들이 맛보게 될 승리와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절, 3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제껏 제자들은 예수님의 허름하고 초라한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이제는 영광을 좀 받으시려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이야기 하시니 도저히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눈앞에 펼쳐진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어떻게 다가왔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심으로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길 원하셨습니다.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기를 원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된 이들의 대화 내용은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의 등장은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대를 섬긴 모세와 엘리야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십자가에서 고초를 당하실 예수님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예수님 옆에 고난의 종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에게도 큰 소망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지라도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 제자들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뜬 나머지 황당한 제안을 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하나’ 속으로 속삭였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문제가 없고, 고민이 없고, 영광과 평안이 있는곳 그냥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베드로는 십자가 고난 없는 영광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이때 마침 정신 차리라는 듯이 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위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리스도관, 십자가 고난 후에 부활 영광에 이르실 메시야의 길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목자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학생 목자님들은 어떠신가요? 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나의 그리스도 관은 어떠한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고 싶지만 참 삶이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같은 연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때 지긋지긋한 세상을 등지고 베드로처럼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초막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 영광에 대해 여러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 제대로된 그리스도관이 자리 잡지 못할 때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성경선생들이었던 서기관들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싹빼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관한 구절들만 뽑아서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축복과 은혜의 말씀은 반복해서 듣고 또 듣지만, 고난과 희생의 말씀은 넘겨버립니다. 은혜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영광에 불과합니다. 초막은 세상의 일시적인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없을 때, 나의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문제 앞에 설 때, ‘도대체 나에게 뭘해주셨어요?, 계시기는 하는거예요?’ 소리쳐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다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 복음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들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시간 내가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고난 후에 올 부활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의 길, 목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보니 다른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린 아들을 데려왔는데 부탁을 받은 제자들이 능히 고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전도여행에서 귀신을 내쫓은 경험이 있는 제자들은 ‘훗’ 자신만만하게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냐?’ 한 영화의 제목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네 마네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논란을 뒤로 하고 아들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8절, 22절을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사로잡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아들은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귀신이 그를 붙잡으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집어 던졌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괴성을 지르고 고꾸라지고 파괴적인 귀신에 의해 물불에 몸을 던질 때, “얘야 왜그러니?” 무엇으로도 아들을 도울 수 없는 무력감에 피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제자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돕지도 못하고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은 “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한탄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지식만 내세웠습니다. 제자들도 과거의 경험만 의지했지, 현재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들린 아들의 고통에 큰 슬픔에 빠졌고 운명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또 어떻습니까? 시대 상황을 바라보고 깊은 좌절과 불신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믿음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를 보고, 아이로 하여금 더 큰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땅에 엎드려져 구르며 거품을 질질 흘렸습니다. 이 광경에 사람들은 ‘어머어머 죽은거 아냐?’ 수군대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절히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22절을 후반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혹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고쳐 주시고 능력이 없으면 하는 수 없죠”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리는 반신반의의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제자들도 실패하였는데 예수님이라고 별 수 있겠나”하는 체념과 불신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씀 하십니까? 2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 반신반의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먼저 “할 수 있거든이 그게 무슨 말이냐?”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자신이 능히 할 수 없다면, 그의 문제를 도울 수 없다면, 누가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는 책망을 통해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이 아버지로부터 알게 하십니다. 다음에 믿음을 갖도록 확신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홍해 바다를 가를 때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실때나, 폭풍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때나 죽은자를 살아나게 하실때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시고 오늘날 나의 삶 가운데도 그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음이 없습니다. 그 능력을 제한시키고 슬프시게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현재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최면 자기합리화하며 ‘그래 이건 이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어’ 자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은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로 아는데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경험하고도 4000명을 먹이실 때 어떠했습니까? 어디서 이들을 먹일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전과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도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하실 수 있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한계적인 눈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믿음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과 형편이 달라지면 마치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달라지는 것처럼 여기고, 믿음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가난하면 부자가 되야하고 병이 있으면 나아야 합니까?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아이 아버지를 도우실 때 귀신을 먼저 쫒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세상성공과 성취, 문제 해결에 focus를 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 자체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하심으로 자신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로 표현한 괴로운 지병을 앓으면서도 이 문제로 하여금 자신이 겸손하여 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통로가 되게 하셨음을 기뻐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돌맞아 죽게 된 순간에도 그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때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감옥 앞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을뻔한 곳으로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어떤 불가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세계의 중심인 로마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닫기 까지는 때로는 많은 인내와 고통을 수반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떻게 얻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까지 응답을 받기까지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로소 100세때 아들을 얻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된 그때에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아내의 물리적인 나이가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이 힘든 고난 가운데 거할지라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4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능력을 제한했던 불신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내가 믿나이다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불신과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과 믿음이 없음을 도와달라는 진실된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사랑스럽게 정상인이 된 아들을 본 아버지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깜짝 놀라 조용히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이 기도 하지 않았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에게 기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하는 마음속 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능히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기도로부터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역사하시도록 길을 터주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끝임없는 염려와 불평 불만으로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게 합니다. 될 수 있으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력은 기도가 아니면 능히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학업이 바쁘고 자기일로 바쁘고 먹고 사는일이 바쁘고 가정이 바쁘고 자녀교육에 바쁘고 얼마나 바쁘십니까?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랍니다. 바쁘게 이것저것 하다보면 정작 기도는 어쩌다 생각날 때 하는 일이 되버릴 때가 많습니다. 겨우 겨우 자신의 갈급한 문제, 가족들 위해서만 ‘도와주세요, 은혜주세요’ 외칩니다. 어느새 캠퍼스 영혼들을 위한 기도, 교회 동역자들에 대한 기도도 사라지고 관심도 사라집니다. 바쁜일상에 찌들어 딱딱한 얼굴을 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더 이상 한 영혼을 돕고 살리는 것이 나의 삶의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병들었습니다. 시청에서는 퀴어 축제를 하고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을 화두로 서로 비난하고 여혐, 남혐 문제가 심각합니다. 순간을 즐기고자 하는 쾌락주의가 만연합니다. 이 시대도 희망이 없고 나도 힘들어서 도저히 캠퍼스 영혼들을 도울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세상물정 모르고 영혼 구원만 외치는 순진한 삶을 살것이 아니라 정신 바싹 차리고 챙길 것은 챙겨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양한 재테크 방법과 주식얘기, 죽었다가 다시 상종가를 치고 있는 비트코인 얘기가 들립니다. 어떻게 하면 노른자땅 건물주가 되어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수군수군합니다. 이때 내가 뭐하는 짓인가? 회의합니다. 어떤 분들은 고질적인 운명주의 인생문제로 기도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긴 하는가 나에게 과연 믿음이 있는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물질문제, 건강문제를 바라볼 때 ‘이 문제는 기도해도 안되나 보다’ ‘이건 기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야’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을 지라도 아이 아버지와 같이 울부짖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온전치 않은 자신의 믿음을 있는그대로 인정하고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구해야합니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 없음을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갈급한 문제, 양들과 동역자들의 간절한 문제, 캠퍼스 역사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지난날을 돌아볼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죽을뻔 하다가 살아났습니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신장 하나를 잃었습니다. 머리 깨지고 팔뿌러지고 쇄골이 뿌러지고 젊은 나이에 노숙자만 걸린다는 간농양으로 입원도 하였습니다. 뼈밖에 없었던 저를 살리시고 이제는 배가 불룩 나왔지만 온전히 회복되어 ubf 목자로 살게 하신것은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정교회를 이루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얼마전까지 기도하지 않으면 피가 말리는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데 복잡했던 상황이 정리가 되고 아름다운 동역자와 아이까지 허락해 주시니 기도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고 하실 수 있나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빈깡통이 되었습니다. 삶에 도전과 비젼이 없고 그냥 흘러가는데로 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휴일없이 밤낮 일하시는 교수님의 패턴을 쫓아 열심히 충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있어서도 이건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계적으로 생각하기를 잘하였습니다. 몇 번을 해도 분명한 과학적인 이유에 의해 재현이 되어야 하고 한번 성공했다고 되는게 아니잖아 하였습니다. 이런류는 기도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체념하였습니다. 동역은 참 쉽지가 않고 나의 영적인 상태는 바닥이었습니다. 매일 밤늦게까지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것이 고달팠습니다. 두어깨는 무겁고 삶은 메마르고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나목자의 자궁경부에 근종이 있어 자연분만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혈액검사 결과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서 암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최근에는 초음파검사를 통해 아이에게 심방과 심실 사이에 구멍이 있는 심실중격결손이라는 심장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본문의 아이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제출했던 nature 자매지에서 거절 통보가 왔습니다. 꿇어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마침 신기하게도 준비해야할 수양회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이 애통한 회개의 심정을 주셨습니다. “하실 수 있으시면 하시고 하실 수 없으시면 어쩔 수 없죠 뭐” “세상사는 것이 어디 기도로만 되나요?” 기도하면서도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불신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외쳤습니다. 이때 거짓말처럼 한주한주 지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한나목자와 아이의 심장 문제가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게 하셨습니다. 태아보험도 가입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태아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절받은 논문도 3가지 방법의 각각 다른 실험을 통해 지적받았던 문제들에 대한 백업 데이터들을 다 얻었습니다. 하나같이 어려운 실험이었는데 결과가 너무 잘 나왔습니다. 현재 다시 심사하는 과정에 있는데 논문의 내용이 너무 빵빵해져서 떨어져도 더 좋은 논문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할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임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목자님들 한분 한분 귀한가 알게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현실 가운데서 엄청난 고군분투를 하고 계신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모습이 아름답고 모임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배웠습니다. 할수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일이 없느니라 하신 능력의 말씀을 깊이 마음판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장래 문제 뿐만 아니라 홍대 복음 역사 가운데도 언제나 일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을 믿고 간절히 기도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결론적으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삶가운데서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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